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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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2년 노벨상 수상작가인 중국 모옌의 소설인 『개구리』는 중국의 가장 민감한 문제의 하나인 계획생육을 다루고 있다.

‘계획생육’이란 것이 인구를 계획적으로 조절한다는 의미로, 일종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볼 수 있는데, 도시에서는 독생자녀(獨生子女)라는 원칙에 따라 한명만을, 농촌에서는 아들인 경우에는 한명만을, 첫째가 딸인 경우에는 8년이 지난 뒤 한명을 더 나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라고 한다.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인권이라는 틀에서 이 정책을 본다면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자율이 아닌 강제를 통해 이 정책을 시행했고, 그 결과 수많은 낙태와 어둠의 자식(무호적 자식)을 양산해 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식인구와 실제인구에 차이가 많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이 정책 때문이며, 이 정책을 어기고 둘째를 출산해서 등록하고자 한다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중국정부가 외국에 비판에도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는 이 정책은 중국에서는 언급자체가 다소 민감한 문제라고 하며, 모옌은 이 민감한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 한다. 작중화자인 커더우(필명이며 올챙이라는 의미)의 입을 통해 중국에서 50년간 산부인과 의사를 했던 고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산동성에 있는 가오미 둥베이 향을 배경으로 계획생육의 일선에서 직접 정관수술과 낙태수술을 시행했던 산부인과 의사였던 고모는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정부의 정책을 꾸준히 실천해가며, 그 속에서 이를 위반한 사람들과 목숨을 건 싸움까지도 해야 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p185 고모가 말했습니다. 계획생육은 국가의 대사야. 인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식량도 옷도 부족하고,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가 없어. 사람들의 수준을 향상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 이 한목숨, 나라의 계획생육 사업을 위해 바칠 수 있어.

커더우 본인의 아내마저 임신을 숨기기 위해 도망 다니다가 너무 늦게 시행된 낙태수술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고, 나중에 재혼을 하게 되지만, 아들을 가지고 싶어 하는 아내의 욕심으로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얻게 되는 슬픈 중국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정책의 잘잘못을 떠나 그 정책의 시행 속에 인권이나 사람들의 삶이 망가져가는 모습들. 그리고 현대화를 통해 부의 편중이 일어나면서 대리모등을 통한 부유층의 출산 등으로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모습을 커더우와 고모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스키다니 요시토라는 선생에게 보내는 서간체형식으로 이루어있는 이 소설은 끝부분에 극본을 붙이는 형태의 특이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중국의 내밀한 모습을 비판하는 모습보다는 담담하게 본인의 일을 제 3자에게 서술하는 형식을 통해 정책비판이나 인권비판을 피해가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개구리는 수많은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의 정령으로 상징되는 데 소설 속에 3개월 된 태아의 모습이 긴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이 변태기의 개구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개구리가 낙태 속에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사라져간 생명들과 그를 기리는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그 의미만으로도 인권을 가장 앞에 두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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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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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만큼의 격동의 세월을 겪어냈다. 공산주의 사회로의 변화와 문화대혁명의 시기, 그리고 다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도입 등은 고단했던 중국의 근현대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시기의 중국에 사는 민중들은 절망하기도 했으며, 자본을 가졌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문화대혁명의 시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역적으로 이름으로 처단당하기도 했다.

 

그 격동의 세월을 이 소설의 주인공 “푸구이”노인은 온몸으로 겪어내게 된다.

인생을 도전과 응전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그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삶의 역경에 순응하며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아마 격동의 세월에 반기를 들었다면 죽음이었을 모를 시대를 살아남은 이들의 비참함일지도 모른다. 중국혁명과 문화대혁명의 시기에 삶과 죽음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기보다는 당의 평가 속에 있고, 그것을 어쩔 수 없이 개인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자포자기적 순응일런지도 모른다.

개인의 삶이라는 게 이런 정치적 격동을 모두 포함하여 “운명”이란 말로 포장한다면 푸구이의 삶은 운명의 격랑에 흘러내려가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인다.

