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발소
사와무라 고스케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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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는 왜 잠에서 깨어났을까?





- 작가는 처음부터 인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라는 단편을 쓰고 신인상에 도전하지만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신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아야츠지 유키토는 이 작품을 두고 '이야기가 추리소설적인 해결로 향하지 않고, 기괴 환상소설적인 분위기로 나아가다가 끝을 맺는다'라고 낙선의 평을 썼다. 이 말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절치부심하여 새 작품을 쓰고 다음 해 신인상에 다시 도전한다. 이번에는 호평을 받으며 당선. 그 작품이 바로 이 책의 표제작으로 실린 '밤의 이발소'다. 

'밤의 이발소'에서는 과연 기괴 환상소설적인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환상적인 설정이 보이지만 결말에서 논리적인 추리로 환상성을 결박한다.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조난 직전에 간신히 불빛을 찾아 무인역에 도착한 대학생 사쿠라와 다카세. 그러나 이미 막차가 떠난 역사 주변은 인적 없는 폐허의 모습이다. 부득이 역사에서 일박을 하려는데 조금 전까지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던 이발소가 불을 밝히며 영업을 시작한다. 반가움과 호기심에 이끌린 사쿠라와 다카세는 이발소에 들러 느긋하게 샴푸와 면도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다음날 첫차를 타고 시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침을 먹으면서 어젯밤의 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미처 몰랐던 놀라운 사실을 추리해낸다. 

앞뒤 딱딱 맞아떨어지는 산뜻한 코지 미스터리 분위기의 '밤의 이발소'는 확실히 추리소설 마니아와 본격 미스터리 심사위원들의 구미를 만족시킬만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단초에 불과했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하나의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 전체 그림을 보려면 퍼즐 조각들을 더 모아야만 한다. 이어지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플갱어를 찾아서'를 지나고 '포도 별장의 미라주1'에 도착해서야 작가는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 데뷔작이 되길 바라며 야심 차게 집필했을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에 얽힌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 그림을 알려주는 퍼즐 조각의 대부분도 여기에 있다. 앞선 세 단편들은 주인공 사쿠라가 연이어 등장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독립된 단편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포도 별장의 미라주1'부터 뒤에 수록된 네 편(포도 별장의 미라주1,2,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 에필로그)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하나의 중편으로 볼 수 있다. 


주성치도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한 기발하고, 기괴하고, 아련하게 향수를 자극하는 인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지적한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이나 장점이 여기서는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미스터리는 존재하고, 논리적인 추리도 등장하지만 그것을 압도하는 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활극, 상상력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모험담이다. 

인어는 왜 잠자는 공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잠자는 공주는 어느 날 왜 잠에서 깨어났을까. 이 환상적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이야기로까지 거슬러가고, 여러 장소와 인물들을 만나야만 한다. 오래된 별장에 숨겨진 보물, 특이한 유언, 희귀 향수, 도서실, 감옥, 윌리엄 8세의 성, 청부업자, 비밀 통로, 미술품 수집상, 수십 마리의 고양이 등을 만나고 기나긴 모험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물쇠가 열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보다 확장된 의미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에필로그'는 앞선 세 단편들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장으로서의 에필로그를 의미하기도 하며 소설집에 수록된 전체 이야기와 미스터리를 정리하는 의미의 에필로그이기도 하다. 에필로그를 읽고 나면 독립된 줄 알았던 앞선 세 단편도 모두 인어 이야기 속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책장을 덮을 즈음 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단어가 주는 묘한 울림과 향수에 대해서.

이 연작 미스터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찾는다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향수'일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중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멸종해간다. 사라지기 직전의 존재는 언제나 높은 희소가치를 띠며 강한 향수를 발산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들린 밤의 이발소에서 내 뒤를 스쳐간 어떤 것이 바로 그런 희소성과 향수를 지닌 존재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강한 향수를 발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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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이발소
사와무라 고스케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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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도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 같은 ‘잠자는 물 속의 공주‘ 미스터리. 기발하고, 기괴하며,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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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녀
잭 케첨 지음, 전행선 옮김 / 크롭써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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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공포라는 이름의 고통

 

- 어렸을 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이승복을 소재로 한 반공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후반부 무장 공비들에 의해 입이 찢어지고, 머리가 깨지고, 단검에 난도질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이승복과 어린 동생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약하고 순수한 존재를 강하고 악한 존재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괴로웠다. 함께 영화를 지켜보던 여학생들 대부분은 비명을 내지르고, 한숨을 토하고,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감동의 눈물따위가 아님을 어린 나이에도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온통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것은 공포라기 보다도 차라리 고통이었다. 정신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듯한, 정서를 마구잡이로 쥐어 짜는 듯한 고통.

