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1부 : 삼체문제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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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후회가 들었다. 왜 책부터 읽지 않고 넷플릭스 드라마부터 봤을까?

SF소설의 시조인 H.G. 웰스의 <우주전쟁>부터 외계인의 지구 침공은 SF의 주된 주제였다. 침공 만이 아니라 외계인과 조우하고 외계 문명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다룬 소설도 무수히 많았다. 어슐러 르 귄의 그 유명한 <어둠의 왼손>도 다른 별의 지적 문명과 어떻게 공존하여야 하는지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친기즈 아이뜨마또프의 <백년보다 긴 하루>는 SF 장르 소설은 아니지만, 전쟁을 배척하고 평화를 자신의 언어로 삼는 고도의 외계 문명을 내세워 냉전 시대의 미·소, 더 나아가 호전적인 인류 문명을 은근히 비판한다.

하지만 이 <삼체>의 특별한 점은 외계인이 일방적으로 지구에 쳐들어온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인류의 폭력성과 비이성에 절망한 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외계 문명에 인류를 정화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체>의 외계인은 누군가에겐 침략자로, 또 누군가에겐 구원자로 비춰진다. 그리하여 인류는 삼체 문명 만이 아니라 같은 인류와도 싸워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또 한 가지. 류츠신은 <삼체>에서 물리학적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예를 들어, 삼체 문명의 과학 기술이 지구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했지만 광속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물리학의 기본 법칙은 유지된다. 그래서 삼체 함대가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40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고 그 사이에 인류가 삼체 함대에 맞서 싸울 수 있을 수준으로 과학을 폭발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가 만들어진다. 이를 예상한 삼체 문명에서는 양자역학과 초끈이론을 응용한 지자(智子)를 삼체 함대에 앞서 지구에 보내 인류의 기초과학 발전을 저지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이 성립한다.

드라마 보다 책을 먼저 읽지 않은 걸 후회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삼체>의 매혹적인 설정과 개념을 드라마를 통해 먼저 알아버렸으니 책 읽는 재미가 반감된다. 그리고 추리소설적 요소가 다분한 책이라 서서히 드러나는 삼체 문명의 의도와 반전이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사실 이 책의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장이 건조하고 인물들의 심리 묘사나 대사가 무척 평면적이어서 읽기에 조금 지루하다. 하기야 대가 중의 대가인 아이작 아시모프도 그런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려우니 하드SF 작가의 한계라고 봐야겠다. 그런 면에서 소설의 설정을 탁월하게 시각화해낸 드라마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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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2 이산의 책 7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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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엔 전권에 이어 일제의 만주 침략부터 천안문 사태까지의 역사의 물줄기가 담겨 있다. 제2차국공합작, 난징대학살, 일제의 패망, 인민공화국의 탄생, 한국전 참전, 백화운동,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중·미 수교, 문호 개방, 천안문 사태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망라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부터 문화대혁명까지는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에 무척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스펜스 교수가 <현대 중국을 찾아서>를 집필할 당시엔 중국 현대사에 대해 공개된 정보가 많지 않아 <인민 3부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보량이 부족해 보인다. 그리고 <인민 3부작>에서 극히 부정적으로 기술된 대약진 운동과 문혁을 스펜스 교수는 다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이다. 프랑크 디쾨터가 중국 공산당에 대해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학계 비판을 감안하면, 이 책이 훨씬 먼저 쓰여졌지만 학문적으로 좀 더 정치된 역사서라 하겠다. <인민 3부작>은 읽으면서도 ‘이게 사실인가‘ 싶을 정도의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이 넘쳐나서, 마치 폴 존슨이 <지식인의 두 얼굴>에서 소위 좌파 지식인들의 사생활을 까발린 행태와 비슷한 불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초판이 미국에서 출판된 것은 1990년이었다.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게 1989년이었으니 역사학자로는 이례적으로 극히 최근의 사건까지 역사서에 담은 것이었다. 아직 객관적인 학계의 평가가 정립되지 않았을 때이지만, 스펜스 교수 스스로 중국사의 권위자로서의 책무를 저버릴 수 없었던 듯 하다. 천안문 사태를 짧지만 비판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사건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이 사건을 명 말의 농민 반란, 백련교도의 난, 의화단의 난 등과 등치시킴으로써 중국 현대사에서 민중들에게 가해진 압력이 어떤 방향으로 폭발해왔는지를 일깨운다. 사실 그의 모든 저서의 중심엔 역동하는 민중이 있었다.

