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리커버 에디션)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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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의 작품은 크게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과학(거의 모든 것의 역사, 바디), 여행(나를 부르는 숲, 발칙한 유럽산책), 언어(발칙한 영어산책, 셰익스피어 순례)의 세 가지인데, 이 책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이 중 여행에 속한다.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빌 브라이슨의 번역서 제목엔 대개 ‘발칙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작가 특유의 비꼬는 듯한 투덜거림이 책에 잔뜩 묻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이젠 좀 식상하다. 그의 작품 원제엔 발칙하다는 표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는데도 - 이 책의 원제도 <The Lost Continent>다 - 천편일률적으로 ‘발칙한‘이라고 제목을 따붙이는 그 안일함이 조금 괘씸하다.

‘세계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기‘라는 부제 그대로,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이 어머니의 낡은 자동차를 빌려타고 그의 고향 와이오와 주 디모인에서 출발하여 남부와 동부, 그리고 서부까지 38개 주의 소도시들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청년기 이후로 줄곧 영국에서 살던 빌 브라이슨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어릴 적에 매년 여름 아버지 차를 타고 가족여행을 떠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금 길을 떠난다. 이번엔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누나도 없이 홀로.

이 책엔 내가 어릴 적 외화를 통해 학습한 미국 중소도시들의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흙먼지 날리는 황무지를 관통하는 끝없는 직선도로, 정원과 차고가 딸린 똑같이 생긴 이층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한적한 동네, 하릴없이 시골 바에 앉아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어치우는 중년의 아저씨들과 껌을 씹으며 주문을 받는 웨이트리스들. 빌 브라이슨은 미국 중서부에서 중부와 남부, 동부를 거쳐 다시 서부까지 여행하지만, 이 광경들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광대한 미국 대륙을 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여행하는 건 낭만이 넘치는 게 아니라 지극히 고단하고 지루한 단순노동에 가까워 보인다. 예전에 그랜드 캐년에 가는 길 위의 몇 시간 동안 조슈아 트리와 덩굴풀만 자라는 황야를 지났던 권태로운 기억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 모르겠다.

‘세계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여행 작가‘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서 알 수 있듯, 빌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대체로 유쾌하다. 하지만 이 <발칙한 미국횡단기>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게 1989년인데, 그땐 PC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인지 빌 브라이슨의 조롱조의 문체가 지금보다 거칠고 덜 다듬어져 있다. 그래서 상당히 거슬린다. ‘관광객들은 모두 뚱뚱하고 옷을 등신같이 입는다‘고 깎아내리고, 루스벨트 기념관에서 떠드는 ‘할망구의 두 귀를 잡아 이마를 내 무릎에 깨 버리는‘ 상상을 하며, 카페에서 시끄럽게 말하는 여자를 ‘지저분하고 점잖지 못한 데다 엉덩이는 축사 문짝만‘하다고 묘사한다. 작가 본인도 이런 과격한 조롱의 대상으로 지목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 속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단지 ‘80년대였으니까‘라고 한켠에 덮어둘 뿐이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을 가로지르는 이 여행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 그린 이상적인 타운 ‘모아빌‘을 찾아 헤맨다. 사시사철 쾌적한 날씨,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건축물들, 풍요로운 사람들이 사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도시. 그는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고향 디모인을 흥미로운 게 하나도 없는 지루한 동네라고 묘사하지만, 수많은 소도시를 거쳐 다시 디모인으로 돌아올 때 쯤엔 다시 ‘여기 살 수도 있겠다‘ 싶은 평온함을 느낀다. 그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처럼 고향에서 ‘모아빌‘을 찾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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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금술사 - 뇌는 어떻게 인간의 감정, 자아, 의식을 만드는가
다이앤 애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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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과학 속에 숨어 있다는 걸 깨우쳐 주는 이. 문학의 언어로 과학을 경이롭게 번역하는 이.

나에게 다이앤 애커먼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감각의 박물학>, <휴먼 에이지>에서 과학서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수려한 문장과 철학적인 사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그녀의 글쓰기에 매료되었었다. 인문학과 과학의 이상적인 만남이랄까. 나는 그녀의 열정과 재주가 부러웠다.

