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
존 버니언 지음, 김창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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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천로역정으로 번역이 된 존 버니언의 이 역작은 성경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읽혀진 책이다. 그 명성답게 이 책은 현재는 성경보다 더 안 읽히는 책이 된 것 같다. 어린시절 잠깐 이 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 불혹의 나이에 드디어 읽게 되었다.

 


존 버니언의 원래 직업은 땜장이였고 공식적으로는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만을 마쳤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과 예수에 대한 믿음은 그로 하여금 예상치 못한 인생역정을 가게 한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기간 동안 의회군으로 참전하고 설교의 자유을 위해 투옥도 마다하지 않는다. 천로역정의 1부에 해당하는 크리스천의 이야기는 감옥에서 씌어졌다. 석방이 된 이후 설교가로 활동하던 그는 오랜 기간 후에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나의 장성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집필한다.








변변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책이 귀하던 시절에 존 바니언이 장편의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 능력이겠지만 세상적으로 보면 그가 출석하던 베드포드 셔주  엘스토우 교회의 목사의 도움이 컸다.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와하던 그는 어느날 길거리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하는 어떤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엘스토우 교회를 알게된다. 그녀들이 인생을 즐겁게 사는 원인 중에 그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와 그를 통해 자신들안에 임한 성령의 도움심이 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크리스천을 천성으로 향하는 순례길로 인도하고 크리스천이 지치고 쓰러질 때 나타나 그의 영성에 힘을 주는 전도자라 불리는 캐릭터는 이 목사라고 알려져 있다.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는 붉은 팻말을 들고 큰 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교리가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필자는 논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지만 이 문구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그들의 외침은 마치 예수만 믿으면 천국가는 것처럼 들리곤 하는데 정말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가? 그들을 이단이라고 말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도 그들의 자극적인 선전문구처럼 예수 믿고 천국가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이 두 부류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들에게는 '예수 안믿는 니들은 지옥간다.' 로 들릴 뿐이다.


다시 원래 길로 돌아가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선동구호의 자극성 때문에 간과되곤 하는 것중에 하나가 신앙은 길고긴 여행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이라면 인간이 철저히 죄덩어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기에 예수의 십자가 필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천국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옮은 명제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행위를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행위로 치환하거나 예수를 믿은 이후 신앙을 가진이가 어떤 삶의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무시할 가능성에 주의를 해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변하지 않은 구원을 얻는다는 이론(?) 이미 중세초기에 논란의 되었었다. 소위 펠라기우스 파라고 불리는 신학자들과 그 주장을 따르는 종교지도자 그리고 신자들이 존재했다. 이 주장은 당시에 주류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지금도 이런 주장은 유효해서 지난 역사를 통해 종종 표면에 등장했다. 최근에 구원파도 이런 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의 주장을 하는 소위 '알메니언 주의'는 이단시 되고 있지는 않지만 종종 극단으로 치달으면 본질을 벗어날 공산이 큰 주장이다.







천로역정은 신자가 예수를 믿은 후 하늘나라로 불리울 때까지의 인생 여정에서 어떤 일을 겪게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의 천성으로 가는 크리스천과 그의 가족 그리고 믿음의 동료들과의 여정을 통해 설명을 하는 책이다. 

예수를 알게되면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다'고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실상 이 여정을 시작하면 번뇌가 찾아온다. 성경을 제대로 읽고 나면 언젠가 결국에는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아직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에게 이것은 굉장히 두려운 것이다. 책을 읽고 자신이 사는 죄악의 도시가 곧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안 크리스천의 어찌할 바를 몰라 두려움이 떨었던 것처럼 말이다. 전도자가 그에게 알려준 방법은 좁은 문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천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심판을 면하고 생을 구하는 길은 그것뿐이다.


좁은문, 즉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인정하고 따르는 일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말하고 먹고 마시던 세상의 즐거움들이 갑자기 역겹고 두렵고 무서운 죄의 조성물이요 죄의 결과로 보인다. 그런 것들이 함께 하는 지인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나를 배척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것을 이겨내는 것만으로도 큰일이지만 좁은문으로 들어가고 나면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마음과 머리로 완전히 이해되고 공감되고 그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 되어야 책을 읽고 난 후에 등뒤에 붙은 무거운 짐을 벗게된다. 교회에서 쓰는 말로는 바울이 이야기한 성화의 과정중에 하나이다. 세상을 살면서 짓게되는 죄 세상과 가족과의 관계로 인해 지워진 무거운 짐이 더 이상 무겁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 지은 모든 (원죄를 포함하여)와 그로인한 무거운 짐은 벗었지만 성도는 천성으로 가는 긴 여정중에 사악한 세력의 유혹과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성경에서는 게으름을 죄와 동일시 한다. 이 부분은 필자의 다른 글에 설명이 있다.)으로 인해 천성으로 가는 하나의 좁은 길을 벗어나 넓은 샛길로 빠진다. 그 길은 악한 세력의 소굴이거나 심지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성경을 수십번 읽었다고 해도 일십조를 열심히 낸다고 해도 세상에 봉사를 하고 불우한 이웃을 위해 내 돈과 시간을 쏟는다고 해도 인간은 시시때때로 크던 작던 사잇길로 빠져서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후회하고 번민하기를 반복한다. 특히나 믿는 이들은 자신이 습관처럼 짓는 죄로 인해 벗었던 짐을 다시 지고 나락으로 빠지기도 한다. 세상 사람이 나쁜 행위로 죄를 짓는다면 믿는 이들은 죄를 짓는 행위에 그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는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더니 이건 안 믿었을 때 보나 더욱 지옥이다. 맞다. 성령이 내안에 들어와 강력한 양심으로 작동을 하면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진다. 주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까지 했는지, 왜 그러시는지를 마음과 머리로 정확히 알지 못하면 가슴을 찌르는 죄책감 때문에 예수를 믿고도 '불신지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래도 '예수천국'을 글자 그대로 이해할 것인가? 글자 그대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고난' 인것이다. 

