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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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전기 - 신의 약속과 인간의 타락의 땅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와 큰 판형 그리고 두꺼운 표지의 양장으로 일단 그 모습부터가 부담 그 자체인 겉모습과 반드시 읽고 말리라! 는 도전 의식 사이에서 몇 일을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고민의 결과는 어이없게도 더 읽을 책이 없어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고민의 보람(?)도 없이 책장을 열수밖에 없게 되었다. 필자는 책을 지하철로 이동 중에 읽기 때문에 이 큰 책을 한 달 넘게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장서의 경우 가방에 넣고 다니면 몇 일이 안되어 표지의 네모서리가 뭉개지고 책 등의 위, 아래 날개가 파손된다.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뭉개지거나 가방 안에서 다른 이웃들과 뒤 엉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집이나 사무실 한 곳에 고정해 두고 읽는다면 필시 매일 읽는다고 해도 1년은 걸릴 것이고 읽다 지쳐 어느 순간 내 책장에 떡 버티고 나를 집착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들고 다닌 책은 할아버지가 되어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혔다.  아직은 생생한 겉 표지를 뒤집어 쓰고 아직 생생한 청년인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



청동기에서 21세기의 어느 아침까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예루살렘의 한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 관련된 국가들 이 기이한 도시 주변의 국제정세를 광범위하게 다른 지루한(?) 연대기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실존 도시와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역사서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예루살렘의 현재 이스라엘의 작은 도시 이면서 종교적으로는 3개의 종교가 신성시하는 도시이기도 하고 이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종교적 시선이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에 이 책의 애매한 장르일 수 밖에 없다.


이 도시는 유대교와 유대교에서 파생된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가 가장 중요시 하는 종말과 구원이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세속적 중요성과는 별개로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이다.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고 다른 종교(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기반의 국가의 번영을 저지하고 위해서 반드시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켜야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자신의 종교 권에서 수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영향을 확보해야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 신은 이 땅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을 한다. 우르(현재 이라크 주변으로 알려진) 지역에 살던 이 믿음의 조상(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공통의 조상)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끌어 이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집트로 이주하기 전의 이 선택 받은 가족들은 다양한 민족으로 분화가 되는데 아브라함의 아들 중 하나인 이스마엘은 후에 이슬람민족이라 불리게 되는 아람족의 선조가 되며 이삭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족들의 조상이 된다.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 교전을 했던 지방의 부족들은 블레셋 같은 페니키아 족들과는 달리 모세가 이끄는 유대민족과는 혈통적으로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지만 이미 종교적 성숙을 이룬 이집트 출신 유대민족들과 여러 신을 믿는 토착민들과는 공존을 할 수 없었다.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들어갔던 때만 해도 이들은 신앙은 체계적이지 않았고 그들 역시 이교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세련된 문화를 갖추 이집트에서의 400여년의 동안 그들 은 이집트의 체계화된 종교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를 체계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이미 팔레스타인의 옛 이웃들과는 공존할 수 없었다.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면서 몇 천년 걸친 아이러니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면서 남겨둔 토착민들의 종교와 문화는 평화시기에 유대국가의 타락(혼란, 여호와 하나를 믿고 율법적으로 매우 엄격했던 유대민족들 사이에 기복적이고 쾌락적인 토착민들의 종교가 쉽게 퍼지면서 그들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을 부추겼다. 한때 중동지역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솔로몬 시대) 유대 가 약해지고 이집트의 영향력도 약해지자 주변에 새로 생겨나는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주 유린하는데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가 그들이며 이집트 역시 유대민족의 구원자를 자처하면서도 약탈로 돌변하기도 했다.

역사시대로 넘어와서도 그들은 알렉산더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지배는 유대의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가장 굴욕적(유대인 입장에서는)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예수가 등장한다. 현재의 인류는 개인의 종교관과 상관없이 예수탄생과 죽음에 포괄적인 영향을 받을 만큼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다. 예수를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인이 로마 장군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과 그 전후의 박해를 피해를 아시아와 유럽을 흩어진 유대(디아스포라) 출신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곳에 소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써 그리스도교가 생성된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우리가 현재 보고 겪고 있는 세상의 분란은 크게 3가지 정도의 원인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민족, 종교 가 그것이다. 국가 영토의 확장에 기인한 이권분쟁, 민족간의 해묵은 싸움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분쟁이다. 종교분쟁은 크게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분쟁이 주류를 이루면 그 규모는 작지만 파급효과가 큰 것으로 유대교와 이슬람교간의 분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3종교는 그 기원을 하나에 두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세가 활동하던 시기를 공유하고 여호와라 부르는 신을 섬기며 이슬람은 알라라 불리는 신을 섬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점을 인정 하느냐 여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교는 예수를 선지자 중 하나로 보고 지금도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이슬람은 그 한참 후에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모하메트를 선지자로 발생한다.  이슬람도 그 믿음의 기원을 아브라함으로 보고 있고 유대교와 다르게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의 첫 아들(신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몸종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이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을 유대교에서는 이삭을 신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하는 곳 모리아산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성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크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지상의 성전보다는 다시 올 성전 즉 천상의 예루살렘과 예수의 승천 이후 각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자리잡은 성전(성령)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위협받게 되자 정치 목적의 성지회복이라는 명분론이 주장되면서 그리스도교 사이에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도시가 된다. 이런 분위기에 바로 자극 받아 일어난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뒤섞인 민족, 뒤엉킨 종교, 구분 없는 영과 속