 

p8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이다. 그 힘은 절규나 공격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 …… 나는 《인생》이 눈물의 넓고 풍부한 의미와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작가 위화가 서문에서 밝힌바와 같이 인생은 목적을 지향해서 살아가기 보다는 살아가는 것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말에 동의한다면 이 소설은 눈물과 절망 없이 견뎌내기 힘든 한 개인사를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필체로 이야기한다.

 

“푸구이”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놀음과 주색에 빠져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결국 빈털터리로 자신이 주인이었던 땅에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사기 놀음으로 푸구이의 땅을 모두 가져갔던 룽얼은 결국 공산주의의 악덕지주의 처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결국 푸구이 대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몰락의 행운을 빼고는 푸구이는 내내 불행하다. 아내 자전의 병과 아들 유칭이 현장부인에게 과도하게 수혈을 해주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 고열로 농아가 된 딸 펑샤가 나중에 출산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 사위 완얼시의 죽음. 그리고 외손자 쿠건의 콩의 과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푸구이는 꿋꿋하게 살아낸다.

그리고 자조 섞인 말로 삶을 이야기 한다.

 

p278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과 아내, 손자까지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지도 모르고, 소설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슬픔을 묵묵히 참아내며 살아남는 푸구이의 삶은, 일제징병과 6·25전쟁에서 가족과 자식을 잃어버렸던 우리민족의 어머니들의 삶을 생각하게 만든다.

삶의 무게가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 무게를 이겨내고 삶아남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당장은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먼 세월 속에 돌아본다면 큰일도 별거 아니라는 삶에 대한 유연한 시각일지도 모른다.

위화는 이 소설 인생을 통해 이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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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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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이 소설 선셋 파크는 이런 주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2007년 금융위기 뒤에 미국사회는 어찌 보면 1997년 IMF위기 뒤의 한국 사회와 닮아있다. 희망을 잃은 사회, 그 속에서 주인공들은 희망이나 미래보다는 현재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낸다.

 

작은 출판사사장의 아들이자 명문대생 이었던 마일스 헬러는 의붓형과 말다툼 과정에서 형을 차로로 밀어, 자동차사고로 죽게 만든 죄책감 속에 7년 넘게 방황한다.

말없이 집을 떠나 혼자 7년 넘는 기간 동안 방황하며 하루하루를 마치 죄를 치르듯 살며 플로리다에서 폐가처리작업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산다.

유일한 낙은 사진을 찍는 일과 책을 읽는 것. 그 속에는 어떤 희망도 없고, 어떤 미래도 없다.

 

p9 제아무리 깨끗하게, 꼼꼼히 치워도 패배의 악취를 지우지는 못한다.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의 집을 처리하는 작업 속에 집의 광경을 묘사하는 이 글은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섣부른 희망이나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다. 미성년자의 필라와의 사랑으로, 위험에 처한 마일스는 뉴욕의 선셋 파크의 버려진 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선셋 파크는 미성년자와의 사랑 속에 임신하고 낙태한 뒤 그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기 위해 그림에 몰두하는 엘렌, 철없는 남자친구와의 사랑에 낙담하며 시간제근무를 하며 논문을 써나가고 있는 엘리스, 마일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마일스에게 동성애를 느끼나 친구를 잃을까봐 말 못하는 빙 네이선이, 몰래 숨어들어가 살게 되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방황하는 청춘들의 중간역 같은 곳이다.

 

거대한 묘지들이 보이는 선셋 파크의 집에서 그들은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절망과 마주하기도 한다.

오히려 소설 내내 희망보다는 어두운 현실이 있는 그대로 묘사된다.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 실제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실제 야구선수들의 행운과 불행, 죽음은 실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음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듯하다.

 

그럼 우리는 왜 살고 어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떠오르는데 그 답은 없다. 맨 마지막 희망 속에서 다시 절망하게 되는 마일스의 독백 속에 아마 그 힌트가 있는 듯하다.

 

p328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서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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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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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 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나쓰메 소세키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한말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정신적 상처를 지니고 살겠지만, 그 상처가 삶에 영향을 주고 심리적으로 불안을 일으키게 된다면 이를 트라우마라고 한다.

