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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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둘째 아들 윌리에게 작은 조랑말 한 마리를 선물한다. 윌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매일 조랑말을 탔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어느 날 윌리는 열이 심하게 났고 곧 티푸스로 발전했다. 대통령의 주치의조차 어쩌지 못한 병으로 인해 가엾은 윌리는 결국 열 한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슬픔에 가득 찬 장례식 뒤, 묘지에 묻힌 윌리의 영혼 앞에 세 명의 유령이 나타난다. 나이 어린 부인을 두고 사고로 죽은 한스 볼먼, 동성에 대한 사랑에 좌절하다 자살을 시도한 베빈스 3세, 목사로 살다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 에벌리 토마스 목사. 그들은 윌리가 곧 다른 곳으로(천국 또는 지옥) 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었다는 걸 모르는 윌리는 아버지가 돌아와 이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서 자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믿는다. 사실 이 세 유령 중 -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령들도 - 자기의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건 토마스 목사 뿐이다. 그는 천국과 지옥의 심판 앞에 섰다가 지옥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고 도망친 것이었다. 나머지는 자기가 죽음을 맞았을 당시에 시간이 고정되어 버린 탓에 심판의 자리로 가는 것 - 물질빛피어나는 현상 - 이야말로 죽음이라고 믿는 자들이다. 순진한 윌리를 비웃는 세 유령 앞에 링컨이 다시 나타나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 안고 슬퍼한다. 링컨의 행동에 크게 감복한 수없이 많은 유령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이야기, 그리고 윌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바르도의 링컨>은 내 독서 이력 중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설이다. 책을 처음 사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한 번 훑어보기 마련인데, 이 책은 도대체가 소설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책 전체가 온통 인용문들을 짜집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물들 간의 대화도 마찬가지. 모든 게 인용문과 독백의 형식으로 짜여져 있어서 책장을 대충 넘기던 나는 크게 당황했다. 이 생경한 책은 대체 뭘까. 그래서 사놓고 몇 달을 묵혔었다.

그러나 일단 이 책의 형식에 익숙해지면 생소함은 금세 사라지고 이 이야기의 마력,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윌리는 어떻게 될까? 하나하나 깊은 사연을 갖고 있는 이 많은 유령들의 헌신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이렇게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아쉬운 소설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 ‘바르도‘는 티벳 불교 용어로 죽은 뒤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를 의미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묘지의 사후세계, 죽음을 채 받아들이지 못한 윌리와 유령들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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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목적은 정보 전달이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이라면 책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요즘은 인터넷도 있다. 강의는 생각을 고취시키고 자극해야 한다. 훌륭한 강사가 내 눈앞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어떤 생각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난데없이 나타난 멋진 생각을 잡아내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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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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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엄마 뱃속의 태아를 주인공으로 이렇게나 긴장감 넘치는 범죄극를 주조해내다니 말이다. 자궁이라는 호두껍질 안에 갖힌 이름없는 ‘나‘. 만삭의 엄마는 아빠의 동생, 즉 내 삼촌과 불륜을 맺고 있다. 가난하고 덩치 큰 시인인 아빠와 달리 삼촌은 작달막하고 볼품없는 외모와 천박한 정신을 소유한 부동산업자다. 어쩌다 엄마가 이런 남자와 사랑에 빠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내 순진한 시인 아빠에겐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엄마와 삼촌이 아빠를 죽이고 유산으로 받은 낡은 저택을 팔아치우려는 사악하고 음흉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다. 무력하기 그지 없는 ‘나‘는 이 둘의 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이 햄릿의 독창적인 재해석이라는 세평이 많지만 ‘나‘는 햄릿과 달리 전혀 우유부단하지 않다. ‘나‘는 자궁이라는 껍질만이 아니라 연약한 육신에 수감된 처지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비할데 없는 증오를 느끼지만 엄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자신의 역설적인 처지를 끝없이 비관한다. 그래도 ‘나‘는 결국 태아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멋지게 복수에 성공해낸다. 다만 많은 경우 그렇듯, 복수를 이루었다고 내 인생이 도저히 행복해질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정의롭지만 슬프고 또한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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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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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문구를 좋아할까? 문구는 정보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보관하는데 쓰이는 도구를 말한다. 왠지 좋은 문구류를 갖고 있으면 멋진 아이디어를 만들어 낼 수 있고, 괜시리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소소한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Gadget이랄까.