서로마의 붕괴이후 예루살렘의 행정적인 지배는 투르크계가 주로 맡아왔다. 이들은 굳이 구분하자면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지만 혈통적으로 혼혈적이었고 소위 말하는 노예 왕조이면서 실용적인(세속적인) 것을 중시해서 왕조의 정통성과 종교적 색채도 약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일어난 성지순례 붐은 예루살렘과 주변에는 유럽혈통의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후에도 항구도시 자파는 오랫동안 유럽의 원거리 식민지로 남아있었고 자파를 통해 유럽과 러시아(‘로마노프 왕조는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원했고 정부주도의 이민과 성지순례를 지원했다.) 순례자들과 이민자(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이 유입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중부 아프리카인과 동유럽의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예루살렘에는 아르메니아 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예루살렘은 한때는 유대인 도시였고 잠시 유럽의 도시였고 그리고 오랫동안 이슬람의 도시였지만 어느 때이고 각 종교나 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지는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에는 로만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유대교회당, 이슬람사원이 존재해 왔으며 그 안에서는 그들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신에 대한 경배가 늘 있어왔다.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각자에게 가해진 박해나 호해는 달랐지만 어느 시기도 명분 따위는 없었다. 매우 세속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 갔다. 각 사원(교회)들은 정세에 따라 그리스도 교회가 되었다가 모스크로 바뀌기도 했고 심지어 칸을 나누어 각기 다르게 신을 섬기기도 한다. 성전(교회) 안에서는 가지각색의 예배와 찬양을 하며 신비스럽고 위험한 의식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사제나 신도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신 보다는 주먹과 돈이 먼저였다.

 

예수가 성전 문 앞에서 대속재물을 팔던 장사치들을 좆았던 옛날부터 예루살렘은 순례자들이나 명절 시기에 몰려둔 방문객들을 상대로 장사가 번창했다. 이전 투구에는 관리, 성직자 할 것 없이 달려들었고 타 종교도 간의 잦은 싸움들도 세속의 이전투구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지각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성지의 모집은 역겨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들에게는 이세상이 끝나고 찾아갈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고 사는 동안 지은 셀 수 없는 죄를 용서받고 다른 누구보다 먼저 부활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가난한 농부나 게르만 왕이나 죽음 앞에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필요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낳고 그것은 더욱 과장이 되어 더 많은 욕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다.

 

 

21세기 예루살렘

결국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웠다. 현재 예루살렘은 동서를 나누어져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도 예루살렘에는 민족 별로 거주 구역이 확실했다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가거나 통행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는 타 종교, 타 민족간의 묵인 하에 공존(그것이 지극히 세속적이라고 해도…)이 존재했다. 21세기 어느 아침 예루살렘의 동과 서는 두꺼운 벽과 철책으로 분리되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공격을 막자는 의도이지만 이 벽은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나가버린 잘못된 것의 상징물 같다.

 

한편 예루살렘의 다른 한 쪽에서는 천년 넘게 이어진 어색하지 않은 어색한 일들이 지속된다. 이른 새벽부터 그리스정교회, 로만 카톨릭 그리고 이슬람의 예배가 이루어지고 같은 교회의 다른 방에서는 콥트교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방법과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 몇 십대를 세습(맘루크 왕조 때부터)한 교회 관리인은 전통(?)을 이어 각 종파의 예배시간에 맞추어 교회 문을 연다.

현대의 예루살렘은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방문객들이 더 많다. 이 거룩한(?) 도시의 정체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인간의 나약함과 역겨움으로 읽어 나가기 힘들다 생각하게 하지만 쓰레기 더미 사이를 헤집어 돌아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따스한 물에 샤위를 하고 안정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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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회성 - 세상과 잘 어울리고 어디서나 환영받는 아이로 키우는 양육법
이영애 지음 / 지식채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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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사회성


요즘 집단 따돌림이나 학내 폭력문제 등으로 우리 아이들의 인성과 사회상에 대한 관심이 크다. 그러나 정작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할지에 대해서는 보통의 부모들은 그 방법조차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시중에는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책들이 꽤 나왔는데 부모라면 최소한으로 알아야 할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한 두 권을 선택적으로 읽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이를 양육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에 앞선 부모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책에는 아이들의 발전단계별 특징, 그 때 그 때의 올바른 양육 법, 문제 사례의 해결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지식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이 것을 지식 이상의 것으로 발전시킨다는 노력이 없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의 문제는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앞으로 점점 더 난해한 형태로 부모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문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특질과 아이가 겪는 문제에 대해 최소한의 인지를 하려면 아이들의 발달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요즘 부모들은 배울 것이 침 많다. 과거 자신들의 부모들은 직업과 관련하여 않은 것은 굳이 시간을 내어 공부하지 않아도 최소한 해결 능력을 익힐 수 있었다. 그들의 부모세대나 지역 사회 등을 통해 부족한 부분은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육아지식 역시 역시 삶의 범위 안에서 자연스럽게 터득이 되었고 아이들도 지역사회의 공동의 지혜 안에서 자라났다. 

