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빌 브라이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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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우리 나라에 번역되어 출간된 그의 책 대부분이 <빌 브라이슨의 ~>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것이 그의 인기를 방증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는 뭐라 딱히 정의하기 힘든 작가인데요. <거의 모든 것의 역사>처럼 과학사를 알기 쉽게 총정리하거나, <나를 부르는 숲>처럼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횡단기를 쓰거나,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처럼 미국 영어의 방대한 뿌리를 추적하기도 합니다. 그냥 논픽션 작가라고 해둘까요. 이 중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니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책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는 제목 그대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한 책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는 그의 명성에 비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별로 놀랍지도 않은 게, 그 시대는 아직 기록이 명확하게 남는 시대가 아니었거든요. 당대에 셰익스피어보다 유명했던 극작가들의 생애도 셰익스피어보다 오히려 덜 알려졌습니다. 그나마 집요하게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그의 생애를 감싸고 있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진 것이죠.

이 책의 쪽수가 20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것도 셰익스피어에 대해 알려진 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추적하지만, 대부분이 학자들의 추측을 소개하는 수준입니다.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한계겠지요. 하지만 빌 브라이슨 특유의 경쾌한 문장이 책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합니다.

이 책을 셰익스피어에 대한 진지한 평전이나 전기로 받아들이기 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입문서 정도로 보면 꽤나 재미있습니다. 분량도 적어서 별 부담 없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빌 브라이슨 책 치고는 번역이 굉장히 잘 되어 있습니다. 빌 브라이슨의 문장에 담긴 뉘앙스는 한국어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을 받는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그 정도로 재미있지는 않은데?`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죠. 지금까지 제가 읽어 본 빌 브라이슨 책 중 번역이 제대로 되었다고 느낀 건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이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도 추가해야 겠네요.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 셰익스피어의 부인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앤 해서웨이`랍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그 헐리웃 여배우의 이름과 같죠. 셰익스피어보다 무려 8살이나 연상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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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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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보다 미미여사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우는 미야베 미유키는 <화차>, <모방범>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일본 추리소설 작가입니다. <화차>는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된 바 있었죠. 우리와 달리 추리소설 장르가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미미여사는 사회파 작가로 분류됩니다. 추리소설의 장르적 특성상 트릭이나 반전을 작품의 핵심으로 잡는 작가가 많은데 반해, 사회파 작가는 작품에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으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화차>도 신용불량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한 여자를 추적하는 이야기이죠. 하지만 저는 재미있어야할 추리소설에서까지 노골적인 교훈적 메시지를 읽는 게 탐탁치 않았고, 미미여사의 작품들이 대체로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향이 있어 이 양반의 작품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 <얼간이>는 좀 다릅니다. 이 작품은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사회파 추리소설 장르 외에 미미여사는 이런 에도 시대물을 꾸준히 써왔다고 합니다. 사실 미미여사의 시대물은 저도 이번에 처음 읽어 봤는데요. 근데 이게 참 재미있습니다. 일단 에도 시대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뛰어납니다. 당시의 문물, 복식, 인물들의 감정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소설이라기 보다 한 권의 에도 시대 미시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잘 정제된 문장이 마치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을 읽는 듯 합니다. 추리소설인데도 참으로 담담하고 넘치지 않으면서도 개개인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잘 되어 있습니다.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한 것도 마음에 들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품의 분위기가 추리소설 답지 않게 굉장히 따뜻합니다. `전원일기`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내용을 대충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배경
- 텟핀 나가야
: 나가야는 에도 시대의 연립 주택입니다. 보통 돈많은 상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십수 가구의 세입자들이 살고 있죠. 대체로 나이많은 관리인이 한 명 상주하면서 세입자들을 관리합니다. 텟핀 나가야는 그러한 나가야 중 하나인 거죠. 텟핀은 철병(鐵甁), 즉 쇠로 된 병으로 이 나가야를 지을 때 우물에서 녹슨 쇳병 두 개가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주요 등장 인물
- 헤이시로
: 주인공. 에도 시대의 하급 무사로 텟핀 나가야가 속한 지역의 치안 및 순찰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동네 파출소장? 느긋하고 매사 적당히 사는 만만디형 인물.

- 오토쿠
: 텟핀 나가야의 고참 세입자 과부. 맛있기로 소문난 조림 가게를 운영합니다. 괄괄하지만 속정 깊은 인물.

- 규베
: 10년 동안 텟핀 나가야를 관리해온 관리인. 주인 소에몬에게 지극한 충성심을 갖고 있죠.