 

믿는 이들의 인생은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탄탄대로 세상 천국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준비된 천국에 들어갈 만큼 비워질 때까지 탈탈 털어내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었다고 모두 고난을 받거나 가난하거나 소외되어 사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방법과 능력이 주어졌다. 부자로 살았다고 지옥으로 가거나 가난하게 살았다고 천국을 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삶을 세상의 기준으로 재어보고 그것이 축복을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천의 아내 크리스티나와 아들들 그리고 믿음의 동료들의 순례길을 다룬 2편에서는 용감무쌍이라는 전사가 그들을 호위하고 거기에 천성 가까이에서는 강한믿음이라는 강인한 노인까지 동행을 한다. 1편에서 크리스천이 죽을 고비를 넘겨가면 지나간 길을 너무나 가볍게 지나는 듯 해서 마치 하나님이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도와주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데 1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크리스천에게는 보다 강도 높은 믿음이 필요했고 크리스티나에게는 강한 신뢰가 필요했다.


필자는 2편의 후반부에 용감무쌍이 강한믿음에게 들려주는 전전긍긍의 이야기를 하고 천로역정에 대한 글을 끝내려고 한다. 생각의 꼬리를 물기 시작하니 한도 끝도 없이 이어져서 여기서 잘라야겠다.


전전긍긍은 크리스천이 살았던 멸망의 도시 인근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할 존재가 아닐까 너무나 두려워서 좁은 문 앞에서 몇일을 앉아서 안에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몇 일을 먹지도 못하고 비와 추워 그리고 밤마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야생동물의 울음 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두려워 하면서도 문을 못 두드렸다. 겨우 주먹을 문에 대고 두드렸을 때 안에서 문을 열어주어 좁은 문으로 들어왔다. 그의 이런 상황은 여정 중에도 전혀 개선이 보이지 않아. 밤의 계곡을 통과하는데 다른 순례자 보다 몇 배나 더 오래 걸리고 중간 중간 휴식처에서도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문을 두드리지 못해서 오랜 동안 문앞에서 서있었다. 도저히 여정을 못 마칠 듯 해보였지만 그는 천성을 향해 내딘 걸음을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부분의 순례자가 넘어지고 고꾸라져서 너무나 힘들어하는 적지 않은 순례자가 오르지 못해 포기하는 가파른 언덕과 비탈을 너무나 쉽게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만나게 되는 천성문 앞을 흐르는 깊은 죽음의 강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천 같은이 순례 여정 중에 엄청나게 강해진 이들도 두려움에 머뭇거리고 허우적 거리던 죽음을 강 앞에서 울며 자기가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 하던 그가 강물에 발을 담그자 강이 순식간에 말라 발목 높이로 줄어들었고 전전긍긍은 죽음의 강을 걸어서 건너 천성문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왜 이 못난 순례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질문을 하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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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 2015-04-07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ㅇㄹㄴ
 
디퍼런트 - 넘버원을 넘어 온리원으로
문영미 지음, 박세연 옮김 / 살림Biz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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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웹과 이벤트 기획을 꽤 오래해서 소위 말하는 벤치마킹이라 불리는 작업을 수백 번은 한 것 같다. 벤치마킹(Benchmarking) 후에는 이 작업의 목표 방향을 경쟁으로 갈지 차별화로 갈지는 정한다. 이 단계에서는 반드시 고객의 결정이 필요한데 실제로는 벤더(Vendor)가 정해서 통보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대부분의 고객은 결과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 그 결과물의 방향성을 고민할 여력이 없다. 그 방향성은 벤더가 문서화해서 설득시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작업의 ROI에도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보니 차별화로 방향을 잡아서 진행을 하다보면 경쟁사 또는 특정대상의 장점을 도입해 달라는 요구가 모든 단계에서 수시로 치고 들어온다. 아무리 차별화 전략을 잘 세우고 괜찮은 아이디어를 적용해도 현재 가늠하기 쉽지 않은 차별화의 성과보다는 당장에 가시적인 겉모양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보니 작업이 기업의 매출 증대등의 성과와 연결은 고사하고 작업 자체가 비효율적으로 진행이 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흠짓 놀랐다. 몇 차례의 죽을 듯 했던 프로젝트 후에 차별화고 경쟁전략이고 간에 빨리 쉽게 끝내자는 생각으로 차 있었던 나를 발견했다. 결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작업관련자들에게는 최선이다.

