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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이장희 글.그림 / 지식노마드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는 도시 공학을 전공했다. 뉴욕에서 일러스트도 공부했다. 각종 매체에 일러스트와 사진, 칼럼 등을 기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풍경과 함께 한 스케치 여행 - 뉴욕],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로 만나다]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이장희다.
그런 그가 이번엔 서울의 시간을 쓰고 그렸다. 경복궁을 시작으로 명동, 수진궁, 효자동, 광화문 광장, 종로, 청계천, 우정총국, 정동, 혜화동, 숭례문, 경교장, 딜쿠샤, 인사동, 총 열 네 곳이다. 작고 빽빽한 글씨, 섬세한 스케치, 스케치 마다 붙은 설명은 더 깨알같고 많아서 방 불빛이 어두우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친절하게 매 장마다 지도까지 그려두었다. 그렇다고 분량이 적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392쪽이나 된다. 밤잠은 몰라도 낮잠 정도 잘 때는 벼개 대신 머리 밑에 깔고 누워도 될 두께다.
그런데 이 책, 재미있다. 내가 알면서도 또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서울 구석구석이 새롭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얼마나 와 닿던지. 첫 장부터 그랬다. 경복궁 말이다. 몇 년 전에 지인들과 경복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내가 다녀온 경복궁이 이 경복궁이 맞나, 난 도대체 뭘 보고 왔나 싶을 정도였다. 난 그때 경복궁을 보고 온 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경복궁을 본 게 아닐까. 예를 들어 근정전 앞 바닥 쇠고리를 얘기해 보자. 나도 그때 근정적 앞에서 이 쇠고리를 보고 '도대체 이게 뭔가?' 싶었었다. 정말 생뚱맞은 위치에, 생뚱맞은 물건이었으니까. 돌 바닥에 저 혼자 뚝 떨어져 박힌 쇠고리리나. 일행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고개만 도리도리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비로소 답을 찾았다. 그 쇠고리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천막을 묶기 위한 고리였던 것이다. 다른 편 고리는 근정전 기둥에 있는데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면 두 기둥을 연결해 천막을 쳐서 햇볕을 가렸건 거지. 그렇게 깊은 뜻이. 재미있는 건 쇠로리의 위치로 짐작해 볼 때, 세 번째 품계석(신하들의 위치를 지정하는 돌을 품계석이라고 한다. 모두 24개인데 농경사회의 24절기를 상징한다고 한다)까지만 천막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3품까지는 뙤약볕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이하는 도리가 없었다는 말씀. 오호라, '출세하고 볼 일'이란 한탄은 그때에도 존재했겠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명동 편을 보면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다. 명동 밀리오레 앞에는 양초 형상을 한 작은 비석이 있다고 한다(난 그 앞을 지나간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주의를 가지고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추모비인데 의인 이근석을 기리는 것이라고. 1997년 3인조 소매치기단이 뒤쫓던 경찰을 회칼로 찌르자,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뜻에서 액세서리 행상을 하던 이근석이 뛰어나와 맞섰고, 칼에 복부를 맞아 사망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살신성인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그곳에 설마 그런 이야기가 숨겨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떤가? 내가 알던 서울이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나는 그랬다. 서울은 서울인데 내가 아는 서울이 아니더라. 언제가 이 책에 소개된 곳을 지나칠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아마 '내가 아는 서울'이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