잭 케첨의 '이웃집 소녀'는 그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공포를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온갖 폭력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소녀를 지켜보는 일은 그야말로 고통 그 자체였다. 직접 폭력을 당하는 것보다 폭력을 지켜보는 일이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가장 잔인하면서도 순수한 형태다.

('이웃집 소녀' p8)

 

이 끔찍한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소녀에게 가해졌던 참혹한 폭력과 가해자들의 악마적인 광기가 모두 실제했던 사건이다.

막연히 실화라고만 말해서는, 혹은 몇 줄짜리 기사로만 사건을 접해서는 그 공포와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 소녀를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그 기나긴 폭력과 광기의 시간을 보통의 선량한 인간이라면 쉽게 상상하고 그려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친절하게 그것을 대신해 준다. 끔찍했고, 끔찍하게 길었던 그 핏빛 시간을 칼로 새기듯 독자의 머리 속에 그려준다. 소녀의 몸과 마음을 참혹하게 긁고 지나간 잔혹한 시간의 자국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체험하게 한다.

그 체험의 시간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정신을 황폐하게 하고 세상을 끝없이 환멸하고 저주하게 만든다.

읽는 내내 불편했다. 등장 인물 가운데 마음에 드는 이가 단 하나도 없었다(학대당하는 두 소녀는 그저 안쓰러울 뿐이고). 역겨운 인간들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설 속으로 들어가 가해자와 방관자, 이웃 주민들까지 모조리 기관총으로 쏘아 죽이고 싶었다. 육체가 온통 너덜너덜해지도록 총알을 퍼붓고만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오직 작가가 찍어놓은 활자를 눈으로 쫓아갈 수밖에 없는 독자의 입장이라는 게 답답하고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했고, 그래서 몸도 불편했고, 나중에는 두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그 끔찍한 활자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악의 심연은 도대체 그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암담한 공포였다. 이정도에서 이제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어둠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앉았고, 고통은 더욱 참혹한 모습으로 나를 괴롭혔다. 희망은 없었다. 한 줌의 정의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도 어둠의 심연 속에서 여지없이 녹아버렸다. 처절한 절망과 극단으로 치닫는 공포만이 겹겹이 나를 에워쌓다. 제발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던 그 심연의 마지막 밑바닥으로까지 끝내 곤두박질쳐지고 말았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 끔찍했던 고통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벗어날 수 없었다.

 

책을 덮어도 가슴은 답답했고, 세상은 온통 지옥의 그림자들로 얼룩덜룩했다.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시신경에 박혀버린 활자들은, 활자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이미지들이 불러낸 참혹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중독된 것처럼 공포는 혈액을 따라 돌면서 문득문득 나를 혐오와 분노, 고통에 사로잡히게 했다. 차라리 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것은 위험한 책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폭력의 수위를 생각했을 때 19금이 붙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청소년들이 이 책을 봤을 때 정서적으로 어떤 고통과 상처를 입게될 지 근심스럽기도 했다. 심약한 이라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와 인내가 필요하다.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신적인 데미지가 분명히 올 것이다. 필시 고통스런 독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일단 다 읽고 나면 절대로,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당연히. 세상을 보는 눈이 적어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도 조금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그토록 참혹한 소설을 독자에게 기어이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불편한 진실을 또 한 번(혹은 보다 강력하게) 깨우쳐주고자 한 것이다. 세상은 온통 지옥의 그림자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정신적인 데미지를 입은 후에 그 사실을 다시금 인지하고, 깨닫고, 한숨내쉬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분노한다고해서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을 뒤덮은 그림자는 쉽게 걷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분노하고, 결국 참담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이다.

 

상당히 고통스럽고, 내용 자체도 공포와 충격을 넘어 혐오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책이라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좋은 평을 주기가 힘들었고, 섣불리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도 없었다. 작가에게 급소를 제대로 한 대 얻어 맞은 듯, 아니면 아주 정신없이 수십차례 린치를 당한 듯한 기분이라 뒷맛이 좋을 수도 없고, 따라붙는 여운도 찜찜할 뿐이다. 피투성이로 죽어간 소녀의 유령이 계속 따라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지하 밑바닥의 처참한 지옥도를 활자로 생생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훌륭했고, 어떤 식으로든 독서 전과 후의 정서와 감정에 변화가 초래되고, 현실을 상기하고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설문학으로서의 기능은 톡톡히 한다. 문제작인 것이다.  

