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철학 - 모면할 길 없는 기후위기 시대의 삶에 부침
이진경.최유미 지음 / 그린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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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가 뜨겁다. 날도 뜨겁고 올림픽 열기도 뜨겁다.(시청률이 엉망이라지만 정작 주변 지인들은 관심이 뜨겁다) 지구촌 대잔치가 폭염마냥 뜨겁기만 하다.(금메달 개수로 고양되는 애국심이 불편하지만, 자꾸 관련 기사를 읽게 된다) 그나저나 너무 덥다. 이제 여름은 폭염과 열대야다. 지옥불 같은 뜨거운 여름에 즐기는 올림픽이라니. 이 세상이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라고 했던가?(고바야시 잇사)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상투적인 표현이(왠지 올림픽이나 스포츠 하면 떠오른다) 더 없이 어울리는 축제의 장에서 나는 지옥을 생각한다. 죽음을 떠올린다. 그래서 파리 올림픽이 마치 꽃구경 마냥 즐겁고 또 슬프다. ‘이런 꽃구경이라도 없다면 사람들이 어찌 이 지옥을 살아갈 수 있을까?’ 순간의 즐거움과 시시한 흥미라도 없으면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다들 즐기시라. 다만 축제가 끝나면 허무와 쓸쓸함이 남는다. 그래서 다음 이벤트를 기다리게 된다. 이벤트야 또 열릴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이벤트(종말)() 얼마 남지 않았다. 2022년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이 말했다. 집단자살이냐 집단행동이냐 선택하라고. 물론 이유는 기후재앙이다. 2024년 현재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집단자살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으니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꽃구경을 기꺼움으로 맞이하고 싶으니까. 광기에 휩싸인 짐승이 아니라 인간으로 죽고 싶으니까.

 

임지현 교수의 기억전쟁(p.282-283)에 나온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유대인 거지 아이를 강에 던지고 자살한 폴란드 사람이 있었다. 게토에 있어야 할 유대인 거지 아이를 발견한 폴란드 남성은 아이에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고 이를 본 독일 병사들은 폴란드 남성에게 잔인한 제안을 한다. 아이를 강으로 던져 죽이면 너는 살려주겠다. 네가 못하면 아이와 당신 둘은 우리에게 죽는다. 남성은 아이를 강에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 목을 매 자살했다. 자 이야기를 조금 비틀어보자. 현재 우리의 안락할 삶은 미래세대의 몫(에너지, 자원, 공기, 물을 포함한 사용할 수 있는 지구 생태 전반)을 미리 끌어다(강탈해) 쓰고 있다. 탐욕과 파괴를 먹고 사는 자본주의라는 짐승을 길들이는 대신 우린 자본주의에 길들었다. 그 결과 폴란드 남성이 아이를 강에 던지듯 우린 아이들 생명(미래)을 죽음의 강으로 내던지고 있다.(시선을 넓히면 인간종은 지구생태계에 속한 어마어마한 생명 또한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기후문제는 해결가능하고 기후재앙도 막을 수 있다며 결기에 찬 희망을 논하는 책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기후변화를 막을 시간도 방법도 없으니 재앙에 적응할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다가온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하는 책이 늘고 있다. 어쨌든 지옥은 시작됐고 인류는 집단자살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후재앙은 해결 할 수 있다는 가련한 희망을 품고 살든, 기후온난화따위 가짜뉴스라며 지금처럼 소비의 쾌락을 누리며 화석경제의 단맛에 취해 살든 그건 개인의 문제다. 진실은 종말이 시작됐고 우린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곧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죽음의 순간까지 이어질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이번 글은 인용이 많아 길다. 양해 바란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삶은 기존의 삶과 다를 것이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 다를 것이다. 종말(죽음)을 염두에 둔 하루는 어제와 다를 것이다. 잘 살 수 있다는 망상을 이제 희망이란 체크리스트에서 삭제하자. 우린 어차피 죽는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뻔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 사는 대부분 인간은 20, 30년 안에 자살을 이유로 타살될 것이다. 타살이 자살이 되는 역설은 우리가 당할 죽음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당신의 하루가(곰곰이 생각해 보라. 오늘 얼마나 많은 에너지-전기, 휘발유, -를 사용했는지, 얼마나 먹어치웠는지, 얼마나 소비했는지) 모여 우리를 집단자살로 몰고 가는 것이다.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리라 했다. 진짜 지옥에 시작됐다. 절망적인가? 아니다. 희망을 포기한다고 꼭 절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 절망이 어쩌면 새로운 삶의 시작을 밝혀줄지 모른다.