우리가 차별화를 그렇게 외쳤던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잔인한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쟁은 필수다.' 그것을 '피하려 하는 것은 직무유기다.' 라고 외치고 싶은 이가 있다면 '당신은 아직 하수이다'라 조용히 알려주겠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선이며 당장 눈앞의 경쟁에서 지더라도 그것이 좋은 경험이니 경쟁은 피할 것이 아니라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말이 아니고 오히려 멋진 말처럼 보인다. 짝짝짝

만일 모든 경쟁자들이 같은 트랙(Track)위에서 뭉쳐 달리면서 옷이나 머리채를 잡아 당길 정도로 치열하고 치졸하게 달리다가 누군가 조금 먼저 결승선에 들어왔다고 하자. 그러면 그 경기의 순위에 따른 영광이 과연 자랑스러울까? 그 경기결과의 순위는 경기의 내용이 부적절하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된다. 경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쉽(Sports Manship)으로 완주하는 것이지 상대를 밟고 올라서는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산업이 이런 형국이다. 기업은 매출액 경쟁에서 1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이익을 내며 소비자의 만족을 얻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기업들도 이게 좋다하면 그쪽으로 몰리고 누가 조금 색다른 서비스를 시도해서 재미를 보았다하면 너도 나도 벤치해서 따라한다.








그래서 제품들은 지금 차별화성을 잊어버렸다.

판매량의 총액이 높은 제품일수록 제품간의 변별력은 더 떨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생수이다. 나름 모두 청정지역에서 퍼올렸다고 하는데 이건 어떤 제품이나 하는 이야기여서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의 어느 백작의 피부병이 낳았다고 해서 상품화된 에비앙도 피지섬에서 퍼올렸다는 FIJI도 소비자들에게는 제품명이 다른 정도의 구별만 되는 수준이다. 그나마 탄산이 들어간 제품들이 조금 차별력이 있지만 이 역시도 수원을 내세울 수 밖에 없어서 제품 자체의 변별력에도 불구하고 마케팅 차원에서 다른 제품들 사이에 묻히고 만다.



필자의 관심이 많은 차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탈리아의 람보르기니나 독일의 포르쉐는 아무나 가질 수 있던 차가 아니다. 이들 수퍼카들은 가격도 가격(2~5억 정도선)이지만 구입을 한다고 해도 아무나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성능이다. 제품의 개성이 너무나 또렷하고 그 높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오히려 충분히 홍보가 되는 브랜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포르쉐가 SUV(카이엔 : Cayenne) 만들고 세단(파나메라 : Panamera)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911같과 비슷한 차이면서도 운전하기 수월한 차들이다. 가격은 여전히 1억이 넘지만 수요는 911보다는 월등히 많다. 그리고 람보르기니도 SUV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반세기 이상을 줄곳 한가지 세그먼트(Segment)에 매진하던 브랜드들이 일반적으로 잘 팔리는 세그먼트에 진입하는 이유는 한가지이다. 매출증대를 위해서이다. 보통 좁은 폭의 제품군을 가진 브랜드 특히 자동차 제조사들은 100% 고난과 역경을 통과한다. 그래서 망하거나 매각되는데 살아남더라도 새로운 주주들은 여지없이 매출 증대를 요구한다.

얼마 전에 필자는 미니쿠퍼가 5도어 모델을 출시한 것으로 두고 그 동안 미니가 스스로 만들어온 '미니어처(miniature)카'라는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라 말했다. 미니는 미국시장에 진입하면서 대형 SUV가 인기를 구가하던 곳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차를 들여 놓으면서도 당당했다. 그러나 최근 미니쿠퍼 5도어를 출시하면서 왠지 치열한 따라하기 경쟁에 뛰어들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세기 지구는 인류 역사상 유래가 없는 풍요의 시대를 살았다. 이 시기에는 '만들기만 하면 팔린다'는 말에 진실성이 느껴질 정도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이루어졌다. 그 이전 시대에 수요는 많고 생산이 적어서 늘 부족하던 시기를 살았던 인류는 쏟아져 나오는 풍요에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그런데 이 시기에도 경쟁사보다 더 많이 팔기 위한 노력들 우리가 마케팅(Marketing)이라 부르는 것이 생겨났다. 그리고 풍요의 온풍이 사라지려는 시기가 되자 수요자를 찾는 시장의 경쟁은 치열해졌다. 마케팅 활동은 기업의 커다란 임무 중에 하나가 되고 이를 대신해주는 시장까지 생성되었다. 그러나 소비 환경은 굉장히 살벌해졌다. 특히나 몇 번의 금융위기 후 지구상의 소비자들의 대다수는 무척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아주 적은 로열고객만이 살아 남아있다. 실용적인 소비자들은 마케팅 활동에 반응을 하긴 하지만 쉽게 구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더욱 속이 타는 상황인데 이때 대부분의 기업의 반응은 마케팅 활동에 더 열을 올리고 기업간의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이제 기업들은 하나를 팔아도 제품의 원가나 영업이익 이상의 가치를 지닌 제품을 만들어야 하고 제품의 가치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워지고 있다. 매분기를 넘어서 주 단위로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들은 기업들이 얼마나 숨이 찰지를 예상하게 한다. 경쟁사간의 베끼기의 결과로 본질적으로 차별성이 없는 제품들에 대해 소비자들은 작은 변화 하나로 언제든지 다른 경쟁사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이를 아는 마케터들은 더욱 피가 마른다.