나는 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도 글씨를 참 못 썼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그나마 좀 삐뚤빼뚤하지 않은 글씨체를 갖게 되었는데, 그래서 필기할 때 색색의 수성펜을 썼었다. 색이 화려하면 글씨가 조금이라도 덜 못나 보이니까. 그리고 글씨를 큼직하게 쓰면 못 쓰는 게 확 튀어 보이니 되도록 작게 쓰는 버릇을 들였다. 글씨를 조그맣게 쓰려니 자연히 가는 펜을 써야 했고, 가는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 아마 이 때부터 생긴 것 같다(샤프도 0.2mm를 쓰고 만년필도 EF 촉을 쓴다).

잉크가 번지지 않는 매끄럽고 두꺼운 종이 위에 촉이 가느다란 만년필로 사각사각 글을 써 나가면 별 것 아니지만 묘한 보람이 느껴진다. 위에서 말한 지적 허영심의 소확행이랄까. 이 <문구의 모험>은 비단 필기구 만이 아니라 클립, 컴퍼스, 접착제, 스테이플러, 포스트잇 같은 문구류까지(연필, 지우개, 볼펜, 만년필 등의 필기구도 당연히 들어있지만) 다룬다. 이 책의 시작은 저자가 오랜만에 고향 마을에 들러 어릴 때부터 다니던 문구점에서 골동품에 가까운 문구 정리함을 사면서 시작된다. 보통은 문구점에서 펜을 살텐데(나도 문구점에 가면 신기하고 독특한 펜이 뭐가 나왔나부터 살펴 본다),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오래된 문구함에 매료되었다는 것부터가 저자가 범상치 않은 문구 덕후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대체로 문구의 발전사를 다룬다. 특정 문구류를 누가 처음 발명했고,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떤 홍보 전략을 썼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지를 말한다. 사소하고 쓸모없어 보이지만 신기한 지식들의 모듬회 같은 거랄까. 거기에 저자의 문구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으니 문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래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아무리 IT 디바이스가 발전하더라도 아날로그의 보존성을 이길 수는 없는 법. 아이패드에 애플 펜슬로 필기하는 게 익숙한 시대가 되었지만, 나는 오늘도 언제 다시 읽을지 모르는 글을 로디아 노트에 만년필로 끄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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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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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안주가 아니다. ‘암수(暗獸)’의 일본어 발음이다. 한자 그대로 풀면 ‘어둠의 짐승’ 정도 되겠다. 미미 여사의 미시미야 변조 괴담 시리즈 그 두 번째 작. 전작 <흑백>과 마찬가지로 에도의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 한 켠의 ‘흑백의 방’에서 벌어지는 괴담대회가 그 주제다. 이번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흑백>만큼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귀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이야기가 세 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하나. 그래서 이 <암수>는 괴담이라기보다 기담에 가까운 이야기 모음집이다.

그 중 표제작인 <암수>는 버려진 저택에 사는 구로스케라는 이름의 괴물이 주인공이다. 괴물이라고는 하나 통상적인 이미지의 흉악한 것은 아니고, <이웃집 토토로>의 마쿠로쿠로스케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를 뭉뚱그린 듯한 생명체다. 어둠 속에 살고 겁이 많지만, 또 한 편 사람을 그리워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어린아이 같은 구로스케. 은퇴한 무사 부부가 이 저택에 살면서 구로스케와 인연을 맺어가는 이야기가 잔잔히 펼쳐진다. 화재와 살인이라는 끔찍한 사건 뒤에 숨어 있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비록 해피엔딩은 아니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휼륭하지 않을까 싶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머지 세 작품, <달아나는 물>,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 <으르렁거리는 부처>에서는 인간이 갖는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이에 대한 징벌이 각기 다른 껍데기를 쓰고 나타난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신, 가족 사이의 질투, 마을의 집단 이기주의와 이지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전개는 흥미로우나 결말이 시원치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짤막한 단편에서는 그런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숨죽이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안주> 만이 아니라 <흑백>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장점은 뛰어난 번역이다. 단순히 번역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우리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눈에 띈다. ‘헛방’, ‘푼주’, ‘동산바치’, ‘바늘겨레’ 등등 처음 보는 우리말 단어들이 등장하여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는 기쁨을 주는 번역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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