요즘 부모들은 그 들의 부모세대에 비해 더 열심히 배우고 더 열심히 살았지만 아이들 문제에서는 크게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도 예전에 비해 발육상태가 좋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에 비해 육아 환경은 더욱 좋아졌지만 부모나 아이들은 더욱 좋아졌다는 환경에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최고로 키우겠다며 좋다는 것은 다해주려고 하여 아이는 풍요 속에서 자란다. 반대로 다른 한편에서는 부모의 능력이 안되어 최소한의 양육은 고사하고 끼니도 못 먹는 아이들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나라에서 이런 극과 극이 존재한다. 이 것 역시 현대의 역설적인 부분이다. 예전에 오랫동안 육아는 사회공동체 부모의 몫이었다. 아이들의 자라서 이전 세대를 봉양하고 공동체를 계속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육아문제는 당연히 사회 공동체의 문제였다.  현대의 개인 소외문제도 육아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 내에 육아문제가 발생해도 공동체의 지식과 지혜는 각 부모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 결국 아이의 문제는 그 부모와 아이의 개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런 경향에 아이들에게 준 가장 나쁜 것은 아이들의 경쟁 시스템에 몰아 넣은 것이다. 부모들은 학교에서의 성적뿐 아니라 아이의 예절 문제에까지 남들보다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의 상황이나 특성을 생각하지 않고 획일화된 틀에 넣으려고 한다. 이런 부모의 태도는 사실 부모 자신의 경제적 상황과 정서적 문제에 기인하는데 공동체 사회에서는 설사 부모에게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해도 공동체의 영향으로 적절한 수준으로 평준화 하려는 경향이 있어 극으로 치닫는 문제가 매우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편향성을 보정해줄 방법이 없다.




부모가 능력이 되어 최선의 양육을 한다고 해도 결코 아이들에게 적절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부모마다 부정확한 정보(현대의 문제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개인은 이에 대한 가치평가를 내릴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나 근거(도덕성의 문제)없는 판단에 근거한 양육방법은 과잉이나 부족의 문제-주로 물질과 지식의 과잉과 애정의 결핍의 문제-를 일으킨다.  가치관과 인성이 형성되는 시기에 겪게 되는 이런 과잉과 부족의 문제는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상상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각 시기에 맞는 적절한 방법과 적정 수준의 양육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 기반에는 자녀에 대한 무한의 관심과 도덕적성에 근거한 가치 판단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 책이 아이들의 정서적 문제와 부모의 육아 문제에 대해 완벽한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너무나 무지한 부모들에게는 내 아이의 이상(?)해 보이는 행동들이 부모들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아이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고 부모에게 도와 달라고 내미는 손짓 일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울 수 있다면 독자가 된 부모들과 아이들에게는 다소나마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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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미카엘 엔데 지음, 홍문 옮김, 정우희 그림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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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는 1973년에 발표된 독일의 동화작가 미하엘 엔데의 작품이다모모라는 이름은 실제로 책을 읽은 독자층에 비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이름이다필자도 모모를 올해 처음 읽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설에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또 국민학교 시절 들었던 동명의 가요 ‘모모’을 통해 이름을 오래 기억하게 했을 것이다.

필자는 미하엘 엔데의 1987년 작품 '끝없는 이야기'를 먼저 접했다동명의 TV 시리즈가 MBC를 통해 방영이 되었기 때문이다이 작품 역시 모모처럼 인간의 행복은 현대의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끝없는 이야기가 미하엘 엔데의 작품이라는 것은 사실 동명의 TV시리즈를 보면서 우연히 알게 되었다



모모의 존재
모모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이 도시에 살게 되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전지적 작가 시점(작가의 에필로그에서 자기도 이 이야기를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어떤 사나이에게 들었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의 화자 역시도 어느 날 모모가 원형 극장에서 발견되고 나서부터 모모의 존재를 알게된다.

모모는 원형극장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고아로 보이고 옷차림이 허름하고 버려진 원형극장의 틈새에서 살지만 모모에게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말이 많은 사람은 모모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 없는 사람은 그냥 말없이 함께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었다모모와 함께 놀면 아이들은 비싼 장난감이 없어도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면서 즐겁게 놀 수 있었다.