전 지구적 기후변화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오늘날 대학에서의 인문학의 위기는 모두 탄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의 자살적 탈진이라는 동일한 위기의 상이한 측면이다. 이 문명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으며, 인간이라는 종이 살아남을 확률 또한 희박하다.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곤경은 설령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다루기는 너무 힘들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처럼 어떤 것이 힘들다고 해서 그것을 피하는 선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자신들에게 버거운 과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공포, 격분, 부정이 아니라 인내와 성찰과 사랑으로 미래를 대면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우리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새로운 재앙이 닥칠 때마다 늘 그랬듯이 내일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듯 행동할 수 있다. 재앙에 대한 준비는 더 소홀히 하고 지속 불가능한 생활에 갈수록 더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 있다. 그게 아니면 매일매일을 그 전날의 죽음으로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현재가 제공하는 어떤 문제든 애착이나 두려움 없이 다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류세에서 사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p.34-35

 

우연히 읽은 이 책은 처음부터 도발적이다. 어차피 우린 다 죽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죽음이 기본값이다. 그다음 기후재앙을 고민하자. 뭐 이런 내용이었으니까. 기후재앙을 막을 방법에 대해 나 또한 무척 회의적이다. 책은 현재 논의되고 연구되는 기후재앙 해결책을 모두 부정한다. 그리고 매일 죽음을 성찰하고 인문학 정신으로 이 지옥의 시대를 살아가라고 말한다. 솔직히 후반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차피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숙명론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좀 찜찜하다. 아래 인용글을 읽어보시라.

 

우리의 지식과 힘은 이미 정점을 지난 것일지도 모르고, 홀로세에서 인간의 폭발적 증가는 해조류의 번성만큼이나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고, 인간 문명을 본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 형태로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130억 년도 더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페이지를 쓰고 있는 나와 읽고 있는 당신이 만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의 사건과 반작용의 연쇄를 시작한 양자 에너지의 폭발이 있었을 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p.195

 

위 인용문 앞부분은 길가메시오디세이따위의 고전 이야기가 등장한다. 생존하기도 버거웠던 과거 우리 조상들이 가진 인문정신의 위대함이 현재 종말에 이른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줄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으로 종말에 맞서자는 글쓴이의 주장이 내겐 어렴풋하다. 다만 읽기와 쓰기 능력이 다가올 파국의 시대에 무엇보다 유용할 것이라는 내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 같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더 다루겠다. 여하튼 기억하자. 우린 머지않아 다 죽는다는 사실.

 

덥다. 아니 너무 덥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무척 덥다. 그나마 난 에어컨을 틀고 있어서 버틸만하다.(13년 전에 산 고물 에어컨이라 성능이 시원찮다. 에어컨 바로 아래만 시원하다. 지금도 얼굴에 땀이 흐른다) 그런데 나는 썩 괜찮은 편이다. 80억 인구 중에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누릴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관심 있다면 책 폭염 살인을 읽어보시라

 

페름기는 5,000만 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나 약 6만 년 정도의 세월을 거치면서(지질학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그야말로 눈 깜작할 사이에) 급작스레 모든 게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이. 페름기에 생명체들이 죽은 것은 극단적 더위 탓이었다. 시베리아의 화산들이 격렬하게 분출하면서 수십억 톤에 이르는 이산화탄소를 단번에 대기 중으로 쏟아낸 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태로 지구의 기온이 거의 14나 껑충 뛰면서 60에 달하는 폭염을 지상에 몰고 왔던 것 같다. 열대지방에서는 바다 온도가 40까지 올랐으니, 이 정도면 자쿠지 욕조의 물 온도에 맞먹었다. 화산의 아가리에서는 용암도 얼마나 많이 분출되었는지 미국 전체 면적의 땅을 0.8킬로미터 두께의 용암이 뒤덮을 정도였다. 지구가 회복되어 다시 생명력을 되찾기까지는 1,000만 년의 시간이 걸렸다. 폭염 살인p.464

 

