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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철학 -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
이진경.최유미 지음 / 그린비 / 2024년 7월
평점 :
파리가 뜨겁다. 날도 뜨겁고 올림픽 열기도 뜨겁다.(시청률이 엉망이라지만 정작 주변 지인들은 관심이 뜨겁다) 지구촌 대잔치가 폭염마냥 뜨겁기만 하다.(금메달 개수로 고양되는 애국심이 불편하지만, 자꾸 관련 기사를 읽게 된다) 그나저나 너무 덥다. 이제 여름은 폭염과 열대야다. 지옥불 같은 뜨거운 여름에 즐기는 올림픽이라니. 이 세상이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라고 했던가?(고바야시 잇사)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표현이(왠지 올림픽이나 스포츠 하면 떠오른다) 더 없이 어울리는 축제의 장에서 나는 지옥을 생각한다. 죽음을 떠올린다. 그래서 파리 올림픽이 마치 꽃구경 마냥 즐겁고 또 슬프다. ‘이런 꽃구경이라도 없다면 사람들이 어찌 이 지옥을 살아갈 수 있을까?’ 순간의 즐거움과 시시한 흥미라도 없으면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다들 즐기시라. 다만 축제가 끝나면 허무와 쓸쓸함이 남는다. 그래서 다음 이벤트를 기다리게 된다. 이벤트야 또 열릴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이벤트(종말)가(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22년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말했다. 집단자살이냐 집단행동이냐 선택하라고. 물론 이유는 기후재앙이다. 2024년 현재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집단자살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꽃구경을 기꺼움으로 맞이하고 싶으니까. 광기에 휩싸인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고 싶으니까.
임지현 교수의 『기억전쟁』(p.282-283)에 나온 이야기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유대인 거지 아이를 강에 던지고 자살한 폴란드 사람이 있었다. 게토에 있어야 할 유대인 거지 아이를 발견한 폴란드 남성은 아이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고 이를 본 독일 병사들은 폴란드 남성에게 잔인한 제안을 한다. 아이를 강으로 던져 죽이면 너는 살려주겠다. 네가 못하면 아이와 당신 둘은 우리에게 죽는다. 남성은 아이를 강에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 자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보자. 현재 우리의 안락할 삶은 미래세대의 몫(에너지, 자원, 공기, 물을 포함한 사용할 수 있는 지구 생태 전반)을 미리 끌어다(강탈해) 쓰고 있다. 탐욕과 파괴를 먹고 사는 자본주의라는 짐승을 길들이는 대신 우린 자본주의에 길들었다. 그 결과 폴란드 남성이 아이를 강에 던지듯 우린 아이들 생명(미래)을 죽음의 강으로 내던지고 있다.(시선을 넓히면 인간종은 지구생태계에 속한 어마어마한 생명 또한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후문제는 해결가능하고 기후재앙도 막을 수 있다며 결기에 찬 희망을 논하는 책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도 방법도 없으니 재앙에 적응할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다가온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하는 책이 늘고 있다. 어쨌든 지옥은 시작됐고 인류는 집단자살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후재앙은 해결 할 수 있다는 가련한 희망을 품고 살든, 기후온난화따위 가짜뉴스라며 지금처럼 소비의 쾌락을 누리며 화석경제의 단맛에 취해 살든 그건 개인의 문제다. 진실은 종말이 시작됐고 우린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곧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질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번 글은 인용이 많아 길다. 양해 바란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삶은 기존의 삶과 다를 것이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다를 것이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하루는 어제와 다를 것이다. 잘 살 수 있다는 망상을 이제 희망이란 체크리스트에서 삭제하자. 우린 어차피 죽는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뻔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 사는 대부분 인간은 20년, 30년 안에 자살을 이유로 타살될 것이다. 타살이 자살이 되는 역설은 우리가 당할 죽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당신의 하루가(곰곰이 생각해 보라. 오늘 얼마나 많은 에너지-전기, 휘발유, 물-를 사용했는지, 얼마나 먹어치웠는지, 얼마나 소비했는지) 모여 우리를 집단자살로 몰고 가는 것이다.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리라 했다. 진짜 지옥에 시작됐다. 절망적인가? 아니다. 희망을 포기한다고 꼭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절망이 어쩌면 새로운 삶의 시작을 밝혀줄지 모른다.