회색사나이
언젠가부터 도시에는 시간저축은행의 영업사원이라고 소개하는 회색사나이들이 나타난다모자에서 구두까지 모두 회색으로 입고 얼굴빛 마저 창백하여 회색 빛이다입에는 늘 회색 담배를 물고 있고 차가운 기운과 말 솜씨로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이상한 힘을 가진 이들이다이들은 시간저축은행의 개인계좌를 판매하고 있다이 계좌는 통장은 물론이고 계좌 개발에는 사인도 필요 없다구두계약과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아끼기만 하면 자동으로 은행계좌에 시간이 저축이 되어나중에 이자까지 붙여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자기개발업무효율부의 축적

시간은행의 저축계좌를 개설한 후 사람들은 항상 바쁘다밥 먹는 시간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일을 하는 바람에 돈은 더 벌고 사회적 지위도 향상이 되었다그런데 자는 시간도 줄여서 일을 하는 바람에 일 이외의 다른 것은 다 무시하게 된다심지어 아이들과 함께 놀 시간이 없어진다동화가 아닌 우리의 현실에서도 양쪽 부모 모두가 일을 하느라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지면서 아이들은 놀이방어린이 집이라는 곳에서 양육된다탁아소라 불리던 곳이다. ‘아이들은 맡긴다는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의 상황과 동화가 들어 맞는다
아이들은 탁아소에서 꿈을 꾸기 보다는 현실에서 보다 쉽게 생존(?)하는 법을 배운다
.

회색 사나이들의 등장과 그 이후 사람들의 생활은 딱 우리세대의 모습이다모든 사람들의 중심이 일에 맞추어져 있다하루 10~12시간을 일과 또 일과 관련한 일들(/퇴근 출근을 위한 각종 준비 등등…)을 하며 그나마도 시간이 부족하여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여가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그렇게 제하고 나면 집에 와도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은 정말 터무니 없이 적어진다가정을 돌보지 않아도 되는 미혼의 싱글들도 그나마도 적은 여유시간을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를 푼다며 비효율적인 것들을 통해 남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저축은행의 영업방식
인생을 80년으로 산정했을 때자는 시간밥 먹는 시간잡답하는 시간…..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을 계산하다 보면 돈을 버는 시간 이외에는 다 버리는 시간이 되어버린다잠을 자는 시간은 영과 육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시간인데도 줄여야 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고 가족과 대화를 하는 시간은 쓸데없는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회색 사나이들이 인생을 초단위로 계산하면서 사람들에 심어준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초초해 하면 시간을 아껴서 돈을 버는 일에 사용하고자 한다인생의 모든 목표가 성공으로 고정되고 삶의 모든 요소들은 그것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며 시간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절약하는 착각 속에 낭비(?)된다시간저축은행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부추겨 사람들의 시간을 자신들의 금고에 예치시킨다

그런데 이 동화의 중반까지 읽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렇게 저축한 시간은 어떻게 운영하여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주인에게 돌려줄까회색사나이들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그들에게서는 사람을 마비시킬 만큼의 냉기가 흐르는데 이런 분위기로 봐서는 그들은 결코 정상적인 인간이거나 도덕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는다또 그들의 주장처럼 이자를 붙여서 받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게 한다그렇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저축은행의 영업방식은 사기이다구체적인 저축방식저축한 시간의 관리와 운영방침도 없다계약서나 통장도 주지 않는다그리고 언제 만기가 도래하는지 등의 정확한 설명이 없다말로는 철저한 신용으로 영업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기인 것이다



시들기 때문에 아름다운 꽃
인간은 죽음으로 이세상과 작별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의 모든 순간순간이 소중한 것이다유한하기 때문에 악착같이 아껴 써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위해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 때문으로 인해 인간성이 발현되었고 인간의 문명이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만일 인간이 은하철도999의 기계인간처럼 자연의 시간의 제한을 이겨내고 원하다면 언제까지라도 살 수 있는 존재였다면 세상은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예술작품에서 그려지는 불사신들의 기구한 삶이나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한 사람들의 기괴한 삶들은 단지 작품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이런 인위적(?)인 왜곡은 결국 우리에게 정립된 인간성의 표본을 무너뜨릴 것이고 그것은 인간성도덕성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에 상상한 우려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이미 그 전조를 보고 있다.
.
유한한 인간의 자기 위안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언제가 시들기에 꽃이 아름다운 것이다동화에서도 모모는 이 연약하고 아름다운 꽃을 본다.(더 알려주면 스포일러가 되므로 여기까지만… 꽃이 왜 등장하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 바란다
.)


그렇다면 회색 사나이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동화의 처음 등장하는 회색사나이들의 모습과 느낌만으로도 이들이 우리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좀비처럼 죽은 이들 가운데 깨어난(아주 비정상적인 방법과 목적으로…것들일 수도 있고 비물질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 존재의 특징을 떠나서 이들은 인간들이 절약(?)하여 저축(?)한 시간이 그들의 존재를 유지해주는 것 같다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나타났는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이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인간과 관계 있고 결국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할 것이다.