2021년 여름, 미국 포틀랜드에 상상하기 힘든 폭염이 덮쳤다. 24시간이 채 되지 않아 기온이 24.4에서 45까지 치솟았다. 147년 관측 사상 최고치였다. 단 며칠 동안의 폭염으로 공식발표된 사망자 수만 1000명이었다.(실제 사망자는 몇 배 더 많을 것이다) 저자가 폭염에 관한 책을 쓴 이유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폭염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폭염을 겪어보니 화염지옥이다. 이 지옥에서 소위 선진국에 사는 나는 행운아다. 아프리카대륙과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에어컨 없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 안타까운 죽음의 원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당신이 아는지 모르겠지만.(폭염 살인을 읽어보면 폭염피해의 양극화 내용이 많이 나온다. 당연히 없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의 피해가 막대하다. 죄책감이 느껴지시면 읽어보시라)

 

지금 겪는 폭염이 심각하다고 느껴진다면 이제 우리의 생명도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닫기 바란다.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가오는 종말을 피할 방법은 없으니까. 어떻게 잘 죽을지 생각하는 것이 더 낫다. 지금부터는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이다.

 

문제는 암처럼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치명적 질병도, 방사능이나 기후위기, 멸종 같은 난감한 사태도, 애써 감추어 모르는 채 통과하고 싶어도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질끈 눈 감고 귀를 틀어막아도, 신체에 번져 가는 고통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다. 삶을 조여 오는 고통의 대기를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요컨대 다가오는 개인의 죽음도, 종의 죽음도, 모면할 길 없는 종말도, 애써 모르는 채 그저 무엇이든 열심히 해 가며 살자고 해 봐야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후위기의 징후로 겪는 고통은 해마다 계절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지 않았는가? 이미 확인한 것처럼 멸종이나 붕괴라고 하지만 모든 이가 단번에, 또한 쉽게죽지 못한다. 사실 개인의 경우에도 죽음보다 더 어려운 것이 출구 없는 삶이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고 지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철학p.370

 

차라리 지구로 거대운석이 떨어져 모든 인간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편이 더 낫다. 뜨거워진 지구에서 우린 천천히 고통받으며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이쯤에서 다시 언급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전히 지구온난화가 헛소리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안다.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내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떻게 죽어야 잘 죽는지 생각하기로 했다. 내게 남은 시한부 삶을 어떤 방식으로 지속할지 고민할 것이다.

 

죽음의 긍정은 죽음 앞에서 가벼워지게 한다. 죽음을 긍정한다고 함은 죽음에 삶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긍정이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평온하게 삶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도래할 죽음을 향해 천천히 웃으며 다가가는 것이다. 가벼움의 감응으로 웃으면서, 신체에서 어절 수없이 일어나는 공포마저 그 웃음에 실어 흩어 버리고, 그 웃음으로 상황을 쿨하게 지켜보는 것이다. 웃으면서 어떻게 죽을 것이며무엇을 남길 것인지, 무엇이 되어 남을 것인지를 사유하는 것이다. 유물론자에게 종말을 긍정한다 함은 도래할 종말을 그렇게 웃으며 수긍하는 것이다. 종말 앞의 삶, 얼마 안 되는 삶이지만, 그리고 종말은 끝내 도래하겠지만, 그래도 좋은 삶을 만들기를 죽음에 이를 때까지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침몰의 운명을 잊은 채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순진한 영혼이나, 그 운명에 사로잡혀 출구를 찾는 데 매몰된 고지식한 영혼과 달리, 우리를 포위한 종말의 비극적 감각에서 몸을 빼내어, 보지 않던 것을 보고 생각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구의 철학p.408-409

 

어떤가? 죽음을 긍정하고 우리 남은 생을 좋은 삶으로 만들 방법이 있어 보이는지. 확실히 말하는 데 있다. 읽고 쓰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읽고 쓰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상상해 본 적 없는 세상과 맞닥뜨릴 것이다. 국가가 사라진 야만의 시대, 생존이 곧 삶인 시대를 살다 죽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추리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갖추려면 읽고 쓰기 밖에 없다. 파국의 시대에 독서와 글쓰기가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한다면 이거 다라고 할 말은 없다. 그저 시시한 내 경험을 말하는 수밖에. 기후변화와 파국적 기후재앙 그리고 괴물 자본주의에 관한 관심은 내가 오랜 시간 책을 읽었기에 가능했다.(그렇다고 많이 읽지도 못했다) 다가올 시간이 지옥의 시간임을 알게 된 건 읽은 후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환경운동 단체에 후원하고(10년이 넘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나름 노력하며 살고 있다.(그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도움 안 된다는 거 잘 안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알았으니까, 알고 있으니 뭐든 해야 하니까. 그게 인간다움이니까 하고 있다. 그러니 도움도 안 되니 어쩌니 말하지 말고 책을 읽고 글을 쓰라)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집단죽음 앞둔 내 삶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두고 싶어서다.