이 책 <마음의 연금술사>에서도 그녀의 글솜씨는 여전하다. 하지만 읽다보니 왠지 모르게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뇌과학이 워낙 복잡하고 전문적인 영역이어서일까? 다른 뇌과학 책들은 뇌의 각 부분이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부터 설명하지만, 이 책은 그런 배경지식을 독자가 이미 갖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느낌이다. 사전에 특별한 설명 없이 의식과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 이성이 구성되는 과정, 기억이 만들어지고 저장되는 메커니즘, 자아와 감정에 대한 설명 등등을 늘어놓는다. 여기선 그녀 특유의 아름답고 현학적인 문장이 오히려 뇌를 이해하는데 독이 된다. 그녀의 설명이 - 사실 이걸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서른 네 개의 챕터를 다 읽고 나도 다이앤 애커먼이 당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끝내 알 수가 없다. <마음의 연금술사>라는 제목만 봐서는 수많은 뉴런과 회백질로 이루어진 뇌가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그 신비를 설명하려는 책 같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만 남았다. 이렇게 얻을 게 별로 없는 과학 에세이를 읽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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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의 시간 - 길 잃은 물고기와 지구, 인간에 관하여
마크 쿨란스키 지음, 안기순 옮김 / 디플롯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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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에게 연어는 그리 익숙한 물고기가 아니었다. 고등어나 갈치, 조기 처럼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이 아니어서 그렇다. 연어는 저멀리 북대서양 노르웨이에서 비행기로 날아오는 귀한 몸이라 뷔페에서나 가끔 먹을 수 있는 귀한 생선이었다. 지금도 가격이 그리 만만치는 않아서 집에서는 가끔 스테이크로나 해먹는 생선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으러 연어들이 강을 거슬러 오는 계절이 되면 강에 그물만 쳐도, 아니면 낚싯대나 작살 하나만 있어도 무진장 연어를 잡을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잡은 다음 염장하거나 훈제해서 보관한 연어는 서구 요리의 주요한 식재료였다. 위도 상 연어가 회유하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연어를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연어가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연어의 시간>에서 마크 쿨란스키는 말한다. 무슨 이유일까? 연어가 남획되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연어가 돌아오는 강을 ‘연어 강‘이라 부르는데, 연어 강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연어가 포식자들을 피해 강을 거슬러 갈 수 있도록 좁고 물살이 세어야 하며 - 굽이진 강일 수록 더 좋다 - 이런 강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숲이 울창한 강둑이 있어야 한다. 또한 연어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살 수 있도록 낙엽이 가득 쌓여 있어 유기물이 풍부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노라면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연어 강이 되기 위한 조건은 곧 산업화를 위한 조건과 정반대라는 것을 말이다. 산업화를 위해선 물류에 적합한 넓고 천천히 흐르는 강이 필요하다. 게다가 강가에 공장을 짓고 벌목을 하게 되면 강둑의 숲은 금세 사라진다. 배가 다니기 위해선 강이 깊어야 하니 강바닥에 쌓인 유기물을 준설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연어는 거의 사라졌지만, 역셜적으로 영국이 산업화를 방해한 아일랜드는 연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미국에서는 알래스카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강에서 연어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연어는 인디언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던 서구인들의 시선으로는 연어를 존중하고 심지어 숭배하는 인디언들은 한심한 족속에 불과했다. 인디언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쫓았듯, 연어들의 고향인 강을 파괴한 대가로 더 이상 연어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와서 댐을 철거하고 부화장을 설치하는 노력을 뒤늦게 하고 있지만 연어가 예전처럼 강을 가득 메우려면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다.

마크 쿨란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연어는 지구의 건강을 가늠하는 일종의 지표라고. 다들 알다시피 연어는 호수와 강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바다로 나가 몇 년 간 살을 찌우고 다시 고향의 민물로 돌아와 알을 낳는 소하성 어종이다. 그래서 연어는 해양생태학과 지구생태학 사이에 일종의 연결고리가 되어 우리가 육지에서 벌이는 활동들이 어떻게 바다에 영향을 미치는지 파악할 수 있게 돕는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지금의 기후 변화는 찬물에 사는 어종인 연어를 질식시키고 있다. 바다와 강을 아우르는 거대한 먹이사슬의 한가운데에 연어가 있기 때문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연어의 멸종 위기가 우리 생태계에 미칠 영향은 자명하다. 하여, 연어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곧 우리와 지구를 구하는 노력이다. ˝우리가 지구를 구할 수 있으면 연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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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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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즐겨 하는 사람이라면 부엌 주변에 요리책 한두 권 쯤 두고 있는 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요즘엔 블로그나 유튜브로 정리된 레시피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 요리책을 사는 사람이 많이 줄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요리책에 실린 사진을 보며 완성된 요리를 상상하고, 레시피를 충실히 따라가서 상상했던 맛을 비슷하게 구현해냈을 때 얻는 풍요로운 만족감이 우리가 요리책을 사는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이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에서 줄리언 반스가 말하는 바는 이런 요리책의 이상과 거리가 좀 있다. 스스로를 ‘부엌의 현학자‘(The pedant in the kitchen. 이 책의 영어 원제이기도 하다.)라고 칭하는 줄리언 반스는 요리책에서 늘어놓는 레시피에 대단히 불만이 많다. 레시피의 부정확한 계량, 애매모호한 표현, 레시피를 따라가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요리 등등.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줄리언 반스는 내내 요리책과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pedant를 왜 ‘현학자‘라고 번역했는지 슬슬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영한사전에 실린 의미로는 현학자가 맞지만, 이 책에서의 줄리언 반스는 지혜로운 현학자가 아니라 grumpy한 불평쟁이에 가깝기 때문이다. 요리책의 저자, 식료품점의 점원, 각종 요리 도구, 프랑스 요리, 집에 초대한 손님, 심지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투덜거리는 저자를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기보다는 더불어 짜증이 차오른다.

