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진 수어사이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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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마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버진 수어사이드

 

왜 죽었을까?

다섯 자매의 자살이란 문구는 책을 사야겠다는 소비욕과 읽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내게 자살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스스로 삶의 끈을 놓는 그 행위가 내게는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을 것 같은 이상향으로도, 어둡고 눅눅한 지하 던전으로도 느껴진다. 두렵지만 달콤한 갈증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숨을 쉬는 매 순간 자멸을 초래할 수 있는 무기가 우리 손안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자기 자신에 맞서 그 무기를 들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나는 시오랑의 놀랍도록 희극적인 염세주의, 즉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우울해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너무 낙관적이라는 생각에 의지해 이 책을 끝낸다. 우리가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구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탈출구로서 자살을 믿는다는 건 자멸을 통한 구원 능력을 오만하게 과대평가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 삶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우리의 주의와 무한히 실망을 수용할 수 있을 듯한 능력을 요구하는, 세계의 다정한 무심함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p.16 - 자살에 대하여

 

삶의 의미 따윈 없으니 그냥 살아라. 자살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의 차이는 없다. 사회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자살은 의미 없다. 그렇다고 삶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심한 세상을 그러려니 하며 즐겨라. 그러다 자연사해라. 그러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 사이먼 클리츨리는 자신의 책에서 삶과 자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내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이지만. 여튼 그래서 말인데

 

나 또한 삶에 대한 기대 따위 없어진 지 오래다. “그냥 될 대로 되라지.”란 마음으로 산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일만 주어진다면, 누구 말마따나 하루 한번 맛있는 반찬이 있는 삶이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남은 생을 살자꾸나 마음 먹었다. 하지만 삶이 마음 먹은 대로 어디 살아지던가? 종일 이리저리 배회하는 뇌를 내팽개치고 평온해지고 싶은데 머릿속은 매일이 매시간이 고난이다. 편하게 먹고 숨 쉬고 산다는 게 영 개운치 않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다. 물론 난 생각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다. 어쨌든 자살이란 건 뭔가 딱 부러지게 정의되지 않는다. 자살하는 자의 심리는 수학 문제처럼 깔끔한 풀이로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수많은 가능성과 추측이 가득한 미스터리다. 배배 꼬여있는 수수께끼다. 그런데도 스스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행위는 남겨진 자에게 의문을 남긴다. 그는, 그녀는 왜 자살했으며 난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있어야 하는가? 정답은 애초에 없다. 이유를 찾는 과정만 있고 분석만 난무한다. 이 서평은 그저 그런 의견에 불과하다. 다만 이렇게 읽고 쓰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난 이 세상을 견딜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리즈번가의 다섯 딸이 모두 자살했다. 놀라운가? 비현실적인가? 그럴 리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엔 얼마나 놀랍고도 놀랄 일이 가득한데 고작 사람 몇 명 자살한들 뭐가 대수라고. 그게 뭐 어쩌란 말인가. 시답지 않은 미스터리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미리 말해두겠다. 책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성장소설도 사회소설도 아니다. 인류에, 문명에 대한 경고문이다. 자매들은 희생양었다. 버진들의 수어사이드는 지금 인간들이 벌이는 비현실적인 사건에 대한 서늘한 경고다. 리즈번가의 다섯 자매는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계를 그대로 이어받기 거부했다. 욕망으로 가득하고 어마어마하게 무능한 우리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말이다. 비현실이 가득한 미친 세상. 자매들은 그래서 죽었다.