 

앞으로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일 이들 또한 폴란드와 보스니아에 있는 내 친구들이 그 길고도 잔혹한 전쟁에서 살아남아 투쟁과 상실의 한가운데서 발견해낸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거대한 시도의 시기들은 단지 최악의 시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는 최고의 시기 또한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강력하며 의미 있는 형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 친구 피크레트는 사라예보 위쪽에 있는 언덕으로 등산을 갔을 때 이 놀라운 역설을 설명하려고 했다. 우리는 세르비아의 준군사 조직들이 역사상 가장 긴(고문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인 4년이었다) 포위 공격이 진행되던 동안 아래쪽 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을 추적하던 위치를 찾아 나선 참이었다. 프크레트는 그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했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회고하는 생존자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피크레트에게 물었다.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분명했거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면 위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이 불확실한 미래에 삶을 개척해나갈 이들은 특별한 기회 또한 손에 넣을 것이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인간으로서의 여정을 지속하려는 투쟁 속에 사람들의 삶은 거대한 목표에 대한 공동의 의식을 통해 확장되고 상상력을 통해 활기를 띠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을 통해 풍요로워질 수 있다. 긴 여름의 끝p.363-364

 

 

2000대 초반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재앙에 대한 대비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낙관이 존재했다. 전 세계가 지혜를 모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교토의정서 채택과 파리협약은 종말과 파국으로 향하는 인류 문명을 살릴 수 있는 작은 희망으로 보였다. 하지만 불확실했기에 말뿐인 논의만 이어졌다. 게다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젠 확실해졌다. 종말을 막을 수 없고 우리의 집단자살은 확실해졌다. 윗글처럼 이 비참한 확실성 아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이 삶을 개척해나갈 특별한 기회일까? 과연 생존에 필요한 창의성이 넘실거릴까?

 

집단 죽음이라는 확실성 아래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있다. 바로 생각이란 걸 할 줄 아는 인간이 많아져야 한다. 반복된 이야기라 지루하겠지만 읽고 써야 한다. 행복하다고 장담은 못 하겠다. 하지만 알고 죽으면 확실히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타살로 보이는 자실이니까. 장대한 인류의 인문학적 지식을 맛보고 철학을 접해야 한다. 돈보다 가치 있는 인간 정신의 보고를 맛봐야 한다. 사유의 확장을 통해 다가올 종말을 웃으며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파국 앞에서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으로 변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짐승으로 변한 인간에 대항해 인간의 품위를 지킬 사람이 늘어난다. 죽음 앞에서 펼쳐지는 광기의 야만을 잠재워야 한다. 읽고 쓰란 이유가 바로 이거다. 죽음의 순간 인간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도서관에 갔더니 자료실에 사람이 가득하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두 배다. 밖은 폭염으로 도시가 녹을듯한데 도서관 안은 쾌적하고 시원했다. 원래 노트북을 펴고 글을 쓰려 했는데 빈자리가 없어 책을 빌려 바로 집으로 왔다. 내가 빌린 책은 심해 생물 도감이다. 깊은 바다라는 말만 들어도 서늘해졌다. 펼쳐보니 심해라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 사진이 선명하다. 그래서 더 괴이하고 무섭다. 상상하기 힘든 형체와 색을 지닌 외계 생명체처럼 보인다. 다가올 지옥에서 살아남을 인간의 모습이(살아남는다 한들 한 줌도 안될 테지만) 이와 같을까? 아니면 종말의 시기를 살아낼 우리 내면이 저렇게 괴상할지 모를 일이다. 기괴하든 무섭든 아니면 귀엽든 상관없다.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으면 되니까.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지구는 오늘도 내일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번성하고 사라지는 일이 무덤덤하게 계속될 것이다. 생명이란 살아있으니 죽는 것이고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니까.