- 사키치
: 규베의 후임으로 온 젊은 관리인. 소에몬의 먼 친척. 나가야의 관리인은 꽤 중요한 직책이라 보통 50대 후반 이상의 남자가 맡는 게 관례인데, 20대의 젊은 사키치가 파격적으로 관리인이 되었기에 주민들이 동요하게 됩니다. 지극히 성실한 남자.

- 소에몬
: 지역의 거부(巨富). 미나토 상회를 운영하며 텟핀 나가야의 소유자. 지역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 유미노스케
: 주인공 헤이시로의 처조카. 빼어난 외모를 가진 미소년...이라기 보다 꼬마. 사물을 측량하는데 천재적인 재주를 갖고 있습니다.


○ 줄거리

어느 깊은 밤, 텟핀 나가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채소가게 남매 중 오빠 다스케가 살해된 것입니다. 관리인 규베는 자기에게 원한을 가진 인물이 경고삼아 다스케를 해친 것이라며, 자신이 있으면 다른 주민들에게도 해가 되니 떠나겠다고 합니다. 규베가 떠난 후, 소에몬은 그 후임으로 자신의 먼 친척 사키치를 보냅니다. 텟핀 나가야의 주민들, 특히 과부 오토쿠는 젊은 관리인을 믿을 수 없다며 크게 반발합니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 이후 평온한 나날이 계속되는 듯 보입니다. 주인공 헤이시로는 매일 텟핀 나가야가 있는 혼조 후카가와 지역을 순시하지만, 자잘한 사건 외에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주민들 간의 사소한 다툼이라던가, 미아가 발생했다던가, 노름빚 때문에 고생한다던가, 괴상한 신앙에 빠진 가족이 나타난다던가 하는 등의 일이죠. 그래서 여기까지 읽다보면 그냥 자잘한 에피소드를 모아둔 연작소설집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에피소드를 다룬 챕터마다 2~30페이지 밖에 안 되니까요.

그러다 갑자기 이 책의 80% 가량의 분량을 차지하는 챕터가 등장합니다. 앞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깔아둔 떡밥이 본격적으로 작동되는 것이죠. 자잘한 에피소드들이지만, 에피소드의 끝엔 반드시 텟핀 나가야의 세입자들이 그 사건 때문에 한 집, 두 집씩 이사를 나가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게요. 사키치는 자기가 관리인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 그렇다고 자책하지만, 주인공 헤이시로는 이 모습을 보고 문득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에도 시대엔 평민들의 이주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다른 나가야로 이사가려고 해도 원래 살던 나가야 관리인의 추천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다들 이사를 쉽게 나갈까. 뒤에 뭔가 큰 손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 뭔가가 진행되고 있는게 아닐까.

의문을 가진 헤이시로는 똑똑한 꼬마 미소년 유미노스케와 함께 실마리를 풀어보려 합니다. 유미노스케는 후사가 없는 헤이시로 부부가 양자로 들일 생각을 갖고 있는, 헤이시로의 처조카입니다. 그들은 앞에서 벌어진 사건사건마다 텟핀 나가야의 주인, 소에몬과 그가 운영하는 미나토 상회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추리를 해나갑니다. 이 과정의 끝에서 그들은 수십년의 질투와 치정이 얽힌 뜻밖의 진실을 만나게 됩니다.


추리 소설이니 만큼 내용을 말씀드리는 건 이 정도로 마치려 합니다. 살짝 귀뜸을 해드리자면 결말이 생각보다 싱겁다는 건데요. 이건 미미여사의 약점 같아요. 제가 읽어본 다른 작품들도 그런 경향이 좀 있거든요. 그리고 이 작품에 바로 이어지는 후속작이 있다고 하니 아마 거기서 이야기가 더 진행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 <얼간이>를 아주 재미있게 읽어서 어제 바로 후속작을 주문했으니, 다 읽고 서평을 올리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 <얼간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실없고 느긋한 주인공 헤이시로를 지칭하는 것인지, 숨겨진 사건의 진실을 모른 채 평온히 살아가는 주민들을 일컫는 것인지. 다만 작품 중간에 이런 식의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 `바보같아 보이지만 사물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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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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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출판사 이산의 책이라 낼름 구매한 <쾌락의 혼돈>. 이산 출판사는 중국 역사 전문 출판사로 꽤 양질의 번역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이 책도 제 구매 리스트에 올라 한꺼번에 산 책 중 하나죠.

