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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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여사의 <동행>을 읽으며 잠시 책 내용에서 벗어나 역대 대통령부인 가운데 이희호여사 외에 누가 책을 썼는가, 아니 책을 읽기라도 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을 남편으로 둔 그이들은 소비의 만용, 더 나아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기에 혈안이 되어 퇴임 후에도 현직에 있을 때 못지않은 상당한 인기와 힘을 누리며 보장된 안락함을 자랑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동행>이란 책 제목은 제대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그 거목에 빌붙어 고난 끝에 마침내 영화를 누린 기생하는 삶이 아니라 이 땅의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다수의 의견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독재의 암흑 속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남편과 함께 한 몸이 되어 현재의 80 노구가 되기까지 끝까지 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 <동행>을 통해 우리나라의 50년대부터 2000년에 이르는 현대사를 어느 정도 균형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동행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전혀 동방의 작은 나라-한국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함께 가야할 필연적 운명의 아무런 역사적 부담도 없는 한 이방인이 이토록 곧은 소리를 절박하게 질러대고 있는 것을 보니 또 하나의 <동행>을 발견하게 되어 그 놀라움과 반가움이 남다르다. 이미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할만큼 성장한 덕분이라할까, 그의 객관적이며 중립적인 자세에 더 신뢰와 관심이 가는 것은 어찌 할 수 없는 매력이다!


  한참 옛날에 살다가 갔을 법한 촌스런 박노자라는 이름의 저자가 쓴 짤막하면서도 명확하며 구체적인 비판적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보수와 진보의 갈림길을 처음으로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우선은 속이 쓰려왔다. 지금 내가 느끼는 분노의 실체인 그 뿌리가 어디쯤에 있는 지 손에 잡힐 것 같은 묘한 예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건희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하는 것을 반대했다가 출교당한 고대생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특히나 아팠다. ‘그들과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그들에게 유학을 떠나 당분간 돌아오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도피가 최상의 방법일 수 없지만 차선의 선택일 순 있다. 이 사회가 신분고하를 넘어 모든 개인에게 자존심을 허용할 때까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 국적을 갖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 출신의 외국인 대학교수가 한국사회의 실체에 대해 이런 뼈아픈 진단을 내렸다니,더더구나 같은 한국인교수조차 나서서 이런 충고를 하는 이가 없건만 타문명권에서 온 박노자는 교수로서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은 있는 모양인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자신이 몸담았던 한국의 대학이 한국연구가 주 목적인 ‘상아탑’이 아니라 힘과 돈으로 뒤죽박죽이 된 탁한 ‘구정물통’이라는 것도 전혀 거리낌 없이 폭로한 것을 보면서 왜 대다수의 교수들이 수치심도 없이 일말의 정의감과 자신의 소신도 훌러덩 벗어버린 채 출교당한 자신의 제자를 비호하기는커녕 그저 이사장과 대기업 후원자들에게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는 호스티스로 전락했는가를 새삼 한심스러우면서도 피가 얼어 붇듯 온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사회엔 권위가 없다’ 역시 저자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대학원생들이 재학 중엔 교수에 대한 강요된 복종과 줄 서기에 마음에도 없는 충성심을 보내지만 졸업식 당일, 비로소 그 군림하는 자들에게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에 일순간 안면을 바꾸는 행태를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이와 같은 모습을 자주 접하는가! 일례로 강남의 중대형교회의 교구목사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즈음 성도들은 그들과 마주쳐도 인사조차 건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떠나는 목사와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유는 앞의 대학원생들과 거의 흡사하다.

 

목사들이 교회에 재직하고 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성도를 섬기고 존중했다면 대부분이 그래도 순한 양으로 구성된 성도들이 그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신학대학원에서 갓 나온 젊은 목사들은 자신들이 큰 교회에 뽑혀 온 엘리트라는 자부심과 함께 ‘나는 너희를 섬기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러 왔노라!’라는 그들의 스승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기에 성도들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성도들에게조차 아랫사람 대하 듯하며 인사를 받기 위해 교회 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대접받기 원했다면 애초부터 목사의 길에 들어서지 말았어야 하지 않을까! 유교와 달리 낮아짐을, 겸손을 가장 먼저 가르치는 기독교에서조차 이놈의 병든 ‘권위주의’는 망신살이 굵게 굵게 뻗혀있다.

 

주로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 쓴 이 글들은 겁이 날 정도로 거침이 없다! 두려움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시각으로 본 것에 대해 혹시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 내가 외국인이라서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라는 일체의 주저함이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입 밖으로 낼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자신감이 무모함으로 비춰질 정도이다. 그렇게 박노자의 붓은 양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롭고 정확하게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부패한 의식과 조직, 권력층의 횡포를 과감하게 베어내고 있다.

 


그 점이 사무치도록 부럽고 또 한편은 불편하게 다가왔다. 왜? 그의 글을 비록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병폐들에 대해 여기저기 쑤셔보고 찢어보고 껍질을 벗겨서 그 시뻘건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았지만 막상 나를 구속하며 불편하게 하던 우리 사회의 그 흉하게 병든 실체를 눈 앞에 대하니 예상과는 달리 전혀 속이 후련하다거나 맞아도 싸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괜히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의식수준에 머물러 있는 오천만 한국인과 수 많은 피를 흘리며 독재권력과 싸워 이루어 놓은 민주화의 성과가 고작 이 뿐이라는 생각에 불쌍타여겨지니 내가 내 속을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아도 나는 민주화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고작 내 맡은 일을 내 팽개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소시민이다.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에 무임승차한 기가 막히게 운이 좋으면서 한 편으론 염치없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은 나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작된 거짓의 역사 세우기에는 도저히 분을 삭일 수 없음은 웬일일까! 외국인조차도 한 발 물러나 나 몰라라하며 현재의 기득권층에 기대어 개인적 영달(榮達)을 좇는 대신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한국역사에 대해 그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고 이 나라의 역사적 실책에 대해 여과없이 정직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 때, 어쩌자고 부끄러운 과거의 과오를 권력을 동원해서 그럴듯한 속임수로 화려한 공적비를 세워 덮으려는가 이 말이다!

 

아픈 곳, 흉한 곳, 부러진 곳, 벌레먹은 잎사귀 한 장 없이 사시사철 푸른 잎으로 가득한 나무가 늘 그 자리에 서 있다면 그것이 진짜 살아서 성장하는 나무가 맞을까? 아니다! 그 나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이 만든 조화일 뿐이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그렇게 완벽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에 속았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남 보기 창피한 부러진 가지와 벌레 먹은 잎사귀가 있더라도 살아있는 진짜 역사를 원한다. 생명력이 있어 앞으로 더 키가 크고 뿌리가 깊어지고 가지가 뻗어가며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진짜 역사 말이다!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우겨서 미화시켜 놓으면 지금 당장은 보기 좋아도 그 자리는 곧 썩고 말 것이다. 새 한 마리 깃들지 않을 가짜 나무 만들기를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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