긴 여름의 끝- 다미앤 듀마노스키/황성원/아카이브/2011

기억전쟁』 – 임지현/휴머니스트/2019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 – 로이 스크랜턴/안규남/시프/2023

폭염 살인』 – 제프 구델/왕수민/웅진지식하우스/2024

지구의 철학』 – 이진경, 최유미/그린비/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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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질은 부드러워
아구스티나 바스테리카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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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시리즈 브이가 방영된 건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1986년이다. 시기를 꽤 정확히 기억하는 건 징그러운 외계파충류가 지구를 침략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파충류들이 식량자원으로 인간을 냉동시켜 보관한 강렬한 장면 때문이다. 사람을 먹는다는 상상을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동물의 왕국에 등장하는 사자나 호랑이 또는 식인종이다. 그도 아니면 정신 나간 살인자가 인육을 먹는 장면쯤이다. 드라마에서 내가 놀란 건 수많은 인간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첨단 장치로 무장한 냉동고에 보관한 부분이다. 균일한 품질을 지닌 물건이 대량생산되고 유통되는 첨단 공장 시스템에 상품 대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부분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면서 언제는 인간이 상품이 아니었느냐 만은 인간이 즉 상품이라는 메타포는 관념에서 존재하는 허상이다. 하지만 먹을 고기가 사라져 인간 고기를 키우고 도살하고 도축하는 세세한 장면을 써 내려간 이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불쾌한 여운이 오래 간다. 작가는 이 불쾌한 여운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서평에 딴소리만 쓰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딴소리를 조금 하겠다. 십 수년 전 EBS에서 개최하는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을 통해 일용할 양식이란 영상을 봤다. 과일과 곡물을 비롯해 육고기와 물고기를 식품으로 가공하는 행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 돼지, 닭을 도살하고 도축하는 공장이 나오는 장면에서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효율을 극대화한 공장 시스템은 살아있는 가축을 순식간에 포장육으로 만들어냈다. 죽음 직감한 소, 돼지의 버둥거림과 반복 동작으로 소를 반으로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발을 잘라내는 무념무상한 노동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죽어가는 동물들이 애처롭다거나, 혹여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까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다만 육가공 공장의 도살과 도축시스템이 무척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유튜브에 다큐 일용할 양식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축산가공공장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겠다. 이 책에선 내가 쓴 바로 윗 글에서 소와 돼지 따위의 가축 이름을 빼고 인간을 대입하면 딱 맞는 인간고기도축공장의 간부가 주인공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계는 더 이상 가축이나 동물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고기용 인간을 길러 잡아먹는다. 뭐 인간이 육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여튼 고기용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인간에게 언어란 참 묘하다. 인간고기를 그저 개체니 상품이니 하는 말로 바꾸는 단순한 행위로 인간을 먹는다는 죄책감이나 도덕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뭐 아닌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책에서는 효율적으로 인간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현재 우리가 가축에게 행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고기용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한다. 소리를 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대를 제거한다, 팔다리가 잘려 움직이지 못하는 임신한 암컷 개체도 등장한다.(왜 성대를 제거하고 임신한 개체의 팔다리를 잘라내는지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좁은 공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스스로를 쪼아대는 닭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닭 부리는 제거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다. 호르몬을 투여하고, 각종 백신으로 병들지 않게 해야 한다. 여튼 개체 즉 인간을 키우는 사육장과 도살장 그리고 도축장에 대한 매우 자세한 묘사는 책에 고스란히 나온다. 물론 매우 흡인력 있는 글솜씨로. 인간의 가죽을 재료로 하는 가죽공장도 나오는데 이건 덤이다. 개체로 변한 육가공 재료인 인간은 버릴게 하나도 없다.

 

