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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평점 :
먼저 이 책은 좋아할 만한 사람만 좋아할 책임을 밝힌다. 책을 읽기는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고 책읽기가 재미있지도 않은 사람, 가끔 책을 읽는 사람, 이제 책을 막 읽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대신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책읽기가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람, 책읽기 경력이 중급 이상 되는 사람에게는 분명 재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자의 사람들이 읽다 보면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에서도 후자의 사람들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내가 그랬다. '어머, 어머, 나랑 똑같아.' 물개박수칠 뻔 했으니까.
원제 Ex Libiris는 책 소유자의 이름이나 문장을 넣어 책표지 안쪽에 붙이는 장서표라는 뜻의 라틴어로, 그 책의 소장자를 지칭할 때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Ex Libiris Livius라고 하면 '리비우스가 소장한 책에서'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정혜윤씨의 책 [침대와 책]만큼 관능적인 제목(주관적 견해다)인 [서재 결혼 시키기]는 이 책에 실린 열여덟 편의 에세이 중에서 첫 번째인 '책의 결혼'에서 따온 걸로 보인다. 작가인 앤이 남편인 조지와 함께 산 지 6년, 결혼한 지 5년 만에 두 사람의 책을 한데 섞기로 결심한 후 그 과정을 정리한 에세이인데 아주 가관이다. 책을 어떻게 정리할 지를 고민하고(결국 앤의 승리였는데 주제별로 나눈 후 다시 연대별로 나눈다), 두 사람이 소유한 책이 겹칠 경우 어떤 판본을 보관할 것인지 논쟁하며 혹시나 둘이 헤어질 경우 정리한 나머지 한 권이 후회되지 않을까 잠깐 고민한다. 선물 받은 책은 별도의 책장을 이용해 정리하기까지 한다.
이 대단한 가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먼저 패디먼 가족부터 살펴 보자. 아버지, 어머니, 오빠 킴, 여동생 앤으로 구성된 패디먼 가족은 메뉴판을 보며 틀린 글자를 집어내고, 모였다 하면 함께 퀴즈쇼를 보며 문제를 푼다. 아버지 패디먼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도 틀린 곳을 찾아 여백을 아름다운 교정 부호들로 장식해 돌려주고, 딸 패디먼은 케이크 주문 양식을 낚아채 철자를 고쳐준다. 심지어 앤의 딸 수재너에게서도 특성은 희석되지 않아 겨우 두 살 반일 때 아빠의 말에서 교열자 기질을 발휘했다.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유일하게 두 번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1974년 도요타 코롤라 안내서를 읽고, 새로운 걸 배울 수 있기에 카탈로그 독서를 즐기는 아내 앤의 남편답게 조지도 제법 한다. 아내의 생일 선물로 헌 책 9Kg을 선물했으니까. 심지어 [진정한 여성의 미덕]이라는 오래된 책에 등장한 미덕 목록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아내가 내밀었을 때 남편은 10점 만점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줬다. 달래고 어르는 힘 6, 유행 외면 10, 집안 정돈 5 식으로 말이다.
우리에게 책의 말은 거룩하지만, 그 말을 담고 있는 종이, 천, 판지, 풀, 실, 잉크는 단순한 그릇이었으며, 그것을 원하는 대로 필요한 대로 무람없이 다루는 것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험하게 다루는 것이 불경의 표시가 아니라 친밀함의 표시였다(64쪽)
"전자 제품에 비유하자면,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는 것은 '멈춤' 단추를 누르는 것이고, 책을 펼친 채로 엎어 놓는 것은 '일시 중지' 단추를 누르는 것이지(66쪽)"
- '너덜너덜한 겉모습' 중에서
패디먼 가족들 외에도 지독한 이들의 이야기가 책에 가득하다. 자신의 헌사가 적힌 책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그 책을 사서 그 사람에게 다시 보내면서 헌사를 덧붙인 조니 버나드 쇼, 마을의 도서관에 자신의 책 2만 권을 기증하며 그것을 외바퀴 손수레로 옮겨 직접 다 꽂아 정리한 글래드스턴, 장정의 색이 바랜다는 이유로 해가 질 때까지 부인이 블라인드도 올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아끼는 책은 적어도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책장을 넘기는 고통을 면하게 해 준 클라크 등은 일부일 뿐이다.
만약 이 책을 읽고 나처럼 물개박수를 마구 쳤다면 당신도 나와 마찬가지로 패디먼 가족들과 동류다. 고백하자면 나도 패디먼 가족처럼 어디서건 오자를 발견해낸다. 절대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도 아니고, 우리 가족 중에 이런 버릇이 있는 사람도 나 혼자다. 이걸 나는 '전공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