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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삭제해 버린 페이지들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요. 그래서 원래대로 명확하게 재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반론, 즉 남자들에 대한 내 편견 때문에 내가 '건방지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훈계적이 된다고 한 지적은 내게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내가 그런 발언을 암시하는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아마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던 것 같지만, 명심해둘게요. 나는 결코 설교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데 동의합니다. 어쩌면 내게 무척 흥미로워 보이는 심리적 이유들 때문에 남성이 이 세상의 현재 상태에서 자신의 성별에 대해 별로 좋은 심판관이 못 되고 '창작품'이 그에게 '훈계'로 보일 수도 있나 봅니다. 책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인 듯한 방식을 내가 때로는 눈치 채고 있다는 당신 조언의 정당성을 인정해요. 이것과 맞서 싸우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내 잠재적 독자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요. 계속 써 나가면서 용기를 모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걸 적는 유일한 이유는 이게 내 견해를 대충이나마 대변하기 때문이에요. 나의 대담함이 나를 놀래킵니다. 내게는 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재능이 거의 없다고 느껴요. (32-33)


















재능이 거의 없다고 느꼈는데 계속 쓰셨네요, 언니, 와우. 

본받으리. 내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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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2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재는 정확히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내재적 교착이다.” (45-46)

“섹슈얼리티에 당황하는 원인은, 단순히 거기에 있는 어떤 것, 즉 섹슈얼리티가 보여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기에 없는 어떤 것 - 만일 그 어떤 것이 존재했다면 성이 실제로 무엇인지 결정하고 무엇이 성에 대해 ”성적“인지를 알려줄 어떤 것 - 이다. 성은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47-48)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한 프로이트-라캉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사회적 연계들(혹은 담론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연계들의 조건들을 좌우하는 비관계를 사유할 수 있는개념적 모델을 도입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저 유명한 슬로건, "성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를 재차 확인할 수 있고 그에 새롭고 더욱 급진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성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정치적 투쟁도 일어날 수 있는 존재의 한 영역으로서의 섹슈얼리티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이 말은 진정한 해방적 정치란 오직 위에서 언급한 "객체-탈지향 존재론"의 기반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 존재론은, 단순히 존재로서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존재에 출몰하고 존재에게 형식을 부여하는in-form 균열(실재, 적대)을 추구하는 존재론인 것이다.
다음에서 나는 우리가 이러한 주장에서 결정적인 것을 더욱 면밀히탐구하고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사례들을 들며 이것을 더욱 발전시키려고 한다. 그 사례로는 섹슈얼리티와 정치 사이에 있는 아주 특이한 만남에 대한 것인데, 바로 러시아 맑스주의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Andrei Platonov의 독창적인 글인 「안티-섹수스 The Anti-Secus」에 나오는 것이다. 이 글은 20세기의 해방적 정치논의의 중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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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9-25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탐구 재빨리 착수하셨습니까?ㅋㅋㅋ

Darein 2024-09-26 06:10   좋아요 0 | URL
허나 쉽지 않더라는
 



 



















에피쿠로스를 아는 순간 에피큐리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겼으나 막상 쉰 가까이 살아보니 그건 너무 나와 맞지 않는 인생 태도였다는 걸 새삼 깨닫고 에피큐리언이 될 수 없는 몸과 마음으로 에피큐리언이 되어보겠노라고 애쓴 시간이 아깝지는 않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이 에피큐리언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인지한 것이 3분 철학 1권을 읽은 가장 크나큰 소득이었다. 3분 철학 2권을 읽으면서 스피노자를 다시 마주하고 스피노자야말로 진정한 에피큐리언이로다, 박수를 쳐버렸다. 그러니 스피노자 역시 감히 내가 넘볼 수 없는 사상과 사유를 지닌 분, 애초에 그냥 패스해버리도록 하자, 에티카 삼세번 읽어보아도 내 가슴을 촉촉히 적시던 그 시적 감수성이 이제는 내게 사라져버렸으니 크나큰 결론을 내렸고. 3분 철학 3권을 읽으면서 아 이제야 좀 아주 재미가 훅훅 느껴져서 잼나네 하는 순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있었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쩝쩝. 3분 미학은 언제 그려주실까요? 작가님, 하고 메일을 보내고 싶었다. 사르트르와 라캉을 읽으면서 왔다갔다 고뇌하는 그 마음이 어느 정도로 깊을지 헤아릴 수 없는 나의 이 무감각함에 좀 진저리가 쳐지면서 공주에서 공수해온 밤양갱을 요거트 다 먹고 커피랑 먹으면서 생긴대로 살자, 뭘 그렇게 애를 쓸까 각자, 서로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천년만년 사랑할 것도 아니고 천년만년 섹스할 것도 아니면서 라는 결론에 다다른 건 역시 소피아의 사랑 여정을 훔쳐본 덕분. 민이가 중간고사 끝나고 자기도 읽어보겠노라고 해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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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9-25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피쿠로스를 지침삼는 무리들을 에피큐리언이라고 하는 군요^^!
사르트르와 라캉사이. 말과 살 사이. 실뱅과 자비에(왜때무네 자비에 지못미…🥲)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우리 사이 ㅋㅋㅋ

