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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체 - 개정판
이규진 지음 / 하다(HadA) / 2018년 10월
평점 :
솔직히 이 책의 제목인 파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파체(破涕)는 한자로 깨트릴 파와 눈물 체 자를 써서 직역하면 “눈물을 거둬라”라는 뜻입니다. 소설 중에서는 "눈물을 거두란 뜻이다. 슬픔을 끝내고 기쁨을 얻으란 뜻이니 내 오늘 너로 인하여 그 말의 뜻을 알겠다."라고 그 의미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어로 파체(Pace)는 "평화"를 뜻하는 말로 “평화를 주소서”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소설 중에서는 "먼 데 나라 말로 그것은 평화를 부르는 말이라 하옵니다. 그 나라 백성들은 마음이 곤고할 때 하늘을 우러러, 우리에게 평화를 주옵소서, 하고 아뢴다 하나이다."로 그 의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목을 주제로 삼아 이 소설은 이 시대 백성과 더불어 내내 복되고 평화롭기를 갈망했던 18세기 후반 조선시대 정조대왕 이산과 그 과정에서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사랑과 상처 그리고 서학이란 신문물이 몰고 온 운명적 사건들을 당시의 노론과의 대립 등과 함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최대 국책사업인 수원화성 축성을 무대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을 쌓아가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우정이 씨줄을 이루고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과 그 팍팍한 대지를 파고드는 서학의 물결이 만들어 낸 문명적 만남이 날줄을 이루어서 독특하면서도 감동적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숱한 문학과 예술의 태를 빌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정조대왕 이산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남인서얼 출신이라는 한계에 좌절하던 청춘 김태윤과 왕실 호위무관이자 조선 최고 무인가문의 후계자인 차정빈 그리고 천주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아름다운 소년 이유겸이 주인공입니다.
소설은 왕과 태윤, 그리고 정빈과 유겸을 중심으로 화성 축성과 화성유수부의 번성, 그리고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노론과의 치열한 대립 등을 그려지는데 이야기의 큰 흐름을 쥐고 있으면서, 유겸과 태윤 그리고 정조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일관되게 묶어놓는 요소가 바로 ‘천주학’입니다. 태윤은 입신하기 전 자신의 재능을 알아챈 상단의 대행수 자운향을 통해 숱한 서적을 탐독하다 ‘서학’을 접하고 감화된 인물이며, 유겸은 태생적으로 천주교인의 집안에서 자랐고 사제가 되는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정조는 천주교의 인본주의와 서구의 과학 기술에 깊은 관심을 두며 태윤의 지식적 성향을 묵인하며 정빈은 이 모든 걸 알면서 왕을 보필하고 유겸을 돌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김태윤이 화성 설계 당시 성 곳곳에 숨겨둔 것으로 묘사되는 여러 종교적 상징인데, 화성의 주요 시설 가운데 홍수 조절을 담당하는 북수문인 ‘화홍문’의 수문이 7개인 이유는 천주교의 7가지 성사(일생을 살면서 교인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7가지 의례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또 수문의 형상이 무지개를 닮은 이유는 구약성경의 일대 사건인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벌하지 않겠다는 징표로 무지개를 띄워 보여준 데서 비롯된다고 하며 역시 방화수류정의 정자 누각이 십자로 된 것, 정자 아래와 주춧돌 사이 벽돌에 86개의 십자형 무늬를 새긴 것 등에도 천주교의 교리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솔직히 이러한 사실들은 작가의 추측이고 소설적인 사실일 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사실적으로 쓰여 있어서 실제 화성을 찾아가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해 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성은 정조대왕의 염원이 담긴 성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과학지식과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건축과 비용 개념이 총동원된 하나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읽으면서 화성에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