모모는 이들과 반대되는 존재일 것이고 그 역할을 위해 갑자기 이 도시에 나타난 것일 것이다
.
그리고 모모가 회색사나이들 보다 강한 이유는 모모가 그들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친구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내려 놓을 줄 아는 것바로 사랑을 가졌기 때문이다반대로 회색사나이들이 그렇게 서슬이 퍼렇게 협박하였고 수적으로도 비교가 안될 만큼 많았지만 순식간에 

괴멸한 이유 그것은 그들은 서로를 경쟁자로만 보았지 한 배를 탄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생각이 무지 많은 필자는 모모의 책장을 덮고 나서 머리 속을 또 하나의 책을 썼다가 지웠다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신의 영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이미 그 영역을 넘보고 있고 또 일부는 이루었다고 말한다그러나 그 일부는 착각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또 일부는 아마도 언젠가 비슷한 결론이 날 것이다동화에서 모모가 만난 시간을 관리하는 박사(그는 인간이 아니다.)도 시간을 만드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한다그렇다면 인간이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모더니즘 시대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현대 인류는 인간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 노력한다.열심히 하기만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너무나 열심을 내어 부적절한 방법까지 동원한다그렇게 해서 일부의 비밀은 알아내고 일부의 성취를 이루었다 말한다하지만 그런 일들의 결과로 망가지는 것들이 있다는 것은 외면하려고 한다그것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혹시 원래부터 이렇게 되도록 생겨먹었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바꾸려 하는 노력은 소용없는 짓일 것이다그런데 그런 노력으로 내 마음이 기쁘다면 기쁘다면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행복하다면 지금까지의 그것이 뭔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거나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 하는 방향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나의 시선과 걸음을 늘 바르게 조정해야 할 것이다

이미 늦은 시간이나 이미 버려진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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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장애는 왜 두 번 일어났을까? - 미즈호은행, 동일본 쓰나미 그 후 시스템 장애에서 얻은 교훈
[닛케이 컴퓨터] 편집부 지음, 이영희 옮김 / 한빛미디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시스템 장애는 왜 두 번 일어났을까?- 미즈호은행,  동일본 쓰나미 그 후 시스템 장애에서 얻은 교훈 



필자는 IT 분야에서 16년간 일한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그래서 IT의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기사 등에 매우 관심이 많다한빛미디어는 IT분야 전문서적을 출간하는데 종종 메뉴얼 중심에서 벗어나 정보경영이나 인문학적 관점에서 씌어진 책들을 소개한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도 이런 책 중에 하나이다필자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종류의 서적이다.


미즈호은행의 장애에 대한 기사들을 정리하여 출간한 이 책은 사실 IT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보다 IT 분야를 활용하는 다른 분야에 사람들이 읽어봐야 할 책이다특히 IT가 중심이 되어있는 기업이나 조직의 우두머리이면서IT에 대해 섣부르게 알고 있는 경영자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부류들은 이런 책을 접할 기회도 적고 실상 읽어도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IT는 흔히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된다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어떤 하드웨어나 소프트에어를 쓸 것 인가 하는 이야기는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미즈호은행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기술적인 문제보다는 IT에 대한 인식부족이 근본 원인이었다미즈호은행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IT 프로젝트에서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고민을 하다 정작 중요한 부분이 정책전략 등의 방향성을 못 잡는 경우가 많다목적지 없이 출발한 배는 바다 위에서 표류하게 된다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표류하지 않으려면 미즈호은행이 했던 실수들을 따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가 지구 규모에서 인류가 처한 위험 중에 하나이다.



 

필자는 먼저 IT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부터 이야기할까 한다새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드웨어소프트웨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IT를 어렵게 느낀다.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IT 없이는 세속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IT를 잘 모르거나 어려워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이용하는 상황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IT가 추구하는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잘 구현된 IT는 사용자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 할 정도로 자연스러워야 한다.  사용자들은 잘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이유도 막연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IT에 대해 잘아야 하는 사람들은 정보시스템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구현하며 유지하는 이들이면 족하다.

IT관련 일을 하는 이들이 IT에 대해 잘 알고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별다를 것 없는 당연한 이야기라서 이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하지만 IT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른다고 하면 어떨까당연히 IT시스템 즉 정보시스템의 구동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문명(크게는 교통시스템방송 그리고 작게는 신용카드 같은 것 들까지…)이 대부분 IT시스템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제작하고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들이 관리하는 시스템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있다면 이건 걱정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몰라도 할 수 있는 IT 프로젝트?


몰라도 할 수 있는 IT 프로젝트가 있을까잘 모르면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일단 문제가 있다하지만 현실에는 잘 알지 못해도 어떤 일에 참여하거나 진행을 승인하는 경우가 많고 IT 프로젝트도 예외는 아니다특히 실무자가 아닌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잘 모르면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요즘 IT 프로젝트는 그 규모나 파급효과가 크다특히 국가기간 산업(전력교통통신)등과 금융 쪽에서 운용하는 IT 시스템은 그 규모나 파급효과의 규모가 국가 차원에 이르기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는 것의 위험성은 엄청나다더 큰 문제는 요즘에는 그 규모가 어찌 되었던 간에 그들 조직밖에 대해 서비스를 하는 시스템의 경우는 거의가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일반인들에게 24시간 365일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불특정 다수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다거기다가 그들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면 퍼트리는 경향이 있다작은 실수가 일파만파 커져서 조직전체에게 책임을 묻은 규모로 확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요즘의 IT 시스템은 조직기업의 위상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개발자 또는 개발조직의 책임과 문제로 대충 덮어버릴 수 없게 된다작은 문제가 반드시 전체의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대응방법에 따라 단순한 오탈자 문제 하나로도 전국민이 아는 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


경영자나 임원들이 나 몰라라 하면서 개발조직에 책임을 전가할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특히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경영전략부서간의 이견에 의해 발생된 사건이라면 실무자들이 아무리 머리 터지게 싸워봐야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런 문제에서 조직의 목표를 설명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모두가 나아가도록 조율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경영진의 책임이다

경영자가 회의 자리를 빛내기만 하고 회사 통장의 잔고만 확인하는 시대는 이지 지나갔다.