당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혹은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고자 한 그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 혹은 세상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악의 심연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은 각오가 섰다면 책장을 열기 바란다. 부디 심호흡을 크게하고 고통을 인내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길 바란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그러니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던 불온한 이미지와 위화감들이 지하 어두운 곳에서 최초로 폭발하는 시점이 오면 그때부터는 중도에 책장을 덮기도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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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이라고 말해
우웸 아크판 지음, 김명신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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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 뿌려진 아이들의 눈물...

 

 

아프리카라고 하면 먼저 남아공 월드컵이라는 축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사실 그 동안 여러 영상 매체를 통해 소개된 아프리카 관련 프로그램들은 그 곳의 척박한 현실을 담은 것들이었다. 아프리카는 뭔가 배고픈 땅이고, 굶은 죽는 아이들이 속출하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땅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우리와 다른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우리와 다른 땅...

개인적인 느낌을 말하자면 나는 사실 아프리카 관련 대부분의 영상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자선 단체의 시선을 따라가며 펼쳐지는 획일적인 영상을 싫어한다. 그동안 세계의 많은 자선단체들이 아프리카를 방문하여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자선 단체 및 몇 몇 연예인들이 그곳으로 날아가 밥을 퍼주고, 먹을 것들을 선물해주고, 아이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물을 흘리다가 급히 만들어 낸 듯한 미소를 지으며 벌거벗은 현지 아이들과 기념 사진을 찍은 모습이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곤 했다.

나는 그런 영상들이 싫었다. 자선을 하려는 그들의 의도와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겠지만 나는 다만, 아프리카 관련 방송이 항상 그런 식으로만 제작되어야 한다는 게 불만이었던 것이다. 자선 단체의 시선으로 본 아프리카의 가난은 뭔가 작위적이고 도식화 된 모습이었다. 인간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저 영상을 위한 피사체같은 느낌만 들었던 것이다.

필시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고, 다양한 감정과 사연이 있고, 그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순간순간 소소한 기쁨과 행복도 있을 것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의 수천만가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텐데... 왜 영상물을 통해 보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똑같을까.  왜 모두 똑같은 인생을 사는 것처럼 똑같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똑같은 슬픔만을 토로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명 연예인은 도저히 못 듣겠다는 듯이 똑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스스로의 삶을 송두리째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그러다가 몇 상자의 선물이 전달되고, 아이들을 위해 축구공이나 책 따위가 선물되고 그것을 받은 아이들이 급히 지은 미소와 함께 유명 연예인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기념 촬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일까...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에 내려앉은 해묵은 가난의 그림자를 그런 식으로 담아내는 것은 어쩐지 불편했다. 내가 보고 싶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가난에 덮여 있지만 그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표정, 각자의 얼굴이 있는 것인데...

 

나는 자선 단체, 유명 연예인의 시선이 아닌 아프리카 현지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아프리카 땅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이다.

우리 눈으로 포장된 삶이 아닌, 그들의 눈으로 부딪히고 느끼고 깨달은 '그들의 진짜 삶', '진짜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척박한 땅에서도 울고 웃는 그들만의 인간으로서의(영상에 비쳐지는 피사체로서의 삶이 아닌) 진짜 삶이 있는 것이다.

 

우웸 아크판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현지인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아프리카인들의 진짜 삶'이다. 자선 단체 위주의 아프리카 특별 영상물 같은 것은 잊어도 좋다. 영상을 위해 도식화된 삶이 아닌... 가난하지만 그 안에서 갖가지 사연들로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들의 '진짜 삶', '진짜 얼굴'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동안 봐왔던 영상물들이 불편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마치 별개의 종을 보는 듯 마냥 불쌍하고 슬프게만 바라볼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 당신의 삶도 그들과 같을 수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이라고 말해'가 내게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의 일상과도 같은 다섯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것은 곧 세계의 일상과도 같은 이야기다.

우웸 아크판은 작가로서의 재능이 출중하다. 그의 문장은 수준급이고 특히 현지의 삶을 카메라로 담듯 생생히 전달하는 묘사력은 놀랍다. 풍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까지 무섭도록 깊이 꿰뚫고 묘사할 줄 안다. 우웸 아크판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영상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며, 무엇보다 인간미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이야기되는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는 두 가지는 가난과 분쟁이다. 그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분쟁으로 인한 갈등에 상처받고 있다.

'크리스마스 성찬'과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는 가난을, '이건 무슨 언어지?', '럭셔리 영구차', '부모님의 침실'은 종교와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갈등을 담고 있다.

