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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사랑하는 방법
헤일리 태너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처음 접하는 작가이고 장르 또한 그닥 선호하는쪽이 아니어서 제목만 보고선 어떨까, 잘 읽힐까 했습니다만, 책을 딱 받고 표지를 보는 순간, 왠지 순정만화 같이 이쁜 느낌이 들어 얼른 펼쳐 보고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자 마자 막 술술 읽히는 것이 최근 책을 펼쳤다 하면 일주일 넘어가는건 보통이었던지라 무지하게 반가웠다, 라는걸 말하기 위한 긴 서론이었네요. 이렇게 저에게 있어서는 아주 괜찮았던 책이었는데 뭔가 마지막이 초큼, 너무 동화스럽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있어 살짝 아쉬웠다면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다섯살의 두 아이는 어느 여름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모른채 이모와 함께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이곳 저곳을 거치며 살아온 레나. 그리고 비교적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혼자라 늘 외로운 바츨라프. 둘은 그렇게 운명처럼 만나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마술이라는 매개체로 이 둘은 비밀까지 공유한,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건만 갑자기 사라져 버린 레나로 인해 바츨라프는 세상을 다 잃은 기분입니다. 그렇지만 바츨라프는 늘 그 자리에, 늘 위대한 마술사인 카퍼필드를 꿈꾸는 소년으로, 그리고 자신의 조수는 늘 레나여야만 한다는 생각만을 가진 채 거기에 있었습니다. 레나를 기다리며.
이야기는 크게 4개의 챕터로 나눠집니다. 처음으로는 "함께"였던 꼬꼬마 레나와 바츨라프, 그 다음은 헤어진 뒤 "바츨라프", 그리고 헤어진 뒤 "레나", 마지막으로 "다시 함께". 레나편을 읽기 전에는 몰랐었던 레나의 안타까운 삶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가슴아팠습니다. 어쩌면 그 어린 아이에게 감당하기 힘든 그렇게 참혹한 인생이었을까요. 그 모든걸 다 인지하지 못할 어린나이 였다 하더라도 그녀에게 그 일들은 하나의 아픈 그림자가 되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그 상처를 씻고 치유해줄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음... 말하자면 결이 고운, 이라고 해야하나요, 아무튼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던 이야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완성했을때 작가의 나이가 고작(?) 26세 였다니 앞으로 얼마나 더 멋진 작품을 창조해 낼지 사뭇 기대감이 큽니다. 힘겨운 이민자의 생활상 또한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옛날 조선왕조 말기로 올라가 보면 나라의 억압과 수탈을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대거 이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후 에도 있었겠지만요.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다른나라를 찾아 떠났지만 역시나 그곳에서 살기 또한 힘겨웁기는 매한가지였죠. 러시아도 그러한 때가 있었나 봅니다. 바츨라프의 부모나 레나의 이모 역시 러시아에서의 힘든 삶을 견디다 못해 어렵사리 미국땅을 밟았건만 미국에서의 삶도 녹록치 않았던거죠. 그런 힘겨운 삶들이 어린 레나에게 고스란히 되물림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 나이에 겪었어야할 수많은 가슴아픈 일들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지 소설속의 이야기이기만을 바래보지만 과연 그렇지는 않을거란 생각이 지배적이라 딸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화가 나네요.
생소한 작가를 처음 접하다 보면 이야기의 내용이나 구성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잘 읽히냐 하는 전개나 문장의 간결함(?)도 저에게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해일리 테너 작가는 제가 참 좋아하는 문장을 구사하십니다. 저는 단순해서 그런지 두줄, 세줄에 걸친 장문보다는 단문이 좋더라구요. 일을 하는 짬짬히 독서하는 습관이 있다보니 장문은 읽다가 또 읽고, 한참 읽다보면 아까 그 자리고, 읽다 놓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어야 하고. 아무튼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 좋은데 엔딩이 좀 아쉬웠습니다. 아름다운 동화같은 해피엔딩과 너무 "급" 마무리한 느낌이 살짝.
조그맣고 칙칙한 아파트에서 조그맣고 칙칙한 할머니와 함께 자란 레나에게는, 매일 시멘트 길을 걸어 다니고 벽돌로 지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레나에게 그곳은 알록달록한 물감으로 색칠된 세상처럼 보였다. (101쪽)
매일 아침 레나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잠에서 깬다. 학교에서는 레나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교실 문을 바라본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곧바로 방에 틀어박힌다. 저녁 먹을 때가 되어도 나가지 않고, 엄마 아빠가 불러도 나가지 않고, 엄마가 방문 밖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울며 "얘야, 문 좀 열어봐. 응?"이라고 말할 때에도 아무 대꾸도 않는다. (152쪽)
바츨라프는 온 얼굴로 웃고 있다. 웃음이 커지고 커지고 또 커져서 웃음의 한계치에 도달했는데도 한없이 커지기만 한다. 레나도 웃으면서 벤치에서 일어선다 바츨라프가 나타났으니까. 바로 앞에 나타났으니까. 포옹을 할지 하지 않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둘은 부둥켜안는다. 아니나 다를까, 바츨라프가 레나를 번쩍 들어 올린다.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