지금은 20세기가 아니라 21세기이다.



 

필자도 최근 몇 년간 몇 건의 홈페이지 개발 프로젝트의 사업관리나 PM으로 참여했는데 이 경우는 고객사의 의뢰를 받아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위의 주장에 따르면 고객 사가 자신들의 만들고자 하는 홈페이지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 하겠다그런데 많은 경우 외주개발사에 일임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정리해야 하는 요구사항도 외주업체에서 만들어 주길 원한다그 들의 요구내용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면 당신들이 전문가들이니까 대충 이야기해도 잘 알아듣고 다른 유사 사이트의 경우와 잘 조합하여 최고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달라~’ 이런 식이다물론 홈페이지를 외주 주고 나면 고객사 담당자는 그냥 외주업체가 만들어 놓은 것을 검토하는 일만 하면 되니까 남는 시간에 다른 일 하라고 하는데 이 역시도 몰이해와 책임감 결여에서 온다고 본다.

외주 업체가 잘 수행해서 적기와 원하는 결과물을 얻으면 좋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100이면 100, 제때에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다결국에 가서는 자신들이 운영할 홈페이지에 대한 책임감으로 외주 업체와 함께 고생을 해야 한다.



내부의 문제를 외부로 전가시킨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문제에 관여된 사람의 수가 늘어 더 복잡해진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IT시스템이 조직의 중요한 경영유지수단이라면 최고경영자도 반드시 이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자신에게 정확한 조언을 할 전문직 임원을 보유해야 한다반드시 조직의 경영층이 책임을 질 각오로 수행하지 않은 IT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관리의 엄격한 기준에서 보면 모두 실패할 것이다.

 

 



시스템의 오류는 개발자의 능력이나 인간적인 실수에 의한 것인가?


현업에서 만나는 개발자들 중에는 특이한 성격이나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화면 가득 코드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또 프로그램 개발자들의 업무 특성상 한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임자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실무에서 개발자들과 프로젝트를 운영하다 보면 개발작업의 일정은 늘 미지수이고 예상일정보다 늘 초과된다또 어제 수정한 부분이 다른 작업 중에 알 수 없는 오류를 낸다개발자의 수행 능력은 개인별 편차가 있긴 하지만 개발작업이라는 것 자체의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각 경우의 수를 조합하여 논리적인 모듈을 만든 것이라 복잡한 입력과 절차를 가진 업무에 대한 작업에서는 그 경우수가 수백에서 수천 개에 이른다.또 이 책에서 주장하듯이 대형 금융 시스템의 프로그램 코드는 1억행 정도 되는데 이런 규모의 코드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100%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다만 일정한 단위로 모듈화한 후 각 모듈과 모듈간의 관계로 구분 처리하여 한 번에 처리한 규모를 줄여서 개발이나 관리 시 오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아직 권위주의 시대의 영향이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프로젝트의 계획 자체가 상사나 좀더 권력을 가진 조직에서 정해서 실제 구현하는 조직에게 통보되는 식이라 사실상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촉박한 시간에 실무자들에게 전달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업무파악프로세서 설계모듈과 라이브러리화형상관리개발자간의 크로스 체크통합테스트스트레스 테스트는 고사하고 단순히 코딩을 하기에는 벅찬 상황이 된다이런 상황에서 완벽한 프로젝트 수행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보통 이런 구조적인 문제들을 실무자의 체력(?)과 정신력(?) 막아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확히 잡아주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만 해줘도 위험성은 대폭 사라진다.

 




현실과 미래 


90년대 우리나라도 10년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풍요 속에 대규모 IT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IT강국으로 만든다는 정부의 정책에도 힘을 얹어서 다양한 규모의 IT업체들이 할거(?)했다많은 젊은이들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컴퓨터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학원등록 창구에 줄을 섰다

2012
년 지금, 90년대에 그렇게 IT분야에 말을 들였던 기업과 젊은이들의 반수 이상은 이 분야에서 사라졌다.업계에서는 함께 일할 만한 인력을 찾기 어렵다일단 이 분야는 대기업 일반 사무직에 비해 월급이 매우 낮고 일은 고되다 못해 죽을 것 같고관련 회사들도 불안정하다는 인식으로 일을 가르쳐 볼만한 신입인력이 없다.

경제의 거품이 꺼져 버려 길고 긴 길을 갈 것이다대 기업들도 쉽게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지 않는다시스템은 노후화되고 기본 구조파악과 개선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붙인 기능들은 언젠가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줄 것이다더 무서운 것은 구축 이후 변경된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문서화도 없고 담당자들도 수시로 변경이 되고 있어 어느 누구도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그냥 잘 돌아가길 바랄 뿐이라고 해야 하나?