책을 읽고 나면 찜찜한 기분이 든다. 앞서 이야기한 불쾌한 여운이 감돈다. 인간고기가 가공되는 과정도 그렇지만 인간사냥터에 대한 묘사나 사냥감으로 잡은 인간고기를 신선한 상태에서 요리해 먹는 장면은 재밌고 동시에 불쾌하다. 쾌와 불쾌를 동시에 주는 글이라니, 워낙 작가의 글솜씨가 뛰어난 탓이기도 하겠다.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은 개인적으로 좋은 글이라 본다. 여하튼 내가 느낀 불쾌함과 찜찜함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비도덕적 행위 때문이 아니다. 우린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타인에게 비도덕적이니까. 우리가 사는 삶 또한 즐겁고 행복하지만 그럴 때마다 불쾌함이 엄습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안락하고 배부르고 별 고통 없이 잘 산다. 문제는 그 잘사는 우리의 행복은 반드시 불행으로 점철된 사람들에 의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이는 구조적으로 불평등을 원료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이다. 오늘 나의 행복은 오늘 너의 불행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것이니까.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같다. 내가 행복에 가까운지 아니면 불행에 가까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나눠진다. 내 불편함과 불쾌함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의 욕심으로 희생되는 동족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 인간이 인간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같은 인간을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일이 얼마나 빈번한지 생각해보라. 무엇보다 인간을 상품으로 치환하면 인간 또한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가공해야 할 존재가 된다. 무감각하게 돼지 발을 자르듯 인간을 무감각하게 대하는 시대로 변질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건 육식을 비난하거나 인간의 탐욕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화 시스템에서 인간고기를 가공육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기로 대상화된 인간에게 어떠한 감정도 품어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우린 지금 내 앞의 인간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가? 함께 살아갈 인간인지, 아님 그저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단순한 사물인지.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사물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린 충분히 인간을 먹고 마실 수 있다. 사람이라도 육질은 부드러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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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0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업쩝이 2024-08-06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답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수학은 스토리다 - 수포자도 읽을 수 있는 수학책
박옥균 지음 / 리더스가이드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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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심각하게 수학을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힌다. 물론 강제다. 학대 수준은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문제를 해석하고 맥락을 찾아 해결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하는 수학에서 해석의 힘과 맥락을 찾는 능력은 책을 읽어야 만들어진다. 즐겁고 재밌는 수학이기 위해 문제 풀이는 스토리로 접근해야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어야 할 아이들이 짧고 강렬한 영상에 빠져 드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시국이 만든 비대면 문화의 여파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됐다. 오랜 시간 과외다 학원이다 하며 수학으로 밥벌이를 하는지라 코로나를 겪은 아이들의 수학학습능력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 요즘 매일매일 확인할 수 있다.

 

사칙연산을 수학의 기본 도구라 본다면 아이들은 나눗셈을 가장 어려워한다. 단순하게 자연수를 나누는 건 쉽지만 분수와 숫자의 비로 사고를 확장하는 과정은 곤혹스럽다. 초등학교 때 시작되는 숫자 사이의 비와 나눗셈을 제대로 이해하는 아이들은 경험상 머리가 좋은 부류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읽기와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념이 하나로 연결되는 매력이 수학의 바탕이라면 이런 수학 근력 혹은 수학 기초체력은 책에서 나온다. 그리고 논리적인 스토리를 만들 줄 아는 아이들이 튼튼한 수학 체력을 키운다.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대부분 스마트폰 영상에 빠져 있다. 어찌하겠는가. 시대가 이런 시대인걸. 중요한 건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혹독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수학을 스토리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책에서 언급하듯 수학이란 거대한 숲을 미세한 수준으로 확대해 보면 프랙탈 구조마냥 끊임없이 확장되고 반복되기에 그렇다. 기본적으로 이차식은 이차방정식과 이차부등식 그리고 이차함수로 확장된다. 아이들에게 이차방정식은 해만 구하면 끝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차방적식의 해는 이차함수의 그래프와 연결되고 다시 이차부등식의 범위를 찾는 데까지 확장된다. 중요한 것은 방정식이든 부등식이든 이차함수를 평면좌표에 그래프로 나타내면 쉽게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이차원 평면에 그려지는 이차함수의 곡선은 실제 중고등학교 수학의 기본중의 기본이다. 하지만 중학 3학년 과정에서 아이들은 함수란 말만 나와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차방정식에서 이차함수로 넘어가는 과정 자체가 재미없기도 하지만 이차함수로 표현된 그래프로 이차방정식과 부등식을 해결하는 즐거움은 사고의 확장이 없인 힘들 수 밖에 없다. 이 사고의 확장이 쉽냐 어렵냐는 책읽기 혹은 스토리 구성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수학이 스토리라면 기승전결이 논리적이어야 한다. 스토리의 바탕에 정의와 정리 따위의 공리가 있다. 개념이 확실하다면 그 속에서 패턴을 찾아 확장시켜 나가며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야기는 이유가 있기에 마땅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 결론에 다른 개념을 첨가하면 다시 새롭지만 기존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두 문자로 이루어진 방정식을 만족하는 점을 찍어 그래프로 표현한 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수학을 단절된 무언가의 결합이 아닌 연속된 개념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즉 수학이란 스토리인 것이다.

