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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일기 ㅣ 알베르 카뮈 전집 1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5년 9월
평점 :
이것은 찐 여행일기다!
사유의 기록이라기보단 현장기록에 가까운 글. 애초에 카뮈도 이걸 출판하겠다고 한게 아니라 머릿말에서 나오듯이 그가 한데 따로 분류해서 모아놓은 걸 출판사가 '아! 혹시 이걸 모아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려고 한게 아닐까?' 하고 출판한 것이기 때문에... 리얼로다가 여행'일기'였음을... 사실 읽다보면 카뮈 자신도 개인적인 사유보다는 사실위주로 적겠다고 아예 다짐하는 부분이 나온다.(초반이었던 거로 기억..) 일기라기보단 현장답사를 나간 어느 탐험가의 객관적 관찰기록에 가까운 글. 특히나 2부의 남미 여행일기는 현상기록적인 면이 강해서 남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에게는 매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카뮈의 저서를 다 독파한 열렬한 카뮈의 팬이라면 이 책이 마치 숨겨진 이스터에그를 찾는 것 마냥 재미있게 다가갈 것이다. 왜냐면 이 일기 곳곳에는 그의 저서(페스트, 자라나는 돌 등)의 기반이 되는 내용들이 콕콕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스트와 이방인밖에 읽지 않은 나에게는 뭐랄까... 날것의 재료 같은 느낌? 유명요리사의 A요리를 먹고 감명받아서 그의 B요리도 먹고자 했는데 막상 요리를 주문하고 보니 그것이 조리되지 않은 당근과 감자 무더기임을 발견한 기분..?
관찰기록을 걷어낸 구절의 대부분은 알라딘 책소개에 나와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에게 다소간의 호소력을 갖는것은 첫째, 향후에 내가 카뮈의 저서를 대부분 읽고 난 후 다시 읽게될 때의 감상이 지금과 다를 것이라는 예상과 둘째,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도 그가 개인적인 우울과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에서 나와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이토록 상처받기 쉽다는 것을 느끼는 슬픔. 25년 후면 나는 57세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나의 작품을 쓰고, 내가 찾는 것을 발견해야 할 25년. 그런 다음에는 노년과 죽음.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작은 유혹들에 넘어가고 헛된 수다와 무익한 방황에 시간을 허비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 속의 두세 가지를 극복했다. 그러나 내게 그렇게도 필요한 저 우월감을 가지기에는 아직 멀었다. -미국여행 中 - P53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일종의 ‘귀찮은 물건 버리는 곳‘ 같은 데에 착륙한다-그게 그래도 억지로 나에게 손님 대접을 해주느라 애쓰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는 더 낫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가운데 이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내적으로 꺾이지 않도록 의지를 집중하느라 늦도록 잠들지 못한다. 내 일생에 처음으로 내가 완전한 심리적 붕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잘 견뎌내었던 이 힘든 균형이 나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너져버렸다. 나의 내부는 어렴풋한 형체들이 지나가고 나의 에너지가 용해되어버린 푸르스름한 물 같다. 이 의기소침은 어느 면에서 지옥이다. 만일 이곳에서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이 내가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느꼈다면 적어도 미소쯤은 띠어줄 수 있었을 텐데. -남아메리카 8월 10일 일기 中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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