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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평점 :
독일의 소설가인 저자는 친한 DJ에게서 나치가 약물에 절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5년간 독일과 미국 기록물 보관소에서 관련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후 이 책을 냈다. 오늘날 마약으로 분류되는 약물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히틀러 뿐 아니라 나치 고위층들과 병사들이 어떻게 약물에 중독되었는지 밝힌다.
책은 4장으로 되어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해부터 12년이 지나 1945년 독일의 패전까지를 전쟁과 마약 사용의 진행과정을 설명한다. 1장 국민마약, 메스암페타민(1933-38), 2장 전격전은 메스암페타민 전쟁이다(1939-41), 3장 하이 히틀러-환자A와 주치의(1941-44), 4장 마지막 탐닉-피와 마약(1944-45)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앞부분에서 저자는 템러 공장을 방문한 사진을 올린다. 템러 공장은 이 책을 관통하는 메스암페타민의 합성제인 <페르비틴>을 생산하던 곳이다. 폐허가 된 사진을 책을 다 읽고 보니 끔찍하다. 이 템러사의 각성제 <페르비틴>은 1930년대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만병통치약으로 인식되다가 1941년 마약법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1945년 공장이 파괴될 때까지 페르비틴은 장교와 병사들에게 공공연하게 제공된다.
독일의 상황을 보면, 이미 1897년 독일의 바이엘사는 아스피린과 헤로인을 생산하고, 헤로인이 처방전없이도 마구 팔리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 후 1920년대에는 폐허가 된 현실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약을 하는데, 지금도 유명한 제약회사 메르크(머크), 베링거, 크놀은 코카인과 아편을 생산하고 글로벌 딜러가 된다. 히틀러는 커피는 물론 담배까지 금하는 금욕주의자의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하며, 1933년 강력한 마약금지법을 발효한다. 나아가 1935년에는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고, 아리아인과는 다른 이질적인 유대인을 마약과 함께 제거되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반유대정책도 펼친다.
전쟁터로 가보자. 독일의 서부전선에서의 승리는 페르비틴의 승리라고 불린다. 구데리안의 전격전은 병사들이 17일간 잠을 자지도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전진해서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까지 단숨에 점령한 것을 말한다. 이때 장교와 병사들은 페르비틴을 복용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작전명령이 먹히지 않는 이러한 행군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2인자 괴링과 함께 됭케르크에서 중지명령을 내린다. 연합군들은 이 때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또다시 괴링의 영국 공격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시행하지만 연속 실패로 끝난다. 동부전선은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히틀러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되었고, 스탈린에 밀려 폐색이 짙어진 상태에서 페르비틴은 장교와 병사들이 버티고 탈출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약의 부작용은 정신병인데 집단 정신병이 발생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복용량을 늘렸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무서운 일이다.
히틀러의 판단 미스는 왜 일어난 것일까? 1941년 이후 히틀러는 마약성분에 중독되며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두 가지 사건이 그를 중독으로 내몰았는데, 급성이질 치료와 암살폭발 시도이다. 1941년 이질에 걸린 히틀러를 치료하기 위해 주치의 모렐은 지나친 약물을 투여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많은 약물을 첨가하며, 매일 80여종의 다중약물을 히틀러에게 투입하였다. 주치의가 만든 약물은 비타물틴과 마취제 오이코달(코카인과 모르핀을 혼합한 마약성 진통제), 동물에게서 체취한 정체모를 성분의 제재로 이루어졌다. 또한, 1944년 폭탄 암살시도로 귀를 다친 히틀러는 이비인후과 의사로부터 코카인을 처방받는다. 문제는 두 의사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으므로 히틀러는 주치의가 주는 마취제 오이코달과 이비인후과 의사가 주는 각성제 코카인을 동시에 투약받음으로써 기존보다 심각한 중독의 길을 가게되며 결국 자멸한다.
저자는 히틀러의 주치의가 히틀러를 약에 중독되게 한 점과, 히틀러를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챙긴 점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러나, 히틀러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심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그렇게 많은 마약을 스스로 복용한 것(273)"이라는 말을 통해 모든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다고 말한다. 히틀러는 결국 자살하는데, 전쟁에 패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약을 공급해 줄 공장이 파괴되어서 금단증상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이라는 추론이 일리있어 보인다.
그러면 전쟁에서 약을 사용한 것은 독일만인가? 영국군 역시 병사들에게 약을 사용하였고, 전후 미국이 독일의 마약 연구와 관련한 '메스칼린' 연구를 진행시켜 한국전쟁에서 소련 스파이의 입을 열게 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니 전쟁에 참여한 모든 나라가 광란의 상태와 같다는 생각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전쟁은 무서운 것이다.
근래에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은 책이다. 전쟁과 마약을 연결지어 생각해보게 한 아주 쇼킹한 책이다. 무엇보다 아주 건실하고 착실한 이미지의 독일이 과거 두려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전쟁으로 얼마나 무고한 사람들이 이용당하고 죽임당하게 되는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