중국 현대사를 개괄하기에 이 책만큼 적당한 게 없을 듯 하다. 주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전부 다루고 있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에 따라 기술되었다. 지나치게 학술적이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밸런스가 절묘한 역사서이기도 하다. 오래 되었지만 품위를 갖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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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김희교 옮김 / 이산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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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권위자인 조너선 D. 스펜스 교수의 초기작이다. 근 15년 쯤 전 그의 저작들을 열심히 읽던 시절이 있었는데, 당시 구입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가 이후에 집필한 작품들 대부분이 이 책에서 다루는 시대 - 명말청초부터 천안문까지 - 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 <현대 중국을 찾아서>는 스펜서 교수의 학문 여정에 대한 개괄서라 하겠다. 개괄서라서 그런지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천안문> 같은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재미는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요즘 진보진영의 중국 관계 전문 스피커로 유명해진 김희교 교수가 젊은 시절 - 이 책은 우리나라에선 1998년에 초판이 인쇄되었다 - 번역을 맡은 책인데, 막힘없이 술술 읽히도록 번역이 꽤 잘 되어 있다.

제목은 ‘현대 중국을 찾아서‘이지만 정작 책의 시작은 20세기 초가 아니라 명나라 말기부터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그 이유를 밝히는데, ‘그렇게 해야만 현재 중국의 문제들이 어떻게 발생했으며, 또 중국인들이 어떤 자원(지적·경제적·정서적)을 이용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는지를 최대한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근대 중국의 사건들을 되짚어 볼때 명말청초의 사건들이 소환되곤 한다. 저자의 이러한 시선은 현대 중국 공산당이 추구하는 노선이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게 중국의 과거 역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리라. 저자는 중국인들이 ‘현재에 대한 환멸과 과거에 대한 향수가 미래에 대한 열정적 희망과 결합되어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불확실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한‘ 사례로 1644년 청나라 수립, 1911년 신해혁명,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들며, 이 사건들을 통해 혼란스러운 현대 중국이 - 이 책은 천안문 사태 즈음에 쓰여졌다 - 앞으로 세계 속에서 어떻게 위치할 수 있을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의 1권은 명말부터 모택동의 대장정까지를 다룬다. 옛날 책이라 중국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눈에 띄지 않지만, 세계사 시간에 스쳐가듯 배웠던 이홍장, 증국번, 임칙서 등의 인물들의 활약상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서구의 열강들이 어떻게 중국을 침탈하려 했고, 청 왕조와 민중들은 어떻게 이를 극복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에너지의 응축과 분출은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의 열강들 간의 세력 균형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밝히는 대목은 국가와 지역을 기준으로 역사를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세계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가를 일깨워준다.

2권은 일본의 본격적인 만주 침략부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현대 중국의 완성이라 할만한 장면들이 숱하게 등장할 것이다. 저자가 이를 어떻게 풀어내고 해석할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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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처럼
김경욱 지음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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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다. 인생은 동화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꿈꾼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연애를.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동화는 대개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온 주인공들이 마침내 결혼하여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는다. 하지만 그들이 마주하게 될 결혼 이후의 삶은 보여주지 않는다. 결혼 뒤엔 지독히 ‘현실적인‘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고 있으니까. 인생은 행복한 한 순간의 토막이 아니라 수많은 연속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이다. ‘Happily ever after‘는 동화의 해피엔딩을 위한 환상일 뿐이다.