 

글쓴이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그리고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수학교양서는 많지 않으니 말이다. 대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용은 더하다. 단순히 아이들만 놓고 봐도 이 책은 초등학생이 읽어도, 고등학교 3학년이 읽어도 좋을 책이다. 그만큼 교과과정과 가깝다는 말이다. 일대일대응이랄까?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과 비교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알맞게 구성되어 있다. 상당히 방대한 내용을 수학 개념과 패턴 그리고 스토리라는 핵심으로 탄탄하게 기술해 놓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수식과 그래프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도 글만 따라 읽기만 하면 수학의 본질을 재밌게 즐길 수 있다. 글쓴이의 열정과 감각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을 어른들이 많이 읽었으면 한다. 학부모나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도 추천한다. 아이들이 성적을 위해 수학을 공부한다지만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도 수학은 어두운 삶의 길에 환한 빛을 비춰주는 등불이니 말이다. 지금보다 다가올 미래예측이 중요한 시기가 또 있었을까? 미래는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과거의 맥락과 패턴이 만든 현재 이야기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이 스토리의 마지막이 어떤 식일지 수학이 도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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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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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호박, 콩은 세 자매 농법의 주인공이다. 옥수수는 콩이 타고 자랄 수 있는 지지대 역할을, 콩은 질소 고정을 통한 비료로, 호박은 잡초를 억제하고 수분을 유지하는 임무를 담당한다. 북미 원주민 부족이 오래전부터 사용한 농법이란다. 이들 세 자매는 기막힌 타이밍으로 서로에게 가장 효과적인 협력체로 작동한다. 바나나와 카사바를 함께 재배하는 경우와 같은 복합작물재배의 선지자쯤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세 자매를 주목할 이유는 바로 호혜성이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다는 그 호혜성말이다. 본질적으로 옥수수와 호박 그리고 콩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삶을 산다. 중요한 건 자신의 행위가 남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호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각각의 전략이 한데 어우러져 호혜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책에 호혜적 교차먹임이라 표현된 세 자매 농법은 매번 적절한 균형을 찾아야 하는 인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해법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냥 정답이라 하겠다.

 

사실 별 관심 없었다. 강원지사가 누가 되던.

이젠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분법이 무색해진 거대 양당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있으니 양당에서 한명씩 나온 선거에서 누가 지사가 되던 말든 딴 세상 얘기였다. 그런데 후배의 권유로 본 토론 영상 속 두 후보는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서로를 헐뜯고 할퀴던 대선토론의 연장쯤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서로를 배려하고 상대의 공약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며 공감하는 토론이었다. ‘내가 도지사가 되면 당신의 공약도 추진하겠다.’, ‘그렇다면 내가 낙선해도 도지사가 된 당신을 돕겠다.’라는 식의 훈훈한(?) 토론이었다. 네거티브가 전부였던 대선 피로감을 의식했든 아니든 신선했다. 협잡과 야합이 난무하는 정치판 속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공중파 토론 방송에서 양당의 두 후보가 협력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인 것 만으로도 난 감동(?)했다. 이것이 바로 세 자매 농법이 아닌가? 두 후보의 협력은 스스로의 정치적 성공을 위한 바탕일지 모른다. 인간이 주고받는 호혜성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밑밥일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를 깍아내리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행위는 식물보다 못한(식물을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후진 행동이다. 공생을 위한 호혜성은 혐오와 차별의 바이러스로 고통받는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다.

 

식물은 위기를 감지하면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분비해 주변 식물에게 위험신호를 보낸다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면 좋을 듯싶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니 말이다. 여하튼, 평생 자신이 성장한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식물이지만 어쩌면 식물은 혼자 살 수 없음을 직감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함께 살아가는 생태적 다양성이 생존의 필수임을 유전자에 각인된 그런 존재 말이다. 어쨌든 위기상황에서 식물은 생존을 위해 생명활동을 최소화하는 전략으로 에너지를 아낀다. 이러니 인간보다 나을 수밖에. 우리는 우리가 속한 인간 종을 고등생물이라 스스로 정의한다.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고등한 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지능이 높고 주변 환경을 상황에 따라 이용하는 능력이 인간종의 영원한 번성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수 십년 전부터 기후니 식량이니 자연생태니 하며 붕괴의 신호를 접하면서도 눈앞의 이익과 욕망으로 미래를 갈아넣어버렸으니 말이다. 다양성의 이해는 고사하고 우린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하면 적으로 삼고 혐오하기 일쑤니 말이다. 그러니 오만함을 버리고 식물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호혜성만이 아니다. 미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대비하는 지혜도 배워야한다. 가뭄에 대비해 에너지 절약에 모든 걸 거는 식물마냥 우리는 더 불편하고 더 배고픈 시절을 살아내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경험이 가장 적기 때문에 배울게 가장 많다. 우리는 다른 종들 가운데 우리의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그들의 지혜는 살아가는 방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직접 본보기가 되어 우리를 가르친다.” -p.14