 

일상의 비현실을 이야기해 보자. 테러 때문에 국가는 대학에 인종차별을 강요한다. 대학이 거부하자 국가는 대학지원금을 중단한다. 테러 위협 때문에 신입생 선발에서 외국인은 제외한다. 외국인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란다. 매일 뉴스에 폭탄과 미사일이 등장한다. 드론에 장착된 폭탄이 전략폭격기를 박살냈다. 미사일이 핵 발전소와 병원을 타격한다. 관세 폭탄이 세계 경제를 박살 내는 건 덤이다. 전쟁으로 고립무원이 된 민간인들이 살기 위해 식량 배급 차량으로 돌진하다 총에 맞아 죽는다. 녹아내린 빙하가 마을을 덮친다. 계엄이 선포되고 해제된다. 탄핵된다. 사람이 죽었다. 화력발전소에서, 빵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인류 문명은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AI라는 파랑새의 양 날개는 고효율과 최적화의 이름으로 우리를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걸 누릴 유토피아로 인도할 것이란다. 과연 그럴까? 뭐 그러든지 말든지 난 관심 없다. 기후재앙을 접어두고 생각해도 난 인공지능이 만든 세상이 비현실적일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물론 현실이 뭐고 비현실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난 할 말이 없다. 대답한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이 자신과 타인과 공동체와 생태와 환경에 대한 존재론적인 진지한 고민이 사라진다면 그게 바로 비현실이다. 아마 이 존재론적인 고민도 인공지능이 답을 줄 거다. 우린 그저 답을 받아먹기만 하면 될 것이다.(앞선 문장들 때문에 불안하고 짜증나신다면, 존재론적 고민이 궁금하시다면 아무 책이나 읽으시라. 그곳에 답이 있으니. 난 인간들 대부분이 읽는 존재가 된다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물론 기후재앙으로 문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적이 발생한다면 말이다.

 

응석받이 어린아이처럼 항상, 당장, 갖고 싶어 안달하는 우리의 편협한 정신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해졌다. 수 세기 동안 탈탈 털린 끝에 생태계의 곳간이 비어가고 자원은 재생이 어려워 허덕거린다. 무엇보다도 이는 80억 명에 육박하는 인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체로 각자의 욕망만을 좇아온 결과다. 우리는 엄마의 젖을 너무 악착같이 빨다가 엄마의 손에 방 반대편까지 내동댕이쳐질 지경에 이른 것이다.

p.18 -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

 

이게 현실이다. 아니 이게 전부가 아니다. 몇 가지 내용을 더 추가해야 한다. 동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강대국의 대립이다. 환경오염과 대멸종의 징후와 기후재앙이다. 추가할 목록은 더 길다. 결론은 우리가 붕괴와 파멸을 앞둔 슬픈 존재라는 사실이다. 누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느냐는 질문은 하지 마라. 우리가 그랬으니까. 나와 당신이 바로 파괴의 실체니까. 리즈번가의 다섯 아이들 아니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든 건 우리니까. 다섯 자매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책 속에서 찾은 답을 읽은 후 우리 어른들이 어떤 세상을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넘겨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그 애들은 죽어가는 숲 때문에, 정원용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마시려고 수면에 올라왔다가 프로펠러에 사지가 잘려나간 바다소 때문에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피라미드보다 더 높이 쌓인 폐타이어를 보고 목숨을 끊었으며, 우리가 절대 될 수 없었던 그들의 연인을 찾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 결국, 리즈번 자매들을 갈가리 찢어 놓은 수많은 고통은 그들이 오랜 고민 끝에, 오점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어른들이 물려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단순한 사실을 암시했다. p.317 - 버진 수어사이드

 

 

덧붙이는 글

이 서평쓰던 중 여고생 세 명의 자살 기사가 속보로 올라왔다. 오늘(2025621일 토요일) 새벽 1시경 어린 세 생명은 아파트 옥상으로 올랐다. 그 아이들이 등진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우리 어른이 만든 이 세상은 얼마나 참혹한가.

 

사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p.226 - 버진 수어사이드

 

리즈번가와 이웃에 살던 그리스 출신 할머니가 막내 서실리아의 자살 이후 집안에 갇혀 아직은 겨우 살아있던 리즈번가 자매들을 향해 날린 말이다. 오늘 삶의 끈을 놓아버린 여린 생명에게 분명 사는 것이 시간 낭비였을 것이다.

 

 

버진 수어사이드/ 제프리 유제니디스 / 이화연 / 민음사 / 2024

자살에 대하여/ 사이먼 클리츨리 / 변진경 / 돌베개 / 2021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 로르 루알라 / 곽성혜 / 헤엄출판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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