제목이 `쾌락의 혼돈`이라 뭔가 관능적인 내용을 기대하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 거랑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부제 그대로 명나라의 상업과 문화에 대해 고찰하는 책입니다. 엄청나게 지루합니다. 제가 웬만하면 역사책은 재미있게 읽는데도 이 책은 꽤나 읽기 힘들더라구요. 명나라에서 상업이 꽃피게 되는 과정, 그에 대한 신사층의 혐오에 가까운 부정적인 반응, 하지만 상업의 번창으로 인해 오히려 신사층의 지배력이 공고해지는 아이러니를 저자는 이 책에서 풀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조그만 지방의 현지(우리로 치면 구청연감 정도 될 자료)가 등장하고, 그 지방의 관리가 등장하고, 또 그 지방의 유학자가 등장하고, 상인이 등장하고... 너무나 소소한 내용이 지리하게 그리고 방대하게 펼쳐져서 `대체 내가 읽고 있는 내용이 뭔가`라는 생각과 함께 이리저리 표류하게 됩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역사서라기 보다 `조금 쉽게 쓴 학술논문`에 가까운 책이라는 느낌입니다. 그러다보니 읽는데도 한참 걸렸고, 읽고 나서도 별다르게 남는 게 없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 가치관에 충격을 주는 책을 가장 높이 치고, 그 다음으로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책, 그도 아니면 재미라도 있는 책을 가치있게 여깁니다. 근래에 제 가치관에 충격을 줬던 책으로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정도가 있겠네요. 하지만 이 <쾌락의 혼돈>은 얻을 것도 없고 재미도 없으면서 읽는데 오래 걸린,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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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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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풀하우스>를 보고 어떤 게 연상되시나요? 포커의 패? 송혜교와 비가 주연한 드라마?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서문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강력한 포커의 패라는 의미로 풀하우스를 차용했다고 밝히지만, 책을 읽다보면 풀하우스가 지구의 생명 시스템 전체를 일컫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와 쌍벽을 이루는, 진화생물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입니다. 도킨스와 더불어 진화론에 대한 대중서를 많이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도킨스는 `초다윈주의(Hyper-darwinism)` 학자로 분류되는데, 생물의 모든 진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연 선택에 의해 엄청나게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진화의 핵심이 유전자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죠.

반면 굴드는 `단속평형설`을 주장합니다. 단속평형설이란 생물 종의 진화는 오랜 기간 안정된 상태로 큰 변화가 없다가 특정한 변화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는 이론이죠. 이것 때문에 굴드와 도킨스는 엄청나게 논쟁을 했었습니다. 굴드가 2002년 폐암으로 급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논쟁이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지만요.

이 두 사람의 이론적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는데, 사실 이 <풀하우스>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사게 된 건 2년 쯤 전 도킨스의 또 다른 책 <눈먼 시계공>을 읽다가 도킨스가 챕터 하나를 할애하여 굴드를 신나게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굴드를 전혀 모를 때라 도킨스가 대체 왜 이렇게 굴드를 잘근잘근 씹어대는지 궁금했거든요. 좀 찾아보니 굴드는 급진적 성향을 가진 과학자라 진화학계에서 꽤나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폐암을 앓기 십 수년 전, 복부중피종이라는 희귀한 암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했을 때도 `저거 쇼 하는 거 아냐?`라고 고깝게 보는 학자들이 있었을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굴드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 소위 빅 네임(Big Name)이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굴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한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굴드는 진화가 곧 진보라는 명제를 거부합니다. 도킨스는 진화가 몇 백, 몇 천만년 동안 단순한 개체에서 복잡한 개체로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눈은 엄청나게 정밀한 기관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성, 스위스 시계보다 더한 정밀성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중세 신학자들은 이러한 복잡한 기관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 여겼습니다.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관이 생겼겠냐는 거죠. 하지만 도킨스는 천문학적인 시간에 걸쳐 수 십만 세대를 지나면 자연 선택의 압력 때문에 환경에 맞게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복잡한 기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곧 진화가 진보라는 함의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죠.

하지만 굴드는 `진화가 곧 진보를 뜻한다면 박테리아 같은 생물은 왜 아직도 존재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박테리아는 이 지구상 어떤 생물보다도 먼저 태어났고, 지금도 다른 어떤 생물보다 많습니다. 생물량이라고, 생물 집단 개체수가 아닌, 전체 무게의 합으로 생물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무가 지구상에서 가장 생물량이 큰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박테리아의 생물량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박테리아인 것이죠.