전 지구적 기후변화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오늘날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위기는 모두 탄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의 자살적 탈진이라는 동일한 위기의 상이한 측면이다. 이 문명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으며,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을 확률 또한 희박하다.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곤경은 설령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다루기는 너무 힘들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어떤 것이 힘들다고 해서 그것을 피하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자신들에게 버거운 과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공포, 격분, 부정이 아니라 인내와 성찰과 사랑으로 미래를 대면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새로운 재앙이 닥칠 때마다 늘 그랬듯이 내일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듯 행동할 수 있다. 재앙에 대한 준비는 더 소홀히 하고 지속 불가능한 생활에 갈수록 더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 있다. 그게 아니면 매일매일을 그 전날의 죽음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현재가 제공하는 어떤 문제든 애착이나 두려움 없이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류세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p.34-35
우연히 읽은 이 책은 처음부터 도발적이다. 어차피 우린 다 죽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죽음이 기본값이다. 그다음 기후재앙을 고민하자. 뭐 이런 내용이었으니까. 기후재앙을 막을 방법에 대해 나 또한 무척 회의적이다. 책은 현재 논의되고 연구되는 기후재앙 해결책을 모두 부정한다. 그리고 매일 죽음을 성찰하고 인문학 정신으로 이 지옥의 시대를 살아가라고 말한다. 솔직히 후반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차피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숙명론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좀 찜찜하다. 아래 인용글을 읽어보시라.
우리의 지식과 힘은 이미 정점을 지난 것일지도 모르고, 홀로세에서 인간의 폭발적 증가는 해조류의 번성만큼이나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고, 인간 문명을 본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형태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130억 년도 더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페이지를 쓰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당신이 만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의 사건과 반작용의 연쇄를 시작한 양자 에너지의 폭발이 있었을 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p.195
위 인용문 앞부분은 ‘길가메시’와 ‘오디세이’ 따위의 고전 이야기가 등장한다. 생존하기도 버거웠던 과거 우리 조상들이 가진 인문정신의 위대함이 현재 종말에 이른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줄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으로 종말에 맞서자는 글쓴이의 주장이 내겐 어렴풋하다. 다만 읽기와 쓰기 능력이 다가올 파국의 시대에 무엇보다 유용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 같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더 다루겠다. 여하튼 기억하자. 우린 머지않아 다 죽는다는 사실.
덥다. 아니 너무 덥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무척 덥다. 그나마 난 에어컨을 틀고 있어서 버틸만하다.(13년 전에 산 고물 에어컨이라 성능이 시원찮다. 에어컨 바로 아래만 시원하다. 지금도 얼굴에 땀이 흐른다) 그런데 나는 썩 괜찮은 편이다. 80억 인구 중에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누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관심 있다면 책 『폭염 살인』을 읽어보시라
페름기는 5,000만 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나 약 6만 년 정도의 세월을 거치면서(지질학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그야말로 눈 깜작할 사이에) 급작스레 모든 게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이. 페름기에 생명체들이 죽은 것은 극단적 더위 탓이었다. 시베리아의 화산들이 격렬하게 분출하면서 수십억 톤에 이르는 이산화탄소를 단번에 대기 중으로 쏟아낸 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태로 지구의 기온이 거의 14℃나 껑충 뛰면서 60℃에 달하는 폭염을 지상에 몰고 왔던 것 같다. 열대지방에서는 바다 온도가 40℃까지 올랐으니, 이 정도면 자쿠지 욕조의 물 온도에 맞먹었다. 화산의 아가리에서는 용암도 얼마나 많이 분출되었는지 미국 전체 면적의 땅을 0.8킬로미터 두께의 용암이 뒤덮을 정도였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생명력을 되찾기까지는 1,000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 『폭염 살인』 p.464
2021년 여름, 미국 포틀랜드에 상상하기 힘든 폭염이 덮쳤다.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기온이 24.4℃에서 45℃까지 치솟았다. 147년 관측 사상 최고치였다. 단 며칠 동안의 폭염으로 공식발표된 사망자 수만 1000명이었다.(실제 사망자는 몇 배 더 많을 것이다) 저자가 폭염에 관한 책을 쓴 이유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폭염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폭염을 겪어보니 화염지옥이다. 이 지옥에서 소위 선진국에 사는 나는 행운아다. 아프리카대륙과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에어컨 없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 안타까운 죽음의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지만.(폭염 살인을 읽어보면 폭염피해의 양극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당연히 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피해가 막대하다. 죄책감이 느껴지시면 읽어보시라)
지금 겪는 폭염이 심각하다고 느껴진다면 이제 우리의 생명도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닫기 바란다.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가오는 종말을 피할 방법은 없으니까. 어떻게 잘 죽을지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지금부터는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이다.
