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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7월
평점 :
12·3 내란 이후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근 1년 가까이 목도하게 된다. 이 나라의 파워 엘리트라는 자들이 내란을 옹호한다던가, 내란을 일으킨 당의 대통령 후보가 40% 넘는 표를 차지한다던가, 멀쩡한 사람들이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는다던가. 제일 요상한 건 한 줌 웃음거리 같아 보이던 극우 세력이 점점 덩치를 키워간다는 것. 박근혜 탄핵 때 태극기부대랍시고 설치던 노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젊은이들이 서부지법을 습격하고 반공 혐중 시위를 벌이는 장면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따지고 보면 맥주홀 폭동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히틀러도 당시엔 연설을 잘할 뿐인 괴팍한 인간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럼 도대체 왜 이들은 극우의 논리에 빠져드는 걸까? 한국 기독교의 특수성 때문에? 일부 정치인들의 세대·성별 갈라치기에 설득당해서? 성과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이것만으로는 이들이 집단화되어 강한 폭력성을 내비치는 이유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투쟁이라는 인간 같지 않은 짓을 저지른 일베들은 그저 비뚤어진 조롱이 목적이었지,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세를 불려서 폭력을 휘두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을 읽으면 그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떠돌이 노동자로 일하면서 쓴 그의 첫 번째 책인 <맹신자들>은 프랑스혁명, 나치즘, 볼셰비즘 같은 대중운동의 본질을 설명하는 일종의 잠언집이다. 그에 따르면 대중운동이 주장하는 내용 그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주장이 불러일으키는 광신과 희망, 증오와 편협이 대중운동의 본질이다. 실제로 프랑스혁명과 나치즘, 볼셰비즘은 지향점이 극과 극이지만, 운동의 행태는 거의 유사하다. 단지 그 주장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들에게 줄 수 있다면 그 주장은 대중운동을 타고 폭발하게 된다.
윤석열의 내란은 그동안 공고하게만 여겨졌던,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수구기득권의 프로파간다를 박살내 버렸다. 자유를 부르짖고 멸공을 외치던 자가 내란을 일으켜 독재를 하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내란에 기득권이 동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땅의 소위 우파들이 설 자리는 한 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런 극도의 위기감, 우파가 멸망할 수 있다는 세기말적 공포감이 외려 ‘맹신자들‘을 생산한게 아닐까. 윤석열이 돌아와서 다시 대통령이 된다느니, 미국이 윤석열을 구출하고 이재명을 체포한다느니 하는 ‘윤어게인‘ 작자들의 믿음은 메시아 사상과 대단히 유사하다. 상당수의 대중운동은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는 에릭 호퍼의 통찰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지금의 시대에 절망감을 느낀 우파들은 한데 뭉쳐 개인이 아닌 집단의 뒤에 숨는다. 대중운동의 뒤에 숨으면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니 폭력성을 띄기 쉽다. 에릭 호퍼는 말한다. ˝나치 평당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극악 범죄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한 것도 순전한 허위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명령 복종의 의무를 짊어진 것은 중상당하고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결국 그들은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나치 운동에 가담한 것이 아니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을 옮겨 본다.
˝광신자는 그의 논리나 도덕 의식을 자극해봐야 그 대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타협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신봉하는 숭고한 대의의 중요성과 정당함을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갈등 없이 갑자기 열광적으로 다른 대의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에게 설득이란 없으며, 가능한 것은 오로지 전향 또는 개종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신봉하는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극우로 변절한 이들이 많다. 물론 돈과 권력을 좇아 돌아선 이들도 꽤 많겠지만, 에릭 호퍼의 말처럼 광신의 대상을 바꿨을 뿐인 이도 있을 터이다. 김문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