굴드가 진보를 거부하는 것은 진화의 최종 정점에 인류가 서 있다는 오만함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인류가 등장하기 위해 생명이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인류의 등장은 단지 기막힌 우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쥬라기로 되돌려 다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 인류가 생겨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단순한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물 다양성이 증가됨에 따라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굴드가 이토록 진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진화가 곧 진보라고 진화론이 잘못 해석되고 사회과학과 그릇되게 결합하여 과거 나치가 행했던 인종말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윤리의식이 결여된 기술개발이 이루어지는 걸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굴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적 기법과 생물학적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현대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이 기법을 통해 설명하여 신뢰도를 높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진화에는 진보가 전혀 없다는 그의 주장에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이 진화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개별 종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는 것은 변화의 압력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진보해 나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는 한 최대한 쉽게 써 보려 했는데, 오히려 어려운 서평이 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이 책이 대중 과학서로 쓰여지긴 했지만, 진화론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야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설명해 드리기가 쉽지 않네요. 진화론은 간단한 몇 가지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론이지만,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각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기도 하구요. 그렇기에 진화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굴드나 도킨스의 저작 한 권 쯤 읽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진화론이 그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크게 잘못 알고 계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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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 인류학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속담으로 세상 읽기 지식여행자 14
요네하라 마리 지음, 한승동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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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의 이번 에세이의 주제는 속담입니다.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 보았을 속담집은 속담과 그 뜻을 나열하고 거기서 얻는 교훈을 살펴보는 형태로 되어 있었죠. 이 책은 조금 다릅니다. 스물 아홉 개의 챕터로 되어 있는데요. 챕터의 양식이 일정합니다. 일단 예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왔을 법한 꽁트(근데 이게 좀 강도가 셉니다. 음담패설까지는 아닌데 부부 사이의 외도 같은 은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를 한 꼭지 보여주고, 그에 걸맞는 요네하라 마리가 수집해온 세계 각국의 속담을 펼쳐놓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중국, 일본이나 유럽의 속담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남미, 중앙아시아, 중동 각국의 속담, 심지어는 동남아 소수민족의 속담까지 엄청난 분량의 속담들을 보여줍니다. 물론 한국의 속담도 나오죠. 하지만 단지 보여주는데에서 그치지 않고 속담의 기원을 추적하여 그리스 고전이나 셰익스피어 작품까지 파고 들어가는 걸 보면 경탄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지는 진가는 이 다음에 나타납니다. 한 편의 콩트를 보여주고, 이에 관련된 속담을 늘어놓은 후, 갑자기 시사 평론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아니, 시사평론이라기보다는 `부시와 고이즈미 신나게 까기`라고나 할까요. 에세이를 잡지에 연재하던 당시, 부시가 대테러전쟁을 선포하고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내놓으라며 쳐들어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고이즈미는 미국에 딱 달라붙어 굽신거리며 미국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굴욕적 외교를 벌이고 있었죠. 요네하라 마리는 스물 아홉 개 챕터 대부분에서 이 둘을 맹렬히 비판합니다. 부시는 미 대통령 자격 미달인 저능아, 고이즈미는 부시의 애완견이자 매국노라고 읽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할 지경으로 독설을 내뿜습니다. 대단한 기백을 가진 여장부죠.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부시가 그 원숭이 같은 얼굴이 붉어지도록 열을 올리며 후세인을 힐난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볼 때마다 `뒤가 구린 자일수록 의심이 많다`라는 이탈리아 속담을 떠올린다. 그 다음 순간 과연 부시의 뇌수에서 ‘뒤가 구리다’와 같은 고등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긴 하지만.˝

˝그런 일본을 ‘개’나 ‘바둑이’라고 멸시하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건 실례다. 개에게 말이다. 개는 무력하고 제구실 못 하는 주인에게조차 평생 충성하지만 일본이 몸과 마음을 바쳐 받들어 모시는 건 어디까지나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 이왕 기댈 양이면 힘센 자에게 기대야 할 것 아닌가. 도와달라고 구걸할 때도 이왕이면 힘센 자한테서 더 크고 안전한 도움을 받는 게 영리한 거다. 원래 `이왕 기댈 바엔 큰 나무 밑이 안전하다`는 건 그런 처세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단순한 충견만으로는 안 된다. `개가 될 양이면 부잣집 개가 되어라` 하는 거다.˝


요네하라 마리의 아버지는 일본 공산당의 핵심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요네하라 마리가 어린 시절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수학한 것도 일본 공산당에서 아버지를 프라하로 파견 보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요네하라 마리도 일본 사회의 경직된 정치·경제·문화에 대단히 비판적입니다. 하지만 비판 속에도 적절한 유머와 조크를 섞어 독자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는 그녀의 글재주는 경탄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연속으로 요네하라 마리의 책 세 권을 읽고 서평을 썼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속담 인류학>이 그 중 제일 괜찮았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면서도 다시금 생각을 곱씹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책입니다.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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