Darein 2024-09-26 06:10   좋아요 1 | URL
말이란 대체 무엇이길래…… 허나 자비에 곁에 왜 그리 오래 있었던가? 소피아여……
 

가을과 더불어 서문

"지금 저는 섹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섹스를 할 때와 똑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지요." 이것은 승화가 억압 없는 충동의 만족이라는 주장을 예시하기 위해 라캉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승화를 대리 만족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섹스fucking" 대신에 나는 말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기도 등등을)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어떤 것을 대체하려고 또 다른 종류의 만족을 얻는 방법 말이다. 승화는 잃어버린 성적 만족에 대한 대리 만족이다. 그러나 라캉 정신분석이 주장하는 것은 좀 더 역설적이다. 즉, 행위는 다르지만 그 만족은 정확히 동일하다. 달리 말해, 이러한 주장은 말하는 데서 오는 만족을 "성적 기원"을 언급함으로써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할 때의 만족이 그 자체 "성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정확히 섹슈얼리티의 바로 그 본성과 지위에 대한 물음을 급진적으로 열도록 한다. 널리 알려진바 마르크스는
"인간의 해부학은 유인원 해부학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아마 그 반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사하게 우리 또한 말할 때의 만족이 성적 만족의 - P7

열쇠를 쥐고 있으며 그 반대는 아니)다, 혹은 더 간단히 말해 그것이 섹슈얼리티와 그것에 내재된 모순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이 향해야 할 단순한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물음은, "무엇이 성인가?"가 될 것이다. 내가 주장할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은 섹슈얼리티를 정신분석의 고유한 철학적 문제로 고려하는 것이다. - 존재론, 논리학, 주체이론으로 시작해서 섹슈얼리티라는 용어와 공명하는 모든 것과 함께 말이다.
무엇보다도 (프로이트-라캉 계통의) 정신분석은 아주 강력한 개념적 발명이었고, 이는 철학 내에서 직접적이고 중요하게 공명하는 것들과 함께 해왔다. 철학과 정신분석의 조우는 동시대 철학에서 가장 생산적인작업 현장construction site임이 드러났다. 이런 조우는 고전 철학자와 고전적인 철학적 개념들(주체, 대상, 진리, 재현, 실재 등)을 새롭고 독특하게 읽도록 해왔다. 또한 동시대 철학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열었다. 철학이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자신의 형이상학적 과거, 그리고 그 과거에 속했던 몇몇 고전적 개념들을 폐기하려 할 때, 라캉이 나타났고 우리에게 값진 교훈을 준 것이다. 말하자면 문제적인 것은 이런 개념들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하는 방식에 있어서) 문제적인 것은 그 개념들이 함축하고 연루하는 내재적 모순(혹은 적대antagonism)을 부인하거나 삭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개념들을 단순히 폐기한다면, 모든 중요한 전장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전장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된다. 대칭적이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식으로, 정신분석도 (또한 임상적 맥락에서) 철학적 개념들을 붙들고 철학적 논쟁에 참여함으로써 많은 걸 얻어냈다. - P8