소위 시스템의 블랙박스화’ 문제이다. 5, 10년 단위로 시스템을 교체해야 한다그러나 앞으로 경영상의 위험 문제로 시스템 노후화는 늘어갈 것이다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IT시스템이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라면 경영진의 결단이 필요하다당장에 시스템 교체까지 계획하지 않더라도 운영과 리스크에 대한 관리체계 구축과 지속적인 점검도 경영진의 의지에 달려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외양간 고친 수고만 아깝지 않을까?

 


뭐라고소는 다시 사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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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 - 당신의 행동을 지배하는 뇌의 두 얼굴
V.S. 라마찬드란 지음, 박방주 옮김 / 알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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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체적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또 다른 생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비물질적인 특징들을 가지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 이런 특징들은 다른 생물과는 확연히 다르게 크게 발달한 뇌에서 기인한다고 한다인류의 먼 조상이며 인류와 기능적으로 가장 유사한 특징을 가진 유인원과 비교해 보아도 그 차이는 극명하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기원했다고 한다면 그 진화과정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이런 이유로 진화이론에 대해 비판적인 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 

보고듣고만지고맛보고냄새를 맡는 오감과 이들 감각을 두 가지 이상 복합적으로 인지하며 심지어 오감이 전혀 작용하지 않아도 어떤 것(물질적이던 비물질적이던 간에)을 상상하고 예측할 수 있다과거의 경험을 기억하고 남의 행동을 모방기억(학습)하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능력들을 지닌 인간은 가히 신이 스스로를 모델로 만들어낸 존재라 주장하는 학자들의 말이 적절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능력을 지닌 인간의 뇌도 종종 오 동작을 일으킨다.  잘 동작하던 기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지하거나 프로그램 된 것과 다른 동작을 하는 것처럼 보통사람이 수행하는 것과는 다른 패턴의 동작이나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또 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인식하여 모든 생활의 기반이 되는 자아를 인지 못하여(자페증반 사회적인 상태가 되기도 한다.

축구공 크기도 안되고 연 두부마냥 작고 약한 뇌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본서는 인간이 학습자아와 예술의 인지하는 과정에 대해 뇌신경학적으로 분석하여 종국에는 모든 인류의 끝없는 질문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는 선언(?)으로 마감한다.

 


일단 뇌에 대한 연구나 자료들 자체가 워낙 어려운 분야이다 보니 400여 페이지의 두께가 무척 부담이 된다필자도 이 책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는 자신만만한 상태까지는 아니어도 ,읽으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그 동안 읽은 책 중에는 500 페이지가 넘는 책들도 꽤 되었고논어’ 나 미의 탄생같은 어려운 책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솔직히 말하자면 논어는 읽긴 했지만 내용이 정리가 안되었다… ㅋㅋㅋ

첫 장부터 나온 뇌 구조도와 뇌 조직의 설명에서 기가 죽어버렸다이제 두 달(중간에 이 책보다 약간 쉬운 책을 하나 병행해서 읽었다.)이나 걸리긴 했지만 나름 정리가 되었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과학적 논지는 본서에서 가장 맘에 들고 유용한 부분이다인간의 학습과 자아 형성이 거울신경이라 불리는 아주 작은 조직의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은 아주 신선했다.

 

본서는 대략 아래의 5가지 주제에 대한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뇌신경을 연구하는 학자이면서 신경증이라 불리는 정신적 장애(책을 읽고 나면 이런 명칭이 적절한지도 생각하게 된다.)을 치유하는 임상의사이다환자의 치료 방법을 모색하면서 얹은 결과를 통해 인간의 진화와 인간성이라는 인문학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이전 단락에서 언급한 5가지 주제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한다필자는 당연히(?) 뇌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의학 전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극히 보통 사람이라 책에 포함된 자세하고 중요한 것들의 대부분은 흘려버리거나 놓쳤을 것이다하지만 이것 만은 핵심이다라고 판단한 것들을 나열해 볼까 한다.

 




신체지도


인간이 자신의 몸을 제어할 때 시각후각청각미각촉각 등의 오감을 통해 입력한 정보를 바탕으로 근육을 제어하여 소기의 동작을 완성한다또 동작 수행 중에도 수시로 상황을 파악하여 움직임을 수정한다이 과정 역시 굉장히 경이롭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눈이나 코 등의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을 정확히 만지는 동작이다

눈을 감고 자신의 코를 정확히 만지거나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를 의사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것 등은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한다고 볼 수 없는 것들이다너무나 정확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사지 중 일부를 절단한 환자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증상 중에 이미 절단한 환부예를 들면 교통사고로 뼈가 완전히 부서져서 절단한 왼팔이 수술 후에도 계속 아픈 경우가 있다통증이 통감신경을 통해 전달이 된 것이라면 사고를 당한 팔이 아니라 절단 부위 끝이 아프거나 아니면 통증이 아예 없어야 한다그러나 이미 사라진 팔에서 오는 통증은 외과적 치료가 끝난 후에도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이것은 뇌 안의 각 조직들과 신경들간을 연결하는 섬유다발의 연결 고리와 자신의 신체지도와 관련이 있다뇌에는 자신의 신체와 조직들에 대한 방대한 지도가 그려져 있어서 자신의 신체에 나타나는 상황은 외부를 바라보는 감각기관(오감)아닌 신체지도와 신경섬유로 오는 신호를 비교하여 판단하게 된다이 지도는 각 기관에 배치된 신경조직으로부터의 새로운 신호를 받아 점진적으로 업데이트가 된다그런데 갑작스런 사고에 의해 이 절차에 오류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이미 없어진 기관에서 통증이 전달된다고 오판을 하는 것이다.

