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이언 매큐언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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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미국과 영국은 동베를린에 위치한 소련군 사령부 지하로 터널을 파고 들어가 통신선을 따서 도청한다는 담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작전명 골드. 이 작전에 참여하게 된 스물 다섯 살의 영국 체신국 직원 레너드 마넘이 주인공인 소설 <이노센트>는 존 르 카레를 연상케 하는 냉전 시대 첩보물이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약한 영국 청년 레너드는 동료들과 같이 간 무도장에서 독일 여자 마리아를 만나고, 그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첫 사랑의 열정과 번뇌, 다툼, 비밀, 갈등. 이를 묘사하는 지극히 아름다운 글귀들, 그리고 그보다 더 빛나는 스토리텔링. 주인공들의 앞엔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의 제목 <이노센트>는 어떤 의미일까? 이 걸작의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더, 더 많이 읽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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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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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여행기는 <김영하의 여행자> 시리즈 이후 참 오랜만이다. 콘탁스 G1, 그리고 롤라이35라는 필름 카메라의 강한 개성과 하이델베르크, 도쿄라는 대도시의 특징을 절묘하게 엮어낸 김영하의 재능에 적잖이 감탄했었다. 내가 필름 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던 때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김영하가 두 달간 시칠리아를 여행하고 쓴 글이다. 내가 무뎌진 걸까, 아니면 이 여행기에선 김영하의 문재가 발휘되지 않은 걸까. 성공한, 하지만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중년의 환멸이 모티브가 된 여행은 좀 많이 식상하다. 김영하의 소설이나 산문 중엔 의아할 정도로 레벨이 떨어지는 게 가끔 보이는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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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전 - 다 빈치에서 파인만까지
존 캐리 엮고지음, 이광렬.박정수.정병기.이순일.방금성.김문영 옮김 / 바다출판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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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부터 시작되는 근대 과학기술의 연구 기록과 저술들을 한 꼭지씩 따서 모은 책. 저자 존 캐리가 과학자가 아닌 옥스포드 영문학 교수라는 점도 놀랍지만, 이 수많은 과학 저술들을 뒤져 대중이 반드시 알아야 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발췌하고 편집한 그의 노력이 경이롭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챕터는 화학자 프리모 레비의 <어느 탄소원자 이야기>로, 수억 년의 세월을 석회암 속에 갖혀 있던 탄소원자가 우연한 기회에 이산화탄소가 되어 겪는 모험을 상상한 이야기이다. 탄소가 대기를 떠돌다 이태리 어느 농장의 포도나무 잎으로 들어가 포도송이로 자라고, 와인이 되어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가 간을 거쳐 근육에서 젖산으로 분해되고, 호흡을 통해 다시 대기로 돌아가 레바논의 삼목나무 줄기 속 셀룰로오스가 되고, 나무벌레의 일부가 되고, 미생물에게 먹혔다 어쩌다 우유가 되어 프리모 레비의 몸 속에서 뇌를 구성하는 세포의 일부가 되어 이 글을 쓰게 되는 긴 여정. 우리가, 우리를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곧 우주의 일부이자 우주 그 자체라는 걸 윤회라는 종교적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증명한 아름답기 그지 없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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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원전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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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역사는 비유하자면 잘 무두질된 가죽 같은 것이다. 수많은 가공을 거쳐 부드럽고 보기 좋지만, 그 동물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인류가 겪은 일상과 사건들이 엄청난 두께로 퇴적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는 건 당연할 터. 그래서 역사는 큰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깎아 만든 이쑤시개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된 역사는 절대로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할 수 없다. 권력자의 의지 때문이든, 사상과 이념의 문제이든 상관없이 그게 역사 기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르포르타주가 중요해진다. 사건의 직접적인 목격자가 자신의 언어로 기록한 것. 그게 일기가 되었건, 신문 기사가 되었건, 자서전이 되었건. 거친 호흡과 주관적인 문체로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의 느낌을 주는 것 말이다.
저자 존 캐리의 말대로 우리는 참혹한 사실주의 소설을 읽다가도 이것이 결국 그냥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다. 하지만 나치대학살에 관한 생존자의 기록을 읽다가 그렇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제기된 사실들이 우리의 인식을 강제하고 우리의 반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르포르타주는 현실을 가림없이 보여주어 독자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실린 180개 꼭지의 기록들이 갖는 울림은 때로 가슴을 저밀 정도로 대단하다.