IKEA라는 북유럽의 DIY(Do It Yourself :  니가 짜 맞춰라!) 원목가구 회사가 최근에 국내에 자사 매장을 차렸다. 이 브랜드의 입점에 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보이고 관련업계는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했다. 왜 그랬을까? 유명한 회사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것도 모자라 꽤 난감한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불친절한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는 질좋은 원목을 사용하고 가구 디자인도 꽤 담백하다. 북유럽하면 가지게 되는 선입견인 내구성, 실용성, 환경성 등등 제품 자체의 품질은 최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구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고객들은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구가 놓일 곳까지 방문하여 치수를 재고 상황에 맞게 제품을 조정해주고 완제품을 배달해서 위치에 딱 설치해주고  청소까지 해주는 우리나라 어떤 브랜드와는 전혀 딴판이다. 매장에서는 구매자가 조언을 구하지 않는 한 구매자을 내버려(?)둔다. 대형 가구를 구매했다면 대형 SUV를 가져가야 하고 가구 조립에 '조'자도 모르는 여성고객이라고 해도 조립을 도와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안다는 아줌마들에 그 남편들까지 이케어의 입성에 관심이 많았다. 
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어떤 브랜드가 제품 이상의 가치를 부여 받고 그 가치에 따른 기회 비용을 지불하면서라도 소유하고 싶어하는 즉, 제품이 아닌 그 가치를 구매하는 충성고객을 확보하려면 차별화가 방법이다. 그것도 쉬지 말고 꾸준히... 경쟁자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짓이다. 때로는 미친 짓이다. 내부의 누군가는 한번에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보짓을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고 주주들의 압력은 거셀 것이다.




다음 분기 영업 이익의 유혹은 달콤해 보인다. 당장의 매출과 상관없는 매니아들의 움직임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애플을 생각해보자. 애플이 천년 만년 갈것 같지는 않지만. 애플. 말그대로의 본보기가 안닌가?

우리는 그동안 코카콜라나 나이키의 광고가 최고라고 알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반세기를 넘는 시간 동안 대부분의 기업이 희망을 이야기하며 코카콜라를 따랐다. 코카콜라류라고 일컫어지는 광고들은 모두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광고대로 우리의 삶은 그저 행복하기만 하고 소비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나? 현실은 보다 복잡하고 어렵다. 광고와 마케팅 활동의 목적은 '물건을 많이 팔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광고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광고를 만드는 이들 조차도 그 광고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불행을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그의 제자들과의 연구과정을 소개하며 그 광고들이 거짓말이라고 애둘러 이야기한다. 우리가 잡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물건을 팔자는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이 제품이 어떤 변화를 줄까?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물건을 사용할까에 대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이 원하는 기능이라도 목적을 위해서는 과감하게 뺴버렸다. 애플의 사용자들이 화면을 키워 달라고 그렇게 요청해도 그립(Grip) 효율을 위해 4인치대를 고집했다. 그리고 그는 마케팅 무용론을 이야기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과정 중에서 마케터들이 자신들이 홍보하는 제품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홍보하는 제품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 말한다. 이래서는 정말 소비자 입장에서의 소구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시장의 흐름이라는 것은 소비자 개개인의 의견이 모아진 결과라기 보다는 각 기업간의 경쟁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렇게 가정해보면 제조사가 업계의 흐름을 벤치마킹한다는 것이 정말로 발전된 제품을 만드는 할동일까?라는 의구심이 들게한다. 우리가 요즘 소위 뜬다는 기업이나 제품들을 보면 이상한 것들을 종종 발견한다. 이케아, 이전의 미니, 욕쟁이 할머니 등등... 하하하 이것을 생각하느라 이 긴 글을 쓴 것 같다. 욕먹으로 간건지 밥먹으로 간것인지...?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집의 음식은 할머니의 욕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가? 아니다 할머니가 욕쟁이 일뿐이지 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기 때문이다. 욕은 그냥 덤으로 주는 인간미인 것이다.





2014년 6월 19일 추가 내용 - 아래

이 책이 2011년에 출판된 것이다 보니 예로 든 일부 브랜드의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이케아의 경우를 예로 들면 현재 이케아는 목재가구 이외에 식기, 소품 등의 사업에도 뛰어 들었다. 이건 소위 테이블웨어(Tableware)라서 세그먼트내의 사업확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대고객 서비스도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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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피드 - 위대한 성공의 시작, 바보 같은 생각의 힘
리치 노튼 & 나탈리 노튼 지음, 조성숙 옮김 / 미디어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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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러분이 어떤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있어서 믿을 만한 사람들에 대해 그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상상을 해보자. 그 좋은 아이디어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미를 가지며 경청을 할 것이며 아이디어에 대해 서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사업을 하기 위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라고 말하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들의 과반수는 ‘그러지 말라’하며 말릴 것이다. 반대를 안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조언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바보짓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구상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짜두었다고 해도 사업적으로 성공할 확률은 50:50. 즉 북불복(福不福)이기 때문이다.

