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루살렘 전기 - 신의 약속과 인간의 타락의 땅


9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두께와 큰 판형 그리고 두꺼운 표지의 양장으로 일단 그 모습부터가 부담 그 자체인 겉모습과 반드시 읽고 말리라! 는 도전 의식 사이에서 몇 일을 고민하게 만든 책이다. 고민의 결과는 어이없게도 더 읽을 책이 없어서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고민의 보람(?)도 없이 책장을 열수밖에 없게 되었다. 필자는 책을 지하철로 이동 중에 읽기 때문에 이 큰 책을 한 달 넘게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장서의 경우 가방에 넣고 다니면 몇 일이 안되어 표지의 네모서리가 뭉개지고 책 등의 위, 아래 날개가 파손된다.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뭉개지거나 가방 안에서 다른 이웃들과 뒤 엉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집이나 사무실 한 곳에 고정해 두고 읽는다면 필시 매일 읽는다고 해도 1년은 걸릴 것이고 읽다 지쳐 어느 순간 내 책장에 떡 버티고 나를 집착의 화신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들고 다닌 책은 할아버지가 되어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혔다.  아직은 생생한 겉 표지를 뒤집어 쓰고 아직 생생한 청년인 것처럼 천연덕스럽다
.



청동기에서 21세기의 어느 아침까지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예루살렘의 한 도시와 관련된 사람들, 관련된 국가들 이 기이한 도시 주변의 국제정세를 광범위하게 다른 지루한(?) 연대기이다. 예루살렘이라는 실존 도시와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을 역사서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예루살렘의 현재 이스라엘의 작은 도시 이면서 종교적으로는 3개의 종교가 신성시하는 도시이기도 하고 이 도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종교적 시선이 분명히 필요하기 때문에 이 책의 애매한 장르일 수 밖에 없다.


이 도시는 유대교와 유대교에서 파생된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가 가장 중요시 하는 종말과 구원이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에 세속적 중요성과는 별개로 반드시 차지해야 할 곳이다.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고 다른 종교(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기반의 국가의 번영을 저지하고 위해서 반드시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켜야 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자신의 종교 권에서 수장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영향을 확보해야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

성경에 따르면 아주 오래 전 신은 이 땅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을 한다. 우르(현재 이라크 주변으로 알려진) 지역에 살던 이 믿음의 조상(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공통의 조상)을 팔레스타인으로 이끌어 이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집트로 이주하기 전의 이 선택 받은 가족들은 다양한 민족으로 분화가 되는데 아브라함의 아들 중 하나인 이스마엘은 후에 이슬람민족이라 불리게 되는 아람족의 선조가 되며 이삭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민족들의 조상이 된다.

야곱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돌아왔을 때 처음 교전을 했던 지방의 부족들은 블레셋 같은 페니키아 족들과는 달리 모세가 이끄는 유대민족과는 혈통적으로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었지만 이미 종교적 성숙을 이룬 이집트 출신 유대민족들과 여러 신을 믿는 토착민들과는 공존을 할 수 없었다.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들어갔던 때만 해도 이들은 신앙은 체계적이지 않았고 그들 역시 이교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 지역에서 가장 세련된 문화를 갖추 이집트에서의 400여년의 동안 그들 은 이집트의 체계화된 종교를 경험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종교를 체계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이들은 이미 팔레스타인의 옛 이웃들과는 공존할 수 없었다.

유대민족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오면서 몇 천년 걸친 아이러니의 역사가 시작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면서 남겨둔 토착민들의 종교와 문화는 평화시기에 유대국가의 타락(혼란, 여호와 하나를 믿고 율법적으로 매우 엄격했던 유대민족들 사이에 기복적이고 쾌락적인 토착민들의 종교가 쉽게 퍼지면서 그들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을 부추겼다. 한때 중동지역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솔로몬 시대) 유대 가 약해지고 이집트의 영향력도 약해지자 주변에 새로 생겨나는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자주 유린하는데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가 그들이며 이집트 역시 유대민족의 구원자를 자처하면서도 약탈로 돌변하기도 했다.

역사시대로 넘어와서도 그들은 알렉산더제국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의 지배는 유대의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가장 굴욕적(유대인 입장에서는)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예수가 등장한다. 현재의 인류는 개인의 종교관과 상관없이 예수탄생과 죽음에 포괄적인 영향을 받을 만큼 이 사건은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다. 예수를 따르던 초기 그리스도인이 로마 장군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과 그 전후의 박해를 피해를 아시아와 유럽을 흩어진 유대(디아스포라) 출신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곳에 소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써 그리스도교가 생성된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우리가 현재 보고 겪고 있는 세상의 분란은 크게 3가지 정도의 원인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 민족, 종교 가 그것이다. 국가 영토의 확장에 기인한 이권분쟁, 민족간의 해묵은 싸움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종교분쟁이다. 종교분쟁은 크게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분쟁이 주류를 이루면 그 규모는 작지만 파급효과가 큰 것으로 유대교와 이슬람교간의 분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3종교는 그 기원을 하나에 두고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세가 활동하던 시기를 공유하고 여호와라 부르는 신을 섬기며 이슬람은 알라라 불리는 신을 섬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점을 인정 하느냐 여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유대교는 예수를 선지자 중 하나로 보고 지금도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린다. 이슬람은 그 한참 후에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모하메트를 선지자로 발생한다.  이슬람도 그 믿음의 기원을 아브라함으로 보고 있고 유대교와 다르게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의 첫 아들(신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몸종에게서 얻은) 이스마엘이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교에서는 이스마엘을 유대교에서는 이삭을 신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하는 곳 모리아산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그래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성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크지 않았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지상의 성전보다는 다시 올 성전 즉 천상의 예루살렘과 예수의 승천 이후 각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자리잡은 성전(성령)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이슬람에 위협받게 되자 정치 목적의 성지회복이라는 명분론이 주장되면서 그리스도교 사이에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도시가 된다. 이런 분위기에 바로 자극 받아 일어난 사건이 십자군 전쟁이다.

