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이대 일신 베스트북스 8
하근찬 지음 / 일신서적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른 아침부터 정거장대합실에서 이제나저제나 목이 빠지게 한 순간도 아들이 나올 출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기다리는 만도의 지나친 설렘이 오히려 불길한 예감이 들게 했다.지난 번 읍에서 돌아오는 길에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물에 빠졌던 일을 상기하는 것 또한 그렇다.

젖은 옷을 말리는 동안 팔 하나가 몽땅 잘려나간 자신의 흉한 몸뚱이를 보이지 않으려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일부러 물에 빠져 얼굴만 내 놓았던 그 시린 기억.그 서러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아들을 만나러 상기된 얼굴로 기다리는 외팔이 아버지 만도가 기차역 대합실에서 처음으로 아들 진수를 대면할 때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마냥 감격에 겨워 맞이할 수 없는 만도의 참담하고 처참한 심경은 이런 영화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자식을 향한 아픔으로 혼이 나가기 직전인 아비의 절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짧게 터져 나오는 한 마디 " 에라이 이놈아!" 는
학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만도의 한탄이자 비명이었다. 고등어를 쥔 손이 불끈 주먹이 쥐어졌다는 것은 어떤 말보다, 진수의 눈에서 흐르는 꾀죄죄한 눈물보다 더 진한 아버지의 참담함이 담겨있었다.어쩌면 다정다감하게, 혹은 겉으로나마 태연스럽게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담담히 맞아주지 못하고 이다지도 직설적인 실망감과 안타까움을 단 번에 내 뱉을 수 있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솔직한 만도의 모습에서 너무나 평범하고 큰 세력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 만도를 통해서 아버지를 느꼈다.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다리 한 쪽을 잃은 진수가 소변을 볼 때도 나무둥치를 안고서야 겨우 하는 모양을 보고 속으로 신음을 토해내는 만도의 실망과 속상함은 장면 내내 내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건강하고 젊은 아들이 한 순간에 지팡이를 끌고 다니면서 다리가 있어야 할 바지 한 가랑이가 잘려버린 다리처럼 무력하게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만도의 심경이 너무나 절절하게,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른 주막집에서 주인 여자에게 국수 한 그릇을 말아달라면서 곱빼기로 달라는 둥, 참기름도 쳐 달라는 둥, 평소와 다르게 이것저것 주문이 많아진 만도의 모습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찡한 울림이 있었다.



지금 뉴스거리로 오르내리는 부자세습이나 부정입학, 혹은 고위직 아버지를 둔 자녀의 특혜 등으로 많은 이들에게 소외감과 함께 박탈감을 가져다주는 그런 '부정'(父情)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자식사랑이라는 본능을 앞세워 힘을 가진 자가 옳지 못한 방법으로 제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쏟아부어주는 그런 것과는 다른, 오히려 정상인보다 못한 외팔이 아버지가 이제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술독에 넘치는 술을 따라내듯 가득한 정을 퍼주는 그런 사랑이었다.



힘 있는 아버지들이 아들에게 금력이나 권력으로 이룬 왕국을 물려주는 것이라면 만도와 같은 아버지들은 아들에게 한 그릇의 장터국수, 고등어 한 손,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편한 제 몸까지 내어준다는 사실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아버지란 사람들의 고된 숙명을 느낄 수 있었다.그 두려운 외나무다리 앞에 이른 만도가 홍해를 가른 모세의 지팡이대신 아들에게 노구의 등을 내미는 장면은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세상 최고의 사랑 그 자체였다. 망설이는 아들에게 등허리를 댄 채 외팔로 아들의 하나 뿐인 다리를 꼭 안는 그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참 많이도 아프게 다가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