다만 역자의 주관이 지나치게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점이 아쉽다. 역자 후기에서 자랑스럽게 밝히듯,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원저에 있지도 않은 해설을 매 꼭지마다 멋대로 달아놓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자의 주석을 맘대로 삭제하고 원저의 30% 정도를 한국 일반 독자에게 적합지 않다(...)는 이유로 아예 번역에서 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나머지는 원서를 찾아보라고 친절히 안내까지 해준다. 아마 역자는 번역이 아니라 편역을 하고 싶었나보다.

프레인의 풍자는 기자가 겪는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표준화된 표현과 진부한 문체가 서서히 쌓여 기다리고 있다가 손끝에 닿기만 하면 종이 위로 튀어나온다. 사실 글 쓰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기자의 경우 특히 심각한 문제다. 현실에 충실해야 하면서 또한 언제나 친숙하지 않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 그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기자의 눈은 언제나 처음 보는 것처럼 보아야 하고, 기자의 입은 언제나 처음 말하는 것처럼 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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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진화 - 이기적 개인의 팃포탯 전략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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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가 적극 추천한 책이어서 당연히 진화생물학자의 저서로 알았던 이 책은, 미시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가 ‘죄수의 딜레마‘를 기반으로 어떻게 개체나 집단 간의 협력이 발생하고 공고해지는지 증명하는 책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두 명의 죄수가 각자 격리된 상태에서 심문을 받을 때, 둘 중 하나가 배신하고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풀려나고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10년형을 받는다. 둘 다 서로 배신하여 자백하면 각자 5년형을 받는다. 둘 모두 자백하지 않으면 둘 다 6개월 형을 받는다. 이 상태에서 서로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은 서로 배신하지 않고 6개월 씩 형을 사는 것이지만, 상대의 정보가 차단되어 있고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으므로 상대가 배신하든 안 하든 나는 배신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 된다.
하지만 이 죄수의 딜레마에서 1번만 선택해야 할 때는 배신이 최선의 선택이 되겠지만, 이런 선택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지금 만난 상대방을 언제 또 만나게 될지 모른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서로 협력하여 이득을 얻는 편이 다시 또 만날 가능성이 높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보다 낫다.
액설로드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의 게임이론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죄수의 딜레마 대회‘를 두 차례 개최한다. 전문가들이 만든 프로그램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한 차례씩 대전을 치러서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프로그램이 우승하는 대회다. 첫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가장 단순한 팃포탯(Tit For Tat)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팃포탯은 우선은 상대와 협력하지만, 상대의 반응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 상대가 협력하면 다음 번에도 협력하지만 상대가 배신하면 바로 배신으로 응징한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첫 대회의 결과를 모두 알고 있었기에 좀 더 발전된 프로그램들이 참가했지만, 이번에도 우승은 팃포탯이었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흥미로운 건 두 대회 모두 상위권에 든 프로그램들은 팃포탯처럼 협력 위주의 신사적인 프로그램이었다는 거다. 우리가 인지하는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여서 배신이 횡행하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간단하다. 배신이 횡행하는 세계에 조금이나마 협력을 할 줄 아는 개체들이 나타나면 이들 상호간에는 협력을 통해 배신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개체들도 이들을 모방하여 협력을 발전시키기 때문에 결국엔 협력하는 개체들이 대세가 되는 세계가 된다. 단 여기엔 아주 중요한 전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 상대를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충분히 커야 한다. 딱 한 번만 만날 사이라면 배신이 최선의 선택이다.
이 점은 회사의 임원들이 왜 그리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지를 시사한다. 어차피 2년 내에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전체 조직의 건강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즉, 임원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다.
협력은 개체 또는 집단의 선악과 상관없이 일어난다. 협력은 최선의 이득을 얻기 위해 상대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촉진되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생존전략들이 경쟁하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기 이득을 최대화하는 전략이 살아남고 그것이 팃포탯이라는 걸 저자는 두 차례의 죄수의 딜레마 대회, 그리고 역사적 사례와 생물계의 협력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세상은 대개 제로섬 게임의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호혜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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