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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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 <풀하우스>를 보고 어떤 게 연상되시나요? 포커의 패? 송혜교와 비가 주연한 드라마?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서문에서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강력한 포커의 패라는 의미로 풀하우스를 차용했다고 밝히지만, 책을 읽다보면 풀하우스가 지구의 생명 시스템 전체를 일컫는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와 쌍벽을 이루는, 진화생물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입니다. 도킨스와 더불어 진화론에 대한 대중서를 많이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도킨스는 `초다윈주의(Hyper-darwinism)` 학자로 분류되는데, 생물의 모든 진화는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연 선택에 의해 엄청나게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진화의 핵심이 유전자라고 말합니다. 극단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죠.

반면 굴드는 `단속평형설`을 주장합니다. 단속평형설이란 생물 종의 진화는 오랜 기간 안정된 상태로 큰 변화가 없다가 특정한 변화의 시기에 폭발적으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이론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는 이론이죠. 이것 때문에 굴드와 도킨스는 엄청나게 논쟁을 했었습니다. 굴드가 2002년 폐암으로 급작스레 사망하는 바람에 논쟁이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지만요.

이 두 사람의 이론적 배경을 간단히 설명했는데, 사실 이 <풀하우스>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이 책을 사게 된 건 2년 쯤 전 도킨스의 또 다른 책 <눈먼 시계공>을 읽다가 도킨스가 챕터 하나를 할애하여 굴드를 신나게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굴드를 전혀 모를 때라 도킨스가 대체 왜 이렇게 굴드를 잘근잘근 씹어대는지 궁금했거든요. 좀 찾아보니 굴드는 급진적 성향을 가진 과학자라 진화학계에서 꽤나 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폐암을 앓기 십 수년 전, 복부중피종이라는 희귀한 암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했을 때도 `저거 쇼 하는 거 아냐?`라고 고깝게 보는 학자들이 있었을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굴드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긴 학자, 소위 빅 네임(Big Name)이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굴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한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굴드는 진화가 곧 진보라는 명제를 거부합니다. 도킨스는 진화가 몇 백, 몇 천만년 동안 단순한 개체에서 복잡한 개체로 발전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눈은 엄청나게 정밀한 기관입니다. 자연 상태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성, 스위스 시계보다 더한 정밀성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중세 신학자들은 이러한 복잡한 기관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라 여겼습니다.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관이 생겼겠냐는 거죠. 하지만 도킨스는 천문학적인 시간에 걸쳐 수 십만 세대를 지나면 자연 선택의 압력 때문에 환경에 맞게 점진적으로 진화하여 복잡한 기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건 곧 진화가 진보라는 함의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죠.

하지만 굴드는 `진화가 곧 진보를 뜻한다면 박테리아 같은 생물은 왜 아직도 존재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박테리아는 이 지구상 어떤 생물보다도 먼저 태어났고, 지금도 다른 어떤 생물보다 많습니다. 생물량이라고, 생물 집단 개체수가 아닌, 전체 무게의 합으로 생물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무가 지구상에서 가장 생물량이 큰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는 박테리아의 생물량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박테리아인 것이죠.

굴드가 진보를 거부하는 것은 진화의 최종 정점에 인류가 서 있다는 오만함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인류가 등장하기 위해 생명이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는 거죠. 인류의 등장은 단지 기막힌 우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쥬라기로 되돌려 다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 인류가 생겨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단순한 생명체에서 고등한 생명체로 진화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물 다양성이 증가됨에 따라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굴드가 이토록 진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은, 진화가 곧 진보라고 진화론이 잘못 해석되고 사회과학과 그릇되게 결합하여 과거 나치가 행했던 인종말살과 같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거나 윤리의식이 결여된 기술개발이 이루어지는 걸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굴드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통계적 기법과 생물학적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현대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이 기법을 통해 설명하여 신뢰도를 높이기도 하구요.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진화에는 진보가 전혀 없다는 그의 주장에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인간이 진화의 최정점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개별 종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하는 것은 변화의 압력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진보해 나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아는 한 최대한 쉽게 써 보려 했는데, 오히려 어려운 서평이 된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이 책이 대중 과학서로 쓰여지긴 했지만, 진화론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어야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설명해 드리기가 쉽지 않네요. 진화론은 간단한 몇 가지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이론이지만,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론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각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이기도 하구요. 그렇기에 진화론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굴드나 도킨스의 저작 한 권 쯤 읽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진화론이 그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단순한 약육강식의 법칙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크게 잘못 알고 계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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