사업이라는 것은 내가 제 아무리 양화(良貨)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시장의 상황에 따라 악화(惡貨)가 되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50%의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당장의 안정을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계산으로도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계산식에는 중요한 한가지를 늘 빼는 경향이 있다.


바로~ 행복(幸福)이다. 이 바보 같은 짓을 판단하는 기준에는 밥벌이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10~20년(요즘에는15년 넘기도 힘들다고 한다.)이란 긴 기간 동안 억지로 해야 하는 불행한 현실은 늘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이 계산식의 한 변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수식은 어그러져 답을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은 일의 량은 내가 그것을 끝내기까지 남은 시간에 비례한다.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 제 2법칙 중에서-글 마지막의 주) 참고) 


사람들은 그 시대 또는 한 세대 이전 세대가 가장 보편적인 삶이라고 생각한 것을 따라 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집단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그것이 비록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대세를 따르는 불합리(不合理)를 가지고 있다.


베이비 부머(Baby Boomer),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의 60대 초 중반으로 60~70년대 전후 안정 되어가던 시대에 태어나 경제적으로 급성장했던 80년대와 90년대 초 중반에 사회의 중추를 이루었던 우리의 아버지, 큰 형님 뻘되는 분들은 무르익은 경제적 풍요 속에 열심히 일하고 그 만큼 부를 축적했다. 그 이전 세대들 보다 근무환경은 좋았고 소득은 훨씬 좋았다. 소위 여가를 즐길 만한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은퇴를 하는 지금 그들은 배신을 당했다. 열심히 일하고 풍요롭게 살았다가 생각했는데 돈은 집이나 자식들의 교육비(심지어 결혼자금까지...)에 모두 사용하고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존경도 받지 못한다. 심지어 스스로 자신의 지난 삶이 후회스럽다고 하는 경우도 주목할 만큼 증가했다.

 

 


60~70년대를 살아갔던 전쟁 직후 세대들은 상대적인 소득은 낮았고 인생을 즐길 여유는 없었지만 적어도 50세나 55세까지 열심히 일하면 자신의 집과 아이들의 대학 학비 그리고 노후에 쓸 수 있는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의 양육, 교육, 결혼 등에 큰 부담이 없었던 터라 노후에 사용할 자금은 자연스럽게 모였고 은퇴 후 사회에 진출한 아이들 2~3명이 십시일반 모아주는 용돈으로 노후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여가생활이나 소비에 대한 큰 기대 역시 없었기 때문에 소박한 삶에 만족만 한다면 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고 키우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열심히 주어진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0년 배우고 30년 일해서 30년을 먹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회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미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녀의 양육 부담은 커지고 취업의 기회는 좁으며 그마저 오래 다니기도 힘들다. 그저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기만 한다고 해도 자기 집은 고사하고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 마련도 빠듯하다. 물론 어떤 삶을 사느냐는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보통의 삶과 거리를 둘 수는 있지만 보통사람에게는 팔자 좋은 이들의 잘난 체 일뿐이다. 그렇게 맞는 노후 30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갈망하는 돈과도 그리고 은퇴 후 ‘꼭 하리’ 라던 많은 희망사항들과도 멀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정년퇴직(丁年退職)은 고사하고 중년을 시작하면서 1/3이 50세가 되기 전에 1/2이 자의던 타의던 안정적(?)인 일자리를 떠나야 하는 사회에서 돈도 희망도 가족과의 관계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직장인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스튜피드

작가
리치 노튼, 나탈리 노튼
출판
미디어윌
발매
2013.11.25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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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하며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이미 몇몇 소수는 바보짓(?)에 성공하여 정상인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에 가려진 과반수 이상은 바보짓을 한 후에 적어도 한번 이상의 실패를 맛보았을 것이다. 바보가 되면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가기 어렵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한번의 미친 짓에 도전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 걱정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상인으로 돌아가라. 여러 사람 고생시키고 있는 거 아냐?'고.


만일 이 바보짓을 하면서 돈과 명예를 바라본다면 이 바보짓은 말 그대로 멍청한 바보짓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시작한 바보짓이라면 빨리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바보짓이 바보짓인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좆는 당장의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은 뒤로 밀어두고 꿈과 희망으로의 목표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바보짓(?)으로 성공(?)한 이들이 소유한 돈과 명성에만 관심이 있다면 당장에 다가올 현실적인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한 문제의 원인인 궁핍을 이겨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돈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 경제적인 불안감으로 인해 다른 모든 좋은 것(처음에는 좋았던)의 추진력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추진력이 없어진 배는 파도에 이리저리 표류(漂流)하다가 암초에 파선(破船)하거나 높은 파도에 잠기게 된다.