 

이 책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교 때 절친했던 친구들에서 버림받으며, 그 정신적 상처로 인해 노이로제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죽음에 문턱에 까지 이른다.

16년 뒤 여자 친구를 만나 자신을 버렸던 친구들을 만나보라는 권유를 듣고, 친구들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 다자키 쓰쿠루는 아무런 색채도 특징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였음을, “시로”를 위해 그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버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진실을 알아가게 된다.

 

고독함과 외로움, 소외라고 하는 현대인들의 내면을 잔잔한 문체로 잘 그려내는 하루키는 다자키 쓰쿠루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상처받은 인간의 내면과 그 극복을 통한 삶과의 화해를 묘사해 나가는 데, 그의 전작들처럼 시공간을 넘나든다든지, 극적인 반전이라던 지하는 요소는 부족하지만, 그런 면들이 오히려 현실에 가까운 소설을 만들어 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곳곳에 지뢰처럼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던져 놓은 이야기들, 친구 하이다의 등장과 하이다의 아버지의 사람의 빛과 죽음이야기,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 “순례의 해”, 시로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과 실제 범인의 의혹 등은 하루키의 전작들처럼 어떤 반전을 예비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의혹으로 끝날 뿐 결론은 없다.

그것들이 전작들처럼의 반전을 기대한 이에게는 실망을 안겨준 것 같고, 나 같은 비현실적 반전보다는 잔잔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호평을 얻기도 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문득 떠올라서 책상 앞에 앉아 이 소설의 맨 처음 몇 행을 쓰고는 어떻게 진행될지, 어떤 인물이 나올지, 어느 정도 길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반년 가깝게 이 이야기를 묵묵히 써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처럼 어떤 것을 계획하고 쓴 것이라고 보다는 쓰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데, 그래도 이런 소설을 써 낼 수 있다는 것은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색채와 순례라는 제목이 들어간 마치 무슨 서사시의 부제 같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소설은 자아와 이드, 초자아등 사람의 무의식을 꿈을 통해 분석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는데, 어쨌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꾸루가 순례를 통해 색채를 찾은 소설로, 자신의 정신적 상처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을 대면하고 극복할 때 껍질을 벗듯 한 단계 성숙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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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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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부조리하다. 불평등하며, 비논리적인 경우도 많다. 인간 사회가 지금껏 외쳐온 평등과 자유는 삶 자체가 평등하지 않고,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있고 그것은 끊임없이 개선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회는 불평등하다.

 

이 소설은 망자의 입을 빌어 위화가 이야기하는 중국의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불평등, 그리고 사랑이다.

소설 한편을 통해, 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양페이라는 주인공과 리칭이라는 전처와 아버지(양진뱌오)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야기보다 더 감명적이며 애잔하다.

 

죽은 뒤의 사회도 평등하지 않다.

화장터로 오라는 부름에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 주인공 “양페이”는 화장터의 귀빈석과 플라스틱 의자의 일반석에서 빈부격차를 실감한다.

묘지가 있는 자와 없는 자로 다시 나눠지는 망자의 사회는 현실사회의 인간의 불평등이 고스란히 이어짐을 보여준다.

 

짝퉁, 장기밀매, 뇌물과 비리, 산아제한으로 인해 버려지는 영아들, 죽었으나 은폐되는 사람들, 철거와 서민들의 죽음등 온갖 중국 경제의 실상이 죽은 자중 묘비조차 갖지 못한 자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어진다.

 

죽음조차 자유롭게 만들지 못한 불평등 속에 이승과 저승을 헤매는 주인공 양페이는 전처와 화해하며 그녀가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죽음을 앞두고 부담이 되기 싫어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진실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p227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 같았다. 모두 떠나간 세계에서 기억하기 싫은 가슴 아픈 일을 겪었고, 모두 하나같이 그곳에서 외롭고 쓸쓸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애도하려 한자리에 모였지만 초록색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을 때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죽은 자의 7일 동안의 여정이라는 다소 기묘하고도 씁쓸한 이야기를 통해, 위화는 중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의 해결은 죽은 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불평등과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진심으로 그들을 애도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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