문제는 암처럼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치명적 질병도, 방사능이나 기후위기, 멸종 같은 난감한 사태도, 애써 감추어 모르는 채 통과하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질끈 눈 감고 귀를 틀어막아도, 신체에 번져 가는 고통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삶을 조여 오는 고통의 대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컨대 다가오는 개인의 죽음도, 종의 죽음도, 모면할 길 없는 종말도, 애써 모르는 채 그저 무엇이든 열심히 해 가며 살자고 해 봐야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징후로 겪는 고통은 해마다 계절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지 않았는가? 이미 확인한 것처럼 멸종이나 붕괴라고 하지만 모든 이가 단번에, 또한 ‘쉽게’ 죽지 못한다. 사실 개인의 경우에도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이 출구 없는 삶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철학』 p.370
차라리 지구로 거대운석이 떨어져 모든 인간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편이 더 낫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우린 천천히 고통받으며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쯤에서 다시 언급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전히 지구온난화가 헛소리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내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지 생각하기로 했다. 내게 남은 시한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지속할지 고민할 것이다.
죽음의 긍정은 죽음 앞에서 가벼워지게 한다. 죽음을 긍정한다고 함은 죽음에 삶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긍정이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평온하게 삶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도래할 죽음을 향해 천천히 웃으며 다가가는 것이다. 가벼움의 감응으로 웃으면서, 신체에서 어절 수없이 일어나는 공포마저 그 웃음에 실어 흩어 버리고, 그 웃음으로 상황을 쿨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웃으면서 어떻게 ‘죽을 것이며’ 무엇을 남길 것인지, 무엇이 되어 남을 것인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을 긍정한다 함은 도래할 종말을 그렇게 웃으며 수긍하는 것이다. 종말 앞의 삶, 얼마 안 되는 삶이지만, 그리고 종말은 끝내 도래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삶을 만들기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침몰의 운명을 잊은 채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순진한 영혼이나, 그 운명에 사로잡혀 출구를 찾는 데 매몰된 고지식한 영혼과 달리, 우리를 포위한 종말의 비극적 감각에서 몸을 빼내어, 보지 않던 것을 보고 생각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구의 철학』 p.408-409
어떤가? 죽음을 긍정하고 우리 남은 생을 좋은 삶으로 만들 방법이 있어 보이는지. 확실히 말하는 데 있다. 읽고 쓰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읽고 쓰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세상과 맞닥뜨릴 것이다. 국가가 사라진 야만의 시대, 생존이 곧 삶인 시대를 살다 죽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추리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려면 읽고 쓰기 밖에 없다. 파국의 시대에 독서와 글쓰기가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한다면 이거 다라고 할 말은 없다. 그저 시시한 내 경험을 말하는 수밖에. 기후변화와 파국적 기후재앙 그리고 괴물 자본주의에 관한 관심은 내가 오랜 시간 책을 읽었기에 가능했다.(그렇다고 많이 읽지도 못했다) 다가올 시간이 지옥의 시간임을 알게 된 건 읽은 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환경운동 단체에 후원하고(10년이 넘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나름 노력하며 살고 있다.(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도움 안 된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알았으니까, 알고 있으니 뭐든 해야 하니까. 그게 인간다움이니까 하고 있다. 그러니 도움도 안 되니 어쩌니 말하지 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라)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집단죽음 앞둔 내 삶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두고 싶어서다.