이 책은 다음의 두 가지 확신에서 뻗어나왔다. 첫째, 정신분석에서 성은 무엇보다도 개념이며, 이 개념으로 현실의 끈질긴 모순을 정식화한다. 둘째, 이 모순은 (이미 잘 정립된 것들이나 존재들 사이에 있는 모순과 같은) 부차적 차원에 제한되거나 환원될 수 없고, 이 존재자들의 바로 그 구조화 속에, 바로 그 존재 속에-모순으로서-이미 연루되어 있다. 더 정확히 말해, 성은 존재론적 문제이다. 궁극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내재적 비틀림이자 걸려 넘어지는 장애물로서 말이다.
그러므로 "라캉과 철학에 대한 물음은 바로 여기, 즉 문제들이 가장 고조된 이 지점에서 시작하고 다뤄져야 한다. 보통 성은 심지어 라캉과 그의 개념들을 가장 친절하게 철학적으로 전유한 것들에서마저도 물음으로 남겨져 있다. 그리고 라캉은 maître(주인)과 m‘être (존재로부터) 사이의 동음이의형을 유희하면서, 존재론을 주인 담론과 관련한 어떤 것으로 간주했다. 존재론은 "뒤에 바짝 붙어 있음", "언제든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함축하는 것이다(Lacan, 1999, 31).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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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이제 시작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회의주의적 절망에 빠진 개인-자신이 죽을 것을 잘 알고 있지만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영원한 생명을 희구하는 개인과 대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의 경우에는 우리는 몹시도 죽기를 바라는 개인, 영원히 사라져버리길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생이라는 저주를 받은 개인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가진 개인이 처한 곤경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부터 <파르지팔>의 암포르타스에 이르는 바그너의 주인공들이 처한 곤경과 동일하다. 이들은 절망적으로 죽기를 바란다. 그들은 ‘죽지 않는‘ 존재의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최후의 파멸과 자기소멸을 갈망한다.
이러한 행위개념에서 칸트에 대한 비판을 함축함으로써 라깡은헤겔에 가까워진다. 헤겔은 진정한 행위가 실행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은 바로 칸트에서 무한히 휴정상태에 놓였던 실체와 현상의 통일성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실수는 오직 적절히 ‘주관화될 때만‘ 행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즉 순수한 의지로 실행된 경우, ‘병리적‘ 동기로부터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만 실행된 행위를 의미한다. 나의 행위가 도덕적 법을 유일한 동기로 삼아 그 법에 따라 효과적으로 행한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는 결과적으로 결코 일어나지 않고 오직 영혼의 순수화라는 무한한 점근선적 접근법의 최종지점으로서 설정된 어떤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가능함을 보장하기 위해서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가설을 제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영혼의 불멸성이 드러내주 - P37

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와 정반대의 것, 즉 육체의 불멸성이라는 사드적 판타지로의 귀결이다. 오직 그런 방식으로만 우리는 끝없는 근접성을 통해서 진정한 도덕적 행위를 실행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있을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 라깡의 칸트 비판에서 핵심은 진정한 행위는 그 작동주체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칸트가 오도된 자체증거를 사용해서 가정한 방식에서는 모든 병리적 동기를 배제한 순수한 의지로 행동하는 ‘행위의 차원‘이 있다. 불가피하게도 ‘이 행위의차원‘에 작동하는 주체는 없다. 주체는 스스로도 ‘자신이 한 미친 짓‘ 때문에 불쾌하리만치 놀라게 되고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덧붙여 말하면 이것은 영웅적 행위가 갖는 통상적 구조이다.
오랫동안 상황을 유리하게 조종하고 타협하면서 기회주의적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갑자기 스스로에게도 설명할 수 없게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입장을 강하고 단호하게 주장하게 된다. 이 행위의 역설은 일반적인 용어 사용법에서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어도 행위의 작동자가 완전히 책임질만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그것 이외엔 다르게 행동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행위를 할 자유는 있다." - P38

결과적으로 행위에 대한 라깡의 개념은 환원 불가능한 유한성, 또는 구성적 결여에 붙잡혀있는 전치된 존재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관한 해체론적 윤리와 단절하도록 해준다. 해체론적 윤리에서 우리가할 수 있는 일은 영웅적으로 이 결여를 취해서 우리가 난공불락의 유한적 상황에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해체론적 윤리에 따라오는 부차적 결과로서 전체주의 등의 재난은 인간이이 유한성, 결여와 전치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고 총체적 투명성 속에서 ‘신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인간의 구성적 존재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건방진 태도에서 출발했다. 이에 대한 라깡의 대답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 행위는 실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만 이 행위는 완전한의도에 따라 순수한 의지로 행동하는 주체가 보여주는 투명한 몸짓이라는 관념론적 변장을 하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행위는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만남의 형태로 일어난다.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기적적인 사건은 발생한다. 이것을 좀 더 감정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이런 기적적인 사건은 ‘신성한‘ 차원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윤리적인 배신은 다양한 양태를 띠며 사건으로서의 행위를 배반하는 방식과 정확히 연결되어있다. - P39