이 신세대적인 - 작품이 쓰여진 시기엔 칭찬이었을 수 있으나 십수년이 지난 지금은 낡아버린 감각 - 소설은 눈물의 여왕과 침묵의 왕이 각기 자기 시선에서 바라보는 동일한 동화 두 편으로 시작한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눈물이 끊이지 않았던 여왕은 나이팅게일이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선왕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여왕은 강을 마주 보고 말이 없는 이웃 나라 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여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은 이웃 나라 왕을 발견한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제 울어도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 마녀의 저주를 받아 태어날 때부터 말이 없던 왕은 종달새가 물어다 준 콩꼬투리를 먹고 어머니의 기일에 실성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다 궁전에서 쫓겨난다. 정처없이 도착한 땅에서 왕은 강을 마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웃 나라 여왕과 종종 마주친다. 어느 날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왕은 전쟁터에서 화살에 맞아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진다. 여왕이 흘린 눈물이 왕의 입술에 흘러들자 왕은 깨어나 그녀에게 말한다. ˝이젠 괜찮소.˝ 두 사람은 백성들의 축복 속에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대학 노래패에서 만난 신입생 장미와 명제. 장미는 눈물이 많고, 명제는 말이 없다. 서두의 동화 주인공 같은 그들은 사실 각기 다른 상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치대생 서정우와 화려한 한서영. 하지만 운명은 그들 네 명을 엇갈리게 하고 젊은 날의 가슴 떨림은 맺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1부. 2부에서는 본격적인 동화가 시작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장미와 명제는 어느 날 우연히 조우하고, 상대를 운명의 파트너라 확신하는 몇 가지 사건을 거쳐 결혼에 이르른다. 3부는 현실이다. 동화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의 단점에 실망하고, 실망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확신이 된다. 둘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고 헤어지지만 영원한 행복은 없듯이 영원한 미움도 없나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시간은 힘이 세지만 사랑도 힘이 세다.‘ 둘은 상대가 달라졌다는 - 맑고 깊어진 눈, 옹골차진 속 - 믿음에 다시 결합한다. 4부는 둘이 재혼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두 사람 모두 이혼 전보다 깊어졌으며 옹골차졌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둘은 변한 줄 알았지만 사실 그들의 근본적인 자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 내면의 아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상처받기 쉬운 어릴 적 자아는 서로를 못 견뎌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그래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다시 헤어진다. 두 번째 이혼 후 두 사람은 모종의 사건을 통해 각자의 미성숙함을 깨닫고 비로소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침묵 왕자는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되고 눈물 공주는 침묵이 불편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의 만남과 두 번의 헤어짐 끝에 드디어 저주가 깨진 것이다.

가볍게 읽을 수도, 깊게 분석할 수도 있는 묘한 소설이다. 젊은 날의 운명 같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과 전쟁‘스러운 오해와 갈등을 거쳐, 오은영 박사의 ‘결혼 지옥‘을 보는 듯한 치유와 화해의 길로 인도한다. 김경욱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로 쓰인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고, 장미와 명제의 챕터가 교차하며 같은 사건을 남녀 각각의 시각에서 보여주는 심리 소설 같기도 하다. 아니면 강유정 평론가가 지적했듯 ˝사랑이란 나를 비우는 지경임을 경험해 본 자들에게는 애틋한 성장소설로 읽힐 것이다.˝ 동화 같은 현실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동화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꾼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동화처럼>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어른아이들에게 필요한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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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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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알게 된 건 김영하 작가의 강연회에서였다. 이야기의 힘을 주제로 한 강연 중, 김영하 작가는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어딘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케 하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원제는 <The Adventure of Homo Fictus>라 윤색이 많이 가미된 번역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서두에서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 책은 거기서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기대했던 것과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이 책이 인간은 이야기를 왜 좋아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이 세계를 쌓아 올렸는지를 알려주리라 기대했다. 전자는 내가 기대한 바와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 저자는 스토리텔링의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나치가 독일 국민들을 지배하여 거대한 학살 기계를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치가 만들어낸 국가주의와 인종주의 스토리텔링의 힘 때문이었다. 21세기에 지구평평설이나 큐어넌 같은 극도로 비이성적인 음모론자들이 횡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건 바로 이야기가 갖는 ‘구슬림‘의 힘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평생 타인과 소통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타인의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구슬리기‘ 위해서라고. 심지어 나에게 하는 독백도 내 행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서로를 단단히 구슬려 마음을 영영 돌려놓는 수단 중에서 인류가 찾아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이야기에 매혹되어 불합리한 맹신에 빠지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도 수없이 목격한다. 물론 이야기가 우리를 좋은 방향으로 구슬려서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릇된 구슬림이 끼치는 폐해가 너무나 크다는 게 문제다. 우리는 이야기하는 동물, Homo Fictus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마치 도구처럼 사용한다. 같은 칼이라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멋진 요리가 탄생하기도,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가 ‘인류의 저주이자 축복, 질병이자 치 료제, 숙명이자 구원,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을 찾아서‘라고 이름붙여진 것이다.

