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을 샀어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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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들의 제목을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알맹이를 꼭꼭 싼 호두알처럼 선뜻 어떤 내용의 이야기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목에서 받은 밝고 청소년소설 같은 인상들과 달리 속 내용은 다 읽고 난 뒤에도 재떨이에서 남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꽁초처럼 난해한 작가의 심리를 속속들이 느끼고 공감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작가가 고민하고 추구하며 몸부림치면서 갈등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 확신있게 이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다만 내가 느끼고 내 안에 차오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로 '삶'이었다.

그것도 책에 실린 8편 중 대표작인 '풍선을 샀어'에서 가장 강하고 절박하게, 그러면서도 묘한 부웅 뜨는 비상(飛翔)의 심리를 느꼈다!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의 모든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니체

모든 정신의 위대함이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견뎌야만 하는 삶, 가꾸어야 하는 삶, 돌봐야하는 삶,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니체가 남긴 철학 중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J. 그것은 변화를 뜻하는 것일지도 몰라.'-화자

공황장애가 있는 27살의 전직 국가대표 핸드볼선수가 서른일곱의 싱글 올드 레이디이로 부모님과 결혼한 오빠가족과 동거하며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 외에 생계를 위해 백화점문화센터에서 철학강의를 하는, 십 년 동안 살던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제 막 한국으로 돌아온 화자와의 수업에 어머니대신 대타로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중년의 수다스런 인근 아파트의 주민인 아줌마들 속에 새파랗게 젊디 젊은 20대 남자가 끼여서 철학수업을 듣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터져나온다. 나 역시 100여 명의 남학생들 속에서 유일한 홍일점으로 교수의 유머에 목젖이 울리도록 걸걸거리는 웃음을 웃는 그들과 다른, 깔깔톤의 높은 소리로 그것도 길게 웃다가 그만 강의실에 남은 웃음의 파장이 퍼지는 통에 그 101명(교수포함)의 남자들을 얼마나 웃겼는 지 모른다.그렇듯이 공통점도 없는 여자들 속에 남자 혼자서 그 강의실을 찾아왔다는 것은 너무나 일상과는 동떨어진 출발이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은 결정되어 있었는 지도 모르지만 난 이 J라는 청년이 범상치 않게 느껴졌다. 이유는 소설을 이끌어가기 위한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 실존하는 인물, 이미 내가 만나보았던 그 녀석과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화자와 J의 두 번째 데이트이자 영화관데이트에서 많은 익명의 사람들 속에서 유독 안절부절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J를 보고서 비로서 그에게 '공황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경우는 내가 J의 나이였을 때 다섯 살 아래의 키가 크고 희고 깨끗한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는 그를 만났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1년간 휴학을 하고 나서 복학한 탓에 그나마 알고 지내던 녀석들이 모두 군입대를 하고 난 뒤라 속 마음을 털어 놓고 지낼 사람이 필요했었고  나 역시 여드름 투성이의 툭 하면 알아듣기 거북한 '뭐라카노' 식의 남도사투리가 쏟아져나오는 후배들 속에 그 아이처럼 세련된 마스크에 목소리까지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매력적인 후배와 친해지는 것은 하늘의 선물일 따름이었으니까!

그런데 두 서넛이서 같이 걷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여느 아이들과 같던 그가 스무 명이 조금 넘는 동아리모임에서는 얼굴이 급격히 피곤해지면서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했고 그나마 얼굴을 바로 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겨우 들곤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양 손을 꽉 쥐고 몸을 비틀면서 땀을 흘리던 그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일이 있고나서 그는 그 모임에 다시는 나오지 않았고 언제나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빠졌다.

처음에 그가 내게 했던,자신이 수줍음이 많다는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좀 지나치다 싶었다. 그 후로도 그는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딴 사람이 되곤 했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불면의 밤을 보내곤 했다.나로서는 책의 화자처럼 그를 위로하는데 능하지도 못했고 단지 그의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진지하고 가슴아프게 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고통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그 어린 나이게 그런 큰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 언제 이 싸움이 끝날 지 기약이 없다는 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공황장애는 실제로 위험상황이 아니고 아무런 해가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불안을 겪어 주관적인 발작을 되풀이하는 신경질환이다.

작가는 어째서 이 공황장애를 앓는 J를 등장시켜서 '삶=두려움' 이란 등식을 완성해버렸을까? 사실 공황장애를 앓는 것은 화자도 마찬가지였다. 화학자도 조율사도 되지 못한, 빈털터리에다 직장도 없고 드라마를 볼 때면 웃을 때도 아닌 데서 웃는다고 가족에게 등짝이나 얻어맞기 일쑤인 고독한 서른일곱의 싱글인 화자 역시 자신의 불안정성을 인식하고 극복하고 싶어 수천 개의 풍선을 불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몇 개의 풍선을 불었을까? 그리고 언제 처음으로 불어보았을까? 미래에 대한 꿈과 독선으로 가득찬 10대 후반까지는 별다른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좌절감을 맛 본 20대에 들어서 날마다 풍선을 불었던 것 같다. 무지개빛 미래대신 짙게 썬팅을 한 유리창으로 세상을 보는 마냥 앞이 급격하게 흐려졌을 때가 바로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역시 그 아이를 만났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숨이 헉헉 차오르도록 풍선을 불고 또 불고 해야지만  겨우 목숨을 연명할 수 있던 절정이었던 것 같다.

"후~우." 

 이제는 풍선을 불기 위해 숨을 강하고 길게 내쉬기 보다는 한 해가 다르게 부쩍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그 어깨의 짐을 떨어버리지 못한 채 허리가 굽어가는 그 모습에서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내면의 불기둥이 열기구의 기낭(氣囊>을 한 껏 무섭도록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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