저자는 이 문제들을 비즈니스(Business)의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제시한 성공사례들은 하나같이 수익모델을 찾아내거나 특별한 서비스를 통해 창업을 한 경우이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여러 가지 기술적인 안내를 하였지만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성과를 내고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누리라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찾아 아프리카(Africa) 오지로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 공생하는 삶을 살았다거나 산이 너무 좋아 도시생활을 버리고 로키 산자락에 집을 짓고 불편함을 즐기며 사는 이 같은 예는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이래 저래서 그는 비즈니스에 성공했다. 라고 끝을 맺는 이야기일 뿐이다.


필자도 최근에 준비중인 것이 있어서 이 책을 읽고나서 ‘내 선택이 맞는 것이구나’ 하는 위안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글로 정리를 하다 보니 책 머리에 있던 ‘가빈의 법칙’은 온데 간데 없고 돈과 영예만이 남아있다. 지금 당장의 연봉보다는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행동이나 생각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필자 역시 어찌되었건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이런 저자의 이야기들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책장을 덮었을 때의 감동(?)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른 후에 바라본 이 책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초반부의 저자가 잘 다니던 직장의 CEO 자리를 걷어차버린 직접적인 원인과 그 때 저자가 느꼈던 그것을 나에게 투영해서 그렇다면 남은 나의 삶을 위해 용기 내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해 보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즈니스 성공사례’를 걸러내고 읽으면 이 책은 정말 좋은 책이다.







주)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


공무원의 수는 해야 할 업무의 경중이나 그 유무에 관계 없이 일정 비율로 증가한다는, 파킨슨(Cyril N. Parkinson)이 주창한 법칙을 말한다. 영국의 행정학자 파킨슨은 이렇게 공무원 수가 증가하는 이유로 부하배증의 법칙(제1공리)과 업무배증의 법칙(제2공리)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부하배증의 법칙은 특정 공무원이 과중한 업무에 허덕이게 될 때 그는 동료를 보충 받아 그 업무를 반분하기를 원치 않고 그를 보조해 줄 부하를 보충받기를 원한다는 공리를 말한다. 그리고 업무배증의 법칙은 부하가 배증되면 과거 혼자서 일하던 때와는 달리 지시, 보고, 승인, 감독 등의 파생적 업무가 창조되어 본질적 업무의 증가 없이 업무량의 배증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킨슨 법칙 [~法則, Parkinson’s law] (행정학사전, 2009.1.15, 대영문화사)


1955년 Economist지에 C. N. Parkinson이 제기한 사회생태학적 법칙은 ‘공무원 수의 증가는 업무량의 본질적인 증가와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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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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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이 후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사회 실체의 끝을 보고 있다. 사고의 원인 그리고 그 원인 뒤에 각종 커넥션들 그리고 소문들. 어느 것이 진실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분노하며 퍼 나르며 거짓에 시체말로 진실(Fact)를 부여하고... 진실보다는 세상의 힘이... 진실보다 내 이익이 먼저이고... '다르다' 와 '틀리다'를 구분 못하는 민족의 허접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왜 이렇게 끝간 곳 없이 타락한 것일까?


누구는 현 정권을 탓하고 누구는 '그 누가 정권을 잡았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누구는 '친일'이다. '종북'이다. 라 말한다. 누구는 사주(事主)의 부도덕이나 그들의 종교에 칼을 들이댄다. 그리고 좀 더 생각 깊은 이들은 자신이 다름 아닌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든 국민 자신임을 부끄러워한다.


그렇다. 국가라는 것, 사회라는 것은 각 개인 구성원이 만드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일방적으로 정권이 문제라고 주장한다면 현 정권은 과반수의 국민이 찬성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국민의 반 이상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투표해도 소용없다.' 거나 귀찮아서 투표를 포기한 이들의 책임은 더 커진다. 그리고 다른 후보를 지지한 국민들도 그 이후에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할 수 만은 없다. 각자 어떤 상황에서 라도 국가나 사회가 변질이 되지 않도록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들은 참 애석하게 구체적인 행동보다는 말이 앞선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 각종 인터넷 매체나 SNS에 나타난 분노대로 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 기세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온라인을 벗어나면 힘을 잃는다. 그 이유는 그 분노의 원인이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 인가와 분노의 표출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인들의 분노의 기저에는 나와 내 주변의 좁은 인간관계와 관련한 분노이거나 내가 속한 여러 가지 집단의 분노와 관련이 있다.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서 내가 아닌 집단으로 움직여야 비로서 행동을 한다.






인류는 근대에 이르러 ‘나’라는 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개인들은 민족. 국가. 정치집단. 친족. 학교. 회사등의 집단에 앞서 자신을 더 가치 있게 여기게 된다. 이는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서구사회에 부가 증대되면서 개인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범 지구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그러나 세기말 인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를 들고 나오는 등 집단주의로의 회귀를 보인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확대되는데 서구사회에서는 계층간의 갈등과 국가간의 갈등이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소득차이. 지연. 학연 그리고 종교의 차이로 인한 집단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신구(新舊) 세대간의 갈등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이런 집단화는 개인이 집단에 숨어서 집단의 목소리에 묻어서 자신을 드러나는 현상에 때문에 더욱 심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일베현상’을 들 수 있다. 집단 안에서 개인은 혼자는 할 수 없었던 대담함을 보이며 집단이 상정한 적에 대해 분노를 과감하게 표출한다. 상식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수준의 글들을 쏟아낼 수 있는 것도 집단화의 패해 중에 하나이다. 한편 이런 집단적 일탈뿐 아니라 개인대 개인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된다면 자신의 이익과 관계 없이도 상대가 자신 보다 잘나(?)보인다는 이유로 끌어 내리려고 상대의 작은 실수를 비꼬거나 허위로 비난하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분노사회-정지우'는 우리 사회의 퇴보 현상을 지적한다.