근본적으로 다른 외부적 개체- 말하자면 신-를 개념화하는 일은 변증법 이전의 사유 방식으로 후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유일한 출구는 일자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균열은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잔여물, 표지되지 않고 남겨진 채 그리고 바로 정확히 그런 이유로전체 체계를 지탱하도록 사용되는 찌꺼기를 감추는데 성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때 전체를 지탱하는 것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논리적 작동으로서의 여성성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페미니스트 기획의 유효성 뿐 아니라 우리의 철학체계가 타자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종류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가능성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본질의 변증법은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의 우화를 통한 인간의 자기의식의 출현과정에 적용된다. 우리는 헤겔의 세계에서 이 유명한 일화를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
우선 이렇게 얘기해보자.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주인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가정이 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주인인가? 주인이 된다는 것은 반성(reflection)의 세 가지 층위를 거쳐서 마침내 자신의 본질을 소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달리 노예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인정받을 권리, 즉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고 주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렇게 되면 노예는 적절한 본질이 없는 개체라는 의미에서 단지 외피에 불과해진다. 노예는 직접성의 차원에 놓인 존재이다. 실제로 노예의 존재는 자아부재의 행위로 구성된다. 그는 주인을 위해 일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본질을 의미한다)이 스스로를 실현할 - P56

수 있는 조건에 관해 헤겔이 말한 것을 기억해야한다. 개념은(이 경우 ‘인간됨‘이라는 개념) 오직 타자와, 타자의 현존(現存)에서만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개념은 두 가지 상호적 타자들의 현존에서만 나타나고 타자에서 타자로의 진행은 본질의 자아동일체를 생산하게 된다. 따라서 복종을 하는 순간 노예는 주인의 타자로 행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타자성의 상실은 종국에는 주인을 무로 바꾸어 버린다.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는커녕 주인은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 노예에 완전히 의존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노예의 일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마저 소외시키게 된다. 다른 한편 노예는 두 주인, 인간과 절대적 주인, 즉 죽음에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을 통해 노예는 이 두 주인 너머로 비상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주인의 정체성을 빼앗아서 인간 주인을 넘어서고, 미래의 생산(역사)을 통해 얻어지는 초월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서게 된다. 주인의 정복이라는 오랜 관념은 상호적 인정을 통해 극복된다. 과거의 주인은 노예로부터 주인성의 본질을 인식해야 하고, 이 주인성은 다른 질서에 속한다. 더 이상 동료 존재의 복종을 통해 외부적 타자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통한 초월과 변형에 토대를 둔 자기 자신의 정복이다(이런 방식의 타자성은 상호심리적 차원이 된다는 점을 주목하라).
이상의 논의에서 여성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 P57

즉 의미화작용의 법칙을 언제나 초과하는 생산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헤겔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오빠를 매장하려고 했던 안키고네의 결정은 라깡에게는 진정한 윤리적 행위의 전범이 된다. 헤겔이 그 행위를 변증법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면, 라깡의 이론에서는 그 행위는 변증법과는 다른 공간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결정은 직접성, 우발성, 특수의 차원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를 감추는 곳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윤리적이다. 그곳에서 진리는 공식성과 보편성이 아니라 바로 스캔들이나 비극과 같은 탈중심성ex-centricity의 형태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의미에서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은 부정과 위반의 맹목적 행위가 아니라 보편의 밋밋한 문자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 개체성의 심오한 의미를 긍정하는 몸짓으로 읽어야 한다. 라깡의 윤리적 체계는 하이데거의 ‘진정성‘ 개념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실제로 그 개념에서 비롯된다. 하이데거의 진정성이란 주체 자신의 가장 최고의 진리를 의미하며 안티고네의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다. 헤겔이 형제자매 관계가 갖는 고유성을 지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형제가 여성에게 가령 아이나 남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혈연관계는 아니다. 보편의 원리를 넘어서는 윤리-여성적 윤리에서는 모든 관계란 대체불가능하고 고유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관계는 헤겔식 혈맹이 아니라 몸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몸은 기표로 대체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대체불가능하다. 부패되어 먼지로 바스러질 몸은 고유하다. 안티고네가 기표의 원환으로 재진입시키기 위 - P63

해 방부제처리하기보다는 매장을 하려했던 몸은 진리의 은폐 속 알레테이아의 자리, 혹은 바로 진리 그 자체에 놓이게 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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