음식은 기분좋게, 맛있게 먹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영혼을 위로하는 안온하고 즐거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책도 마찬가지. 우리는 맛있는 음식이 주는 안락하고 유쾌한 이미지나 소박한 음식이 주는 아련한 기억을 불러오길 원하지, 이렇게 먹다가 체할 것 같은 불평투성이의 글을 읽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영국식 유머라 치부하기엔 좀 고약하지 않나 싶다. 아무리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의 에세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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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도서관 - 책과 영혼이 만나는 마법 같은 공간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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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고요하다. 아침의 분주함도, 한낮의 나른함도, 저녁의 한가로움도 사라진 시간. 대기를 떠돌던 소음이 가라앉고 양감을 가진 어둠이 주위를 휘감을 때, 우리는 이제 책 속으로 잠수할 시간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마치 비좁은 심해 탐사 잠수함에 탑승한 것처럼, 조그만 의자에 푹 파묻혀 라이트를 켜고 책이라는 깊은 바다의 페이지 곳곳을 항행하는 독서가들.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들을 위해 도서관의 기원과 역사, 철학, 건축,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방대한 독서량을 바탕으로 한 그만의 박학다식함을 가지고.

지금, 도서관을 말하는데 알베르토 망구엘 만큼 적합한 사람이 또 있을까. ‘세계 최고의 독서가‘, ‘책의 수호자‘라 불리는 이답게 그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도서관 이야기들은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그의 다른 책 <독서의 역사>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대체 얼마나 책을 읽어야 이 정도의 지식을 쌓을 수 있을런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흔히들 ‘구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알베르토 망구엘이 평생을 꼭꼭 씹어 소화해낸 지식들은 웹을 아무리 뒤져 봐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그가 머릿 속에 쌓아 올린 지식의 바벨탑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고 싶을 지경이다.

그가 이 <밤의 도서관>을 쓰게 된 건 프랑스 시골 마을의 조그만 사제관을 사들여 개인 도서관으로 개축하면서부터다. 반세기 동안 수집한 책들을 한데 모아 도서관을 꾸미면서 이 책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신화, 정리, 공간, 힘, 그림자, 형상, 우연, 일터, 정신, 섬, 생존, 망각, 상상, 정체성, 집이라는 상이한 열 다섯 개의 주제로 도서관을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수없이 많은 사상가들, 작가들,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말이 인용된다. 이를테면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학자와 독서가의 차이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학자는 앉아서 집중하는 고독한 사람으로, 자신이 열망하는 특별한 진리의 씨앗을 찾아 책을 열성적으로 뒤적거린다. 책을 읽는 재미에 빠지면 그가 얻으려는 소득이 줄어들고, 힘들게 얻은 것마저 부지불식간에 빠져나간다. 반면에 독서가는 처음부터 뭔가를 배우려는 욕심을 억눌러야 한다. 책을 읽다 보면 지식이 어쩔 수 없이 더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식을 계속 추구하고 체계적으로 독서하며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려 한다면, 순수하고 사심 없는 독서를 향한 한층 인간적인 열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은 사라지기 십상이다.‘

망구엘은 말한다. 모든 서재는 궁극적으로 에우테미아를 갈망한다고. 세네카에 따르면 에우테미아는 ‘영혼의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에우테미아는 방해받지 않는 기억이며, 글을 읽는 시간의 편안함이다. 고요한 밤, 우리는 각자의 도서관에 앉아 에우테미아를 좇으며, 책이 제시하는 무수한 통찰의 순간을 찾으며 활자들 사이를 조용히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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