집단주의로의 회귀, 파편화되고 부속화된 개개인들의 병리학적 문제들, 극단의 나르시즘에 대해 고발한다. 필자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기는 세월호 문제로 나라가 출렁이기 시작한 시기라서 저자가 지적하는 분노하는 사회의 문제와 원인으로 책임감 없는 정부와 고민 없이 정보를 실어 나르는 네티즌들, 서로에 대해 끝없이 분노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물론 필자가 놓친 부분도 있다. 왜 이렇게 지옥으로 치닫는가? 에 대해서 이다. 저자는 집단에 숨어서 누군가 적을 만드는 이유를 각 개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저주하며 그 문제를 타인에게 투영하기 위해 그 대상물을 찾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현대인들의 마음이 공허로 가득 찬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필자는 감히 말한다. 그건 지지난 세기 소위 '이성의 시대'에 인간이 자신 안의 절대자를 죽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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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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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7일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전세계의 마니아들이 들떠있었다. 이 날은 누군가의 어린시절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어떤 친구의 생일이다. 당시 9시 뉴스에도 잠깐 소개될 정도였는데...

 

이날은 바로 아스트로 보이(Astro-Boy)의 주인공 아톰(Atom)의 생일이다. 아톰은 1951년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1928~1989)의 원작으로 세상에 소개되었고 원작에서 아톰은 2003년 4월 7일 자각을 한다.

 

 

 

 

 

 

뜬금없이 아톰의 이야기를 한 것은 전혀 다른 반응이긴 하지만 비슷한 상황을 만든 작품이 또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에는 주인공의 생일이 아니라 책의 제목과 시대 배경에 대해서이다. '1984' 이 책은 역시 유명한 작품인 '동물농장'의 저자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 필명 : 조지 오웰)가 1949년 6월 8일, 세커 앤드 와버그 출판사을 통해 출간한다. 작품의 탈고는 1948년에 스코틀랜드의 주라 섬에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디스토피아(Dis-Topia)를 그린 명작으로 불린다. 이 책의 제목이 '1984'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필자가 언급한 바는 없는데 조지 오웰 평전을 보면 평전의 저자는 1948년에 원고를 탈고하면서 조금 먼 미래로 산정하기 위해 뒤의 두 숫자를 바뀌서 '1984'로 했다는 주장을 한다. 아무튼 제목이 이런데다가 조지오웰의 영문학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때문에 1984년 관련 기념행사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미 문화권에서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해외 토픽수준에서 소개 되었지만 출판계는 잠시 1984년 특수로 '1984'의 출간은 물론 조지오웰가 집필한 책들과 평전, 그리고 연구자료가 발표되었다.



 

 

조지오웰의 두 책 '동물농장'과 '1984'는 우리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1945년과 1949년에 각각 출간된 이 두 책은 1950년에 한국어판으로 번역이 되어 우리나라에 소개된다. 당시 '한국전쟁중'이었다는 점에서 외국서적의 한국어 번역과 출간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이것은 영어가 아닌 언어로 번역된 최초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이 두 책의 한국어 번역은 상당히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전에 필자가 조지오웰 평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번역은 미국방성이 당시 팽창하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항 할 목적, 즉 사상 교육용으로 번역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하면서 그 첫 대상으로 당시 공산군과 전쟁 중인 한국에 의도적 보급을 한 것이다. 한국어 이외에 그 후에 몇 개의 언어로도 번역이 되는데 이런 상황 때문에 조지오웰의 이 두 작품 '동물농장'과 '1984'는 공산 독재국가를 비꼬는 책으로 알려진 것이다. 특히나 '동물농장'의 경우에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조지오웰의 사후에 일어난 내분과 멘세비키였던 트로츠키가 숙청되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해서 더욱 이런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공산주의에 대해 영국보다 좀 더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나라였고 조지오웰에 당시의 대한 평가를 참고 해보면 미국방성의 이런 정책은 아이러니 한 것이다.

 

 

 

 