 

이 증상은 온전한 팔을 거울에 비춰진 만들어진 가상의 쌍둥이 팔을 조작하면서 그 크기를 점점 작게 조절하는 교정치료를 통해 완화된다고 한다뇌에서 손실된 조직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신속히 최신 정보로 갱신하도록 돕는 교정 방법이다.

 


거울신경

대부분의 고등생물은 타인(특히 부모)의 동작을 따라 하면서 생존방법을 습득한다그런데 인류는 이것을 좀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다나의 행동을 타인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이것을 객관화(분리-객체화)하여 전달하는 보다 효과적인 학습 방법을 찾아내게 된다거울신경은 타인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거나(직접 해보거나 상상을 하거나내가 하는 행동을 타인의 시선에서 관찰하는 역할을 한다즉 두 가지 각도에 관찰하고 내 행동을 타인의 시선에 볼 수 있으며 타인이 이해하도록 나와 분리하여 데이터로 객체화 할 수 있다.

 

거울신경을 통해 인류는 문화와 지식의 전승이라는 생물학적으로 아주 새로운 도구를 지니게 된다이 도구를 획득한 초기 인류는 사냥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매번 실제 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알타미르의 벽화는 잘 알려진 대로 들소 사냥을 그린 것인데 실제 사냥에 앞서 이 그림으로 들소의 생김새 특징 그리고 사냥방법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울신경의 좀 더 특이한 점은 이 조직이 나를 객관화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자아라는 개념이 생기게 된다필자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내가 누구인가라는 생각즉 자아에 대한 고민은 그렇지 않아도 이미 고도화되어 있던 인간의 뇌를 에 폭발적인 진화를 가져온다.

 


미학과 예술

먼저 미학과 예술 그 차이의 이해가 필요하다단언하자면 미학은 기술적인 부분이고 예술은 감성적인 부분이다미학은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벌과 나비도 미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그 반응방법이나 반응의 결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배제하면 이런 명제는 적절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벌과 나비에게 꿀의 달콤함=배부름=즐거움 또는 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적절한 역할 수행=만족감 이 인간이 예술품을 볼 때 느끼는 환희슬픔 같은 감정과 신경학적으로 흡사하다고 말한다면 꿀과 나비가 화려한 꽃을 찾는 것은 그들의 미학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좀 더 복잡하지만 그 근간은 꿀과 나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인간의 미학은 나무 덤불 속에 숨은 포식자를 찾아내기 위한 기능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인간의 기저에 깔린 예술품에 대한 미학 즉 예술에 대한 판단은 바로 즐거움(안정)이다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보다는 그것이 위험한 상황(예술품에서는 친근하지 않은 상황이나 사조로 인한 혼란)이라도 확실한 상황이 더 좋은 것이다내가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은 오히려 즐거운 것이 된다.(현대의 레포츠의 대부분이 가벼운 위험 상황을 이겨 나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롭지 않은 자아?

자아란 무엇인지 정의하려는 시도는 많았다철학자들은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고차원적인 질문이 일환으로 자아를 연구해왔다근대에 와서는 심리학자들도 이 연구에 가세하게 되는데 자아’ 즉 나 자신인 나이라는 식의 실존주의가 팽배하면서 자아는 누구와도 대체가 안 되는 하나의 개체로 인지 되어 왔다그러나 현대에 뇌에 대한 연구가 발전하면 인간 사고의 본질과 그 방법에 대한 연구의 결과 인간의 사고는 뇌라는 그룹 안에 많은 조직과 신경다발의 복잡한 연계에 의해 생성이 되며 자아 역시 많은 뇌조직과 신경조직에서 생성 된 조합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여기서 잠깐뜬금 없는 생각 하나.

우리의 자아는 남의 시선에 의해 태어나고 외롭게 혼자 성장하는 것도 아닌데 점점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끝날 것 같지 않은 궁극의 질문

저자는 오랜 뇌신경 연구를 통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과정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씩 찾아내고 있다하지만 뇌 과학의 특성상 그것들은 아직은 밖으로 보여지는 결과에 부합되는 가설들이 대부분이다언젠가 뇌를 좀 더 정확히 진단할 방법이 생기게 될 것이고 우리는 좀 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이 이런 기술적인 발전은 우리에게 우리가 알 수 없고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크기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기회를 더 자주 만들것이다어쩌면 알아가면 갈수록 더욱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악순환이 될 수도 있다한편 이런 발전으로 인간은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천사인가원숭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의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진화에 대해 썼던 찰스 다원은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이 지식과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연구결과에 대해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인 과학자의 겸손으로 볼지 창조자의 손길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지는 또 다른 논쟁거리이니 여기서 글을 접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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