앞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일 이들 또한 폴란드와 보스니아에 있는 내 친구들이 그 길고도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투쟁과 상실의 한가운데서 발견해낸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시도의 시기들은 단지 최악의 시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시기 또한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강력하며 의미 있는 형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피크레트는 사라예보 위쪽에 있는 언덕으로 등산을 갔을 때 이 놀라운 역설을 설명하려고 했다. 우리는 세르비아의 준군사 조직들이 역사상 가장 긴(고문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인 4년이었다) 포위 공격이 진행되던 동안 아래쪽 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을 추적하던 위치를 찾아 나선 참이었다. 프크레트는 그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했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하는 생존자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피크레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분명했거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면 위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개척해나갈 이들은 특별한 기회 또한 손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려는 투쟁 속에 사람들의 삶은 거대한 목표에 대한 공동의 의식을 통해 확장되고 상상력을 통해 활기를 띠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을 통해 풍요로워질 수 있다. 『긴 여름의 끝』 p.363-364
2000대 초반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재앙에 대한 대비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낙관이 존재했다. 전 세계가 지혜를 모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교토의정서 채택과 파리협약은 종말과 파국으로 향하는 인류 문명을 살릴 수 있는 작은 희망으로 보였다. 하지만 불확실했기에 말뿐인 논의만 이어졌다. 게다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젠 확실해졌다. 종말을 막을 수 없고 우리의 집단자살은 확실해졌다. 윗글처럼 이 비참한 확실성 아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이 삶을 개척해나갈 특별한 기회일까? 과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이 넘실거릴까?
집단 죽음이라는 확실성 아래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바로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 많아져야 한다. 반복된 이야기라 지루하겠지만 읽고 써야 한다. 행복하다고 장담은 못 하겠다. 하지만 알고 죽으면 확실히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타살로 보이는 자실이니까. 장대한 인류의 인문학적 지식을 맛보고 철학을 접해야 한다. 돈보다 가치 있는 인간 정신의 보고를 맛봐야 한다. 사유의 확장을 통해 다가올 종말을 웃으며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파국 앞에서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으로 변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짐승으로 변한 인간에 대항해 인간의 품위를 지킬 사람이 늘어난다. 죽음 앞에서 펼쳐지는 광기의 야만을 잠재워야 한다. 읽고 쓰란 이유가 바로 이거다. 죽음의 순간 인간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도서관에 갔더니 자료실에 사람이 가득하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두 배다. 밖은 폭염으로 도시가 녹을듯한데 도서관 안은 쾌적하고 시원했다. 원래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려 했는데 빈자리가 없어 책을 빌려 바로 집으로 왔다. 내가 빌린 책은 심해 생물 도감이다. 깊은 바다라는 말만 들어도 서늘해졌다. 펼쳐보니 심해라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 사진이 선명하다. 그래서 더 괴이하고 무섭다. 상상하기 힘든 형체와 색을 지닌 외계 생명체처럼 보인다. 다가올 지옥에서 살아남을 인간의 모습이(살아남는다 한들 한 줌도 안될 테지만) 이와 같을까? 아니면 종말의 시기를 살아낼 우리 내면이 저렇게 괴상할지 모를 일이다. 기괴하든 무섭든 아니면 귀엽든 상관없다.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으면 되니까.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지구는 오늘도 내일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번성하고 사라지는 일이 무덤덤하게 계속될 것이다. 생명이란 살아있으니 죽는 것이고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니까.
『긴 여름의 끝』 - 다미앤 듀마노스키/황성원/아카이브/2011
『기억전쟁』 – 임지현/휴머니스트/2019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로이 스크랜턴/안규남/시프/2023
『폭염 살인』 – 제프 구델/왕수민/웅진지식하우스/2024
『지구의 철학』 – 이진경, 최유미/그린비/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