조지오웰이라는 인물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가 공산독재정권을 비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주장은 거짓임이 들어난다. 조지오웰은 그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주의 작가였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주의 작가동맹 등에서도 배척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영국의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했던 것(결과적으로 이들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스탈린에게 배신을 당했다.)과는 달리 그는 영국정부와 소련정부를 동시에 비판했다. 그 비판의 이유는 이들이 국가라는 권력으로 국민들의 억압한다는 이유에서 였다. 대부분의 진보적인 인사들이 영국정부가 제국주의의 기치아래 약소국은 물론이고 자국민들도 억압한다며 반대하며 그 대안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눈에는 막 탄생한 소련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나라라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관점(지금도 유효한)에서 보면 조지오웰은 그가 속한 그룹으로 '빨갱이 작가'였고 그의 성향으로 보면 무'정부 주의자'였다. 우리의 색깔론으로는 그는 공산독재을 비판하는 작품을 쓸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을 스탈린으로 스노우볼을 트로츠키로 배웠다. 이런 이율 배반적인 상황은 조지오웰의 작품 두 개를미국이 우리에게 배급하면서 그 들의 분류에 따라 사회주의자이며 스페인내란에 참전했던 무정부 주의자, 조지오웰에 대한 정보는 막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지 오웰이 무정부주의자 였고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자라면 그는 아나키스트(anarchist)인가? 당시 서구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스페인 내란에서 국민군(공화국)측으로 참전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생각했고 조지오웰 역시 참전하였다.그러나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후 그의 생활을 보면 이런 분류로는 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말년을 시골의 작은 집에서 텃밭을 가꾸고 식료품을 동네 주민들에게 팔며 생활을 했다. 사회주의자였지만 극단과는 거리를 두었다. 어찌보면 입으로만 사회주의자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강렬했고 특히 BBC에서 근무할 때 그의 논조는 매우 강했다.

 

조지오웰이 어떤 작가인가에 대해서는 사후에도 의견이 부분했다. 1953년 공개된 소위 '오웰 리스트'라고 하는 친소작가 명단에는 실제로 사회주의 작가들을 포섭하려는 소련 공작원도 있었는데 후에 이를 바탕으로 E, H 카, 찰리 채플린을 빨갱이라고 정의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편  오웰, 카 같은 이들을 '도적적 허무주의자'라고 분류하여 정치적 문제와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평가하는이 들도 있다. 

 

 

 

 

 

이런 작가의 정보를 먼저 알고 1984를 보면 이 책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구조로 단순화하여 흑백으로 갈라서 한 쪽을 비판하기 위해 씌어진 책이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린다. 오웰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머리격인 자신의 조국 영국과 소련의 정치인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당시에는 자유진영도 공산진영 못지않게 전체주의가 확산되어 있어서 국가의 이익이라는 이름을 개인의 자유와 삶을 어느 정도 피박하고 있었다. 두 진영은 색만 달랐을 뿐이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오웰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오웰은 '1984년'의 3개의 독재 국가,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유라시아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가 비판한 내용은 공산국가가 아닌 독재와 독재에서 필히 나타는 전체주의였고 그 것이 자유진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를 한 것이다. 물론 그의 우려는 이미 그의 생전 독일에서 일어났었다. 독일사회주의당 즉 나찌는 보수민족주의 성향을 가졌고 이것은 세계시민주의를 지향하던 사회주의(경제 체제에서 보면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반대였지만 전체주의라는 방법론에서는 같은 길을 걸었다. 게르만 민족의 통일이라는 목적은 같은 게르만족인 오스트리아를 무력을 통합하고 약자인 유대인과 집시의 씨를 말리려 했다. 게다가 영국은 이런 나찌에 대해 소련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보고 국가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소련 또한 결국 서방 세계 지식인들의 이상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나찌와 불가침 조약을 맺어 사실상 나찌를 옹호하게 된다. 물론 영국, 독일, 소련은 이후에는 서로 적이 되어 싸우게 되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비윤리적이며 비상식으로 전개되었고 이런 역사는 '1984'의 3나라 사이에서도 똑같이 전개된다. 한 국가를 점령하기 위해 두 나라가 조약을 맺고 어느 순간 그 조약은 두 나라중 하나의 공격을 깨지고 또 다른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또 다른 두 나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조지오웰이 1984에서 비판한 것은 이런 국가권력의 횡포 아래 거의 모든 국민, 개인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매락에서 이전에 씌어진 동물농장을 살펴보면 조지오웰이 두 작품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부조리 현상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나타난다. 동물농장에 초대된 이웃 농장의 인간주인(혁명 초기에 동물들은 죽이고 동물농장을 탈환하기 위해 쳐들어 왔고 그 후에 돼지들이 반혁명 세력의 배후로 지목했던...)들이 돼지들과 카드 도박을 하는데 창가에서 바라본 그들의 얼굴은 서로 닮았다는 것이다. 





 

책의 부록처럼 삽입된 '신어연구'에 관한 에세이는 좀 뜬금없어 보이지만 이 부분은 조지오웰이 연구했던 사회구조와 언어에 대한 내용을 1984년의 오세아니아의 신어사전 발간에 투영한 것이다. 오웰은 당시에 정치적 세력 즉 정당이니 단체이 하는 것들에서 사용하던 약어가 가지는 보이지 않는 특징과 권력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NSDAP) 후에 NAZI 라고 불리우는 권력이었다. 또 코민테른(Comintern)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도 그 예이다. 이런 약자(신어)들은 초기에는 반대세력의 조롱의 언어로 또는 너무 긴 이름을 줄이기 위해 만들었지만 이 후에는 이 약어(신어) 자체가 강한 의미와 심지어 권위(권력)을 가지게 된 점에 주목을 한다. 1984에서 빅브라더가 이끄는 영사(영국사회주의)는 이런 전통을 이어 받아 이런 약자와 신조어로 이루어진 언어를 만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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