 

여기서 그들은 바로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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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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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원숭이는 벌레가 된 인간만큼 극적이진 않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갑충이 되어버린 이야기보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간으로 변한 원숭이 이야기가 더 어려웠다. 원어 독일어가 문제인지, 글이 짧아선지 카프카의 글 학술원의 보고시골 의사다음으로 난해하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는 내게 꾸준히 어렵기만 한 글이 였음이 확실하다. 고마운 책이다.

 

21세기의 오분의 일이 지났다. 정말이지, 과거의 잔재를 먼지 털 듯 털어낸 상큼하고 신선한 새 세상이 오리란 기대까진 하지 않았다. 반대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기후변화, 인구과밀, 양극화, 종교 갈등, 식량부족 따위의 문제들로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모진 환경과 조건을 지혜롭게 극복한 인간종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새롭게 맞이하는 신세기가 회색빛이긴 해도 칠흑의 검은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기대는 무너졌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인간이 보인 극단적인 이기심은 놀라웠다. 가난한 나라의 방역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가운데 돈 많은 소위 선진국은 백신을 독점했다. 그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나를 포함해) 없는 나라 사람들이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았다. 보편이라는 수사가 붙어야 할 휴머니즘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계가 어두컴컴했다.

 

생존을 위한 대의(?)로 전쟁이 벌어졌다. 1930년에 볼 수 있었던 민족주의, 국가주의, 영토확장주의가 2022년에 다시 세계 정치에 극적으로 부활했다. 이를 대응하기 위해 만든 국제연합은 마이크 앞에서 실체도 없는 말잔치만 할 뿐이고 강대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며 주판알을 튕길 뿐이다. 정의는 이해당사자들 저마다의 논리에 찢겨 너덜너덜해졌다.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해방시킨다는 나라도, 잘 싸워 이기라며 무기며 물자를 지원하는 나라도 곱게 보이지는 않다. 참화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먼 나라 남의 일이다. 입으로 정의를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자식의 팔에 이름과 주소를 새기는 부모 마음을 우리가 어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과연 희망찬 2022년이란 말인가.

 

피터는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에게 인간되기란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선택이었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피터는 인간이 되었다. 그런데 인간은 생존을 위해 원숭이가, 아니 짐승이 되어가고 있다. 지독한 혐오와 배제, 집단주의는 이성의 존재가 아니라 본능에 따르는 동물의 습성이다. 대화와 타협보다 힘으로 억누르고, 약자에 대한 배려가 아닌 강자의 독식은 진보를 역행하며 짐승의 길을 가고 있는 인간 문명 퇴화의 전조다. 기후변화 따위의 물리적 파국을 걱정했던 나의 낭만적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간은 스스로 파멸하고 짐승이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오래던 마키아벨리라는 선지자는 인간이 지닌 이성과 본능에 관한 통찰을 글로 남겼다. 군주론에서 이상적인 군주는 야만과 이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한다. 백성들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깝기 때문에 사랑보다 폭력이 통치에 효과적이라고 했다. 물론 배부르고 등따신 시절에는 인간적인 풍모를 풍기는 것이 더 유리하다. 하지만 고난의 시대엔 짐승처럼 대하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수 조건이라 했다.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짐승의 본능을 숨기면서 말이다. 숨겨진 야만성은 언제나 생존의 위협이라는 허울 아래서 폭력을 정의로 탈바꿈한다. 그게 인간이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이런 걸 말이다. 인간이 그런 존재인걸. 그저 최대한 애쓰고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인간이 된 원숭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의 길이 무언지 찾으면서 말이다. 피터는 인간이 되는 최종 과정이 풍경에 녹아든 것이라 했다. 아마 인간사회의 일부분으로 동화된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풍경이 된다는 것은 이성과 본능을 초월한 그 무엇이란 생각이 든다. 서로가 연결되어 하나를 만들어내는 건 우리 인간종이 자연의 일부요 지구 생태계의 부분이라는 자각에서 가능하다. 내 존재가, 우리라는 공동체가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오판이야말로 파멸의 시작이다. 우리에겐 그저 약간의 이성을 갖춘 원숭이일 뿐이라는 겸손함이 필요하다. 부족함을 함께 채워가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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