물론 가난과 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당연히 하층민들이다. 아프리카 땅 전체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그곳에도 부자는 존재하고, 분쟁과는 무관하게 평화롭고 호화로운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통받는 이들은 밑바닥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그리고 또 너무나 당연하지만 아무리 밑바닥의 가난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지만 그들도 감정이 있고, 희노애락을 느낄 줄 안다.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 식물이나 광물이 아니며 외계인도 아닌 것이다. 우리와 같은 지구인이다. 우리처럼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밥을 먹고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영상물에 비쳐지는 것처럼 하루 종일 찌푸린 인상에 절망적인 표정만 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성찬'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열 두살의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가난 때문에 포기하고 결국 몸을 팔아 생활비와 동생의 학비를 댄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도 꿈은 있다.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동생을 대학까지 보내고 싶어하고 또 스스로를 위해서도 많은 돈을 모으고 싶어 한다. 언젠가는 다시 학교에 갈 날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푼돈이나 버는 지금의 생활에서 벗어나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는 먼 창녀촌으로 가야만 한다. 소녀는 씩씩하게 말한다. 풀타임으로 일해서 어서 빨리 돈을 벌겠다고.

소녀의 남동생은 큰누나가 풀타임으로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일은 하더라도 지금처럼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과 함께 지내길 원한다. 무엇보다 소년 자신이 큰누나를 하루 종일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다. 소년은 큰누나가 자신의 학비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려 한다. 수없이 입고 벗어서 낡아진 교복을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소년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누나는 결국 자신의 커다란 트렁크를 이끌고 집을 떠난다. 가족을 위해 장만해온 크리스마스 음식들만 남겨둔 채.

개인적으로 이 단편이 수록작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살아온 70년대 가난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가난은 지금도 존재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소녀가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결코 낯선 땅의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감동한 것은 그 소녀의 꿈과 누나를 바라보는 동생의 안타까운 시선이 너무도 애틋하고 아름답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 담긴 현실은 무섭고 비참한 것이지만 누나와 동생의 꿈과 사랑은 너무도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안타깝고 안쓰럽고 감동적인 것이다. 무섭고 비참함이 아닌, 그 '아름다움'에서 나는 감동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를 짓누르는 '가난' 그 자체가 아닌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의 '인간'들에게 감동한 것이다.

 

중편 '가봉에 가기 위해 살찌우기'도 가난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두 어린 조카를 가봉의 부잣집으로 팔아 넘기는 삼촌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난이 그림자 진 곳에서는 횡횡히 벌어지는 '아동 판매'의 실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삼촌은 어린 조카(오빠와 여동생)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새로 얻은 오토바이를 태워주며 가봉이라는 마을로 가면 매일 맛있을 것을 먹고 학교도 다니며 예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고 한다. 어린 오빠와 여동생은 삼촌을 말을 믿고 어서 가봉으로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나 삼촌이 숨기고 있었던 것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아이들의 희망이었던 가봉은 점점 무서운 곳으로 변한다. 뒤늦게 삼촌은 생각을 고쳐먹고 아이들을 가봉에 보내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극도의 위험만이 다가올 뿐이다. 

어딘 줄도 모르고 달나라처럼 먼 곳에 존재하는 가봉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가봉 따위는 어른들의 야비한 입놀림으로 얼마든지 수십 수백 개씩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의 도시, 꿈의 도시일 수도 있다. 음모와 협잡이 벌어지고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곳은 지금 여기, 아이들이 발 딛고 선 그 자리인 것이다. 어른들은 가봉이라는 실체가 잡히지 않는 꿈의 풍선을 아이들에게 쥐어주며 더러운 이익들을 챙기려 한다. 아이들은 결국 가봉에 가지 못하지만 만약 가봉에 도착하더라도 그들이 꿈꿔왔던 행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개처럼 가봉은 아이들의 발걸음에서 더 먼 곳으로 달아날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발 딛고 선 그 곳, 그 자리는 언제나 어른들의 더러운 음모와 협잡과 피와 폭력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다른 중편 '럭셔리 영구차'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발생하는 종교 갈등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청년(아직 소년?)은 종교와 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형을 잃고 손목 한쪽을 잃고 가족을 잃고 멀리 도망가는 신세가 된다. 이념의 대립은 무서운 것이다. 하나의 사상이 집단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피와 공포를 불러들이게 된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상의 막대는 사냥개처럼 자신과 다른 이념을 찾게 되고, 그 이념이 아직 흐물흐물한 상태일 때 딱딱한 막대로 쳐서 없애 버린다. 이 이야기 역시 아