플라톤은 이야기의 어두운 본성을 진작에 깨달았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구름>에서 삿된 궤변술의 달인으로 묘사되는 바람에 시민들에게 큰 반감을 사고 결국엔 독미나리차를 마시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그의 저작 <국가>에서 이야기꾼이 아닌 철인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꿈꾸었다. 그리고 시인을 최후의 1인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다. 국가의 권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서 이야기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야기의 힘은 고유한 매력 못지 않게 확산되는 속도에도 달려 있다. 20세기에 등장한 라디오, TV, 인터넷 등의 매스미디어는 이 속도를 급속히 끌어올렸다. 1994년의 르완다 대학살은 불과 100일 동안에 80만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후투족은 한 손에는 라디오를, 한 손에는 마체테를 들고 어제까지의 이웃, 동료, 친구였던 투치족을 살해했다.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방송이 송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보다 어둡고 끔찍한 이야기, 사악하고 어리석은 속삭임에 이끌리는가? 이를테면 음모론 같은 것들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밝은 이야기는 지루하지만, 어두운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이는 유튜브만 봐도 알 수 있다. 자극적인 사이버렉카 채널이 유익한 정보로 가득 찬 채널의 구독자 수를 압도한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를 쉽게 밀어낼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 더 힘있는 이야기가 진실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끝에서 그 적나라한 예시를 든다. 바로 트럼프의 당선이다. 대선 개표 당일까지도 힐러리 유력을 띄웠던 건, 다시 말해 트럼프가 과소평가된 건 언론들이 트럼프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뛰어난 이야기꾼이라는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초등학생 수준의 어휘로 이루어진 서투르기 짝이 없는 연설을 하지만, 지극히 원초적이고 명쾌한 이야기를 미국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들려주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우리가 암흑시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과학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이야기가 진실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데 트럼프만한 상징이 있을까. 트럼프는 과학을 무시한다. 코로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당과의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했다. 당장 이번 미 대선만 해도 별다른 서사 없이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했던 해리스를 암살의 총탄이 극적으로 비껴간 트럼프가 압도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는 이 탈진실의 시대를 이겨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과학이다. 과학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보게끔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과학이 권위를 되찾으려면 - 과학자들이 지구평평설 따위와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 진실을 말하는 제도, 즉 학계와 언론이 달라져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치적 성향이 왼쪽으로 극도로 치우쳐진 미국의 학계와 언론 지형이 만들어낸 불균형이 결국 학문과 언론에 대한 대중의 심각한 불신을 만들었고 음모론에 경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 책의 분석과는 다르게 트럼프의 재선은 단지 트럼프가 꾸며낸 서사 만이 아닌 미국 민주당의 국민의 보편 정서와 유리된 정책의 결과였다. 마찬가지로 학문과 언론의 편향된 이념 지형이 과학적 진실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는 저자의 결론에 쉬이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의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나라에선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대중의 극심한 반발이 있어야 했다. 과연 그랬나? 이 책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힘은 인정하지만, 이야기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진실이 다 덮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AI의 시대에 딥페이크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자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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