 

뒤섞인 민족, 뒤엉킨 종교, 구분 없는 영과 속

서로마의 붕괴이후 예루살렘의 행정적인 지배는 투르크계가 주로 맡아왔다. 이들은 굳이 구분하자면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이었지만 혈통적으로 혼혈적이었고 소위 말하는 노예 왕조이면서 실용적인(세속적인) 것을 중시해서 왕조의 정통성과 종교적 색채도 약했다.  십자군 전쟁 이후 일어난 성지순례 붐은 예루살렘과 주변에는 유럽혈통의 그리스도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후에도 항구도시 자파는 오랫동안 유럽의 원거리 식민지로 남아있었고 자파를 통해 유럽과 러시아(‘로마노프 왕조는 동로마 제국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원했고 정부주도의 이민과 성지순례를 지원했다.) 순례자들과 이민자(주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이 유입되었다. 맘루크 왕조는 중부 아프리카인과 동유럽의 아르메니아 그리스도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하면서 현재까지 예루살렘에는 아르메니아 인들이 많이 거주한다.

예루살렘은 한때는 유대인 도시였고 잠시 유럽의 도시였고 그리고 오랫동안 이슬람의 도시였지만 어느 때이고 각 종교나 민족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지는 못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에는 로만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유대교회당, 이슬람사원이 존재해 왔으며 그 안에서는 그들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신에 대한 경배가 늘 있어왔다. 그때 그때의 사정에 따라 각자에게 가해진 박해나 호해는 달랐지만 어느 시기도 명분 따위는 없었다. 매우 세속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 갔다. 각 사원(교회)들은 정세에 따라 그리스도 교회가 되었다가 모스크로 바뀌기도 했고 심지어 칸을 나누어 각기 다르게 신을 섬기기도 한다. 성전(교회) 안에서는 가지각색의 예배와 찬양을 하며 신비스럽고 위험한 의식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사제나 신도들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신 보다는 주먹과 돈이 먼저였다.

 

예수가 성전 문 앞에서 대속재물을 팔던 장사치들을 좆았던 옛날부터 예루살렘은 순례자들이나 명절 시기에 몰려둔 방문객들을 상대로 장사가 번창했다. 이전 투구에는 관리, 성직자 할 것 없이 달려들었고 타 종교도 간의 잦은 싸움들도 세속의 이전투구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지각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성지의 모집은 역겨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들에게는 이세상이 끝나고 찾아갈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있었고 사는 동안 지은 셀 수 없는 죄를 용서받고 다른 누구보다 먼저 부활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의 가난한 농부나 게르만 왕이나 죽음 앞에서는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필요가 예루살렘에 대한 환상을 낳고 그것은 더욱 과장이 되어 더 많은 욕심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든다.

 

 

21세기 예루살렘

결국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웠다. 현재 예루살렘은 동서를 나누어져 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도 예루살렘에는 민족 별로 거주 구역이 확실했다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가거나 통행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는 타 종교, 타 민족간의 묵인 하에 공존(그것이 지극히 세속적이라고 해도…)이 존재했다. 21세기 어느 아침 예루살렘의 동과 서는 두꺼운 벽과 철책으로 분리되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유대인 정착촌에 대한 공격을 막자는 의도이지만 이 벽은 돌이킬 수 없이 너무 나가버린 잘못된 것의 상징물 같다.

 

한편 예루살렘의 다른 한 쪽에서는 천년 넘게 이어진 어색하지 않은 어색한 일들이 지속된다. 이른 새벽부터 그리스정교회, 로만 카톨릭 그리고 이슬람의 예배가 이루어지고 같은 교회의 다른 방에서는 콥트교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른 방법과 언어로 예배를 드린다. 몇 십대를 세습(맘루크 왕조 때부터)한 교회 관리인은 전통(?)을 이어 각 종파의 예배시간에 맞추어 교회 문을 연다.

현대의 예루살렘은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방문객들이 더 많다. 이 거룩한(?) 도시의 정체성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인간의 나약함과 역겨움으로 읽어 나가기 힘들다 생각하게 하지만 쓰레기 더미 사이를 헤집어 돌아 다니다가 집에 돌아와 따스한 물에 샤위를 하고 안정을 찾은 듯한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