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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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모른 채 기다리는 삶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 채 기다리는 삶을 사는 현대인들. 기다리는 삶을 사는 나. 이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 현재를 살지 못하는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다림의 삶...기다림..기다림..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고도'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썻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고도는 우리가 기다리는, 그러나 오지 않는 그 무엇일 것이다. 극 전반에 깔려있는 잔잔한 허무함. 그들은 마침내 고도가 오면 이 지루한 기다림이 끝이 날것이라 믿지만, 막이 더 이어진다 해도 아마 고도는 오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막과 2막에서 계속된 것처럼 그들은 1막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한참 전부터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지속된 기다림에 이젠 기다림의 목적도 잊고, 이유도, 시간도, 방금 전에 만났던 이들도, 자신의 대한 기억도 모두 흐릿하게 잊어버리고 '기다린다'는 목적 의식만 습관적으로 붙잡은 채 그렇게 기다린다. 마침내 한 소년을 통해 고도는 올것이라 말하지만 아마도 그는...



뒤로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지만 문득문득 번뜩이는 질문을 던지는 에스트라공. 


에스트라공 (힘없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p27)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에 점철되어 오지도 않는, 존재마저 불분명한 고도에 묶여버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본다. 나와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공허하고 흐리멍텅한 구원이라는 허상을 위해 생각하는 권리까지 헐값에 팔아 넘긴 우리들.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하지만 생각을 안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무 아래서 지루한 기다림을 반복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목적도 이유도 잊어버린 기다림을 지리하게 이어가던 그들은 문득 나무를 보고 자살을 떠올린다. 고도가 와야지만 끝나는 이 기다림도, 죽으면 끝낼 수 있으니까. 아니 고도가 와도 이 기다림이 끝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죽으면 끝나니까. 하지만 한명이 죽고 나면 나머지 한명이 죽을 방도가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자살 생각마저 가볍디 가볍게 넘겨버린다.



블라디미르 확실한 건 이런 상황에선 시간이 길다는 거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뭐랄까 얼핏 보기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버릇이 되어버린 거동을 하면서 말이다. 넌 그게 이성이 잠드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짓이라고 할지 모르지. 그 말은 나도 알겠다. 하지만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성은 이미 한없이 깊은 영원한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야. 너 내 말 알아듣겠냐? (p134)



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포조가 그의 짐꾼을 데리고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얘기를 했다고 말하게 될까?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두자고. (사이)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p151)




극중 인물의 대사가 상당히 간결하고 상징적이기에 그 무엇을 대입해도 들어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리만 깔아준다면 한 구절을 가지고도 여러가지 해석을 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대체 포조와 럭키는 왜 등장한 것일까? 처음 럭키의 등장을 보았을 때는 포조가 시키는 대로 하는 그의 모습이, 심지어 생각마저도 포조가 시키면 하는 그의 모습이 현대사회의 회사원 같이 보였다. 그러나 럭키는 노예였다. 그것도 존재하기 위해선 포조가 필요한 노예. 그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충분히 포조를 제압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노예. 가축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지만 왜 포조에게 완전 복종하고 있는 것인가? 포조는 나치를, 럭키는 독재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굴종을 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인가? 왜 럭키는 제대로 먹는것도, 쉬는 것도 하지 못하면서 목에 끈이 묶인 채 포조에게 말없이 끌려다니는 것일까?

 아! 혹시 럭키는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와 같은 것일까? 럭키가 물리적으로 포조에게 묶여있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면서 고도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실로 그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어느 곳 하나 마음대로 가지 못한 채 나무 한그루 덜렁 있는 황량한 들판에서 어제도 내일도 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또한 끊임없이 지껄임으로써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는 와중에 에스트라공은 모든 것을 빠르게 잊어가고... 결국 럭키와 다를바 없는 처지에 있는 그들. 심지어 에스트라공은 럭키의 몫으로 포조가 던진 먹다만 닭뼈다귀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2막에서 포조는 왜 장님이 되었을까? 왜 그는 럭키보고 벙어리가 되었다고 했을까? 하지만 그가 장님이 되었다고 해서..장님이 되기 전과 그렇게 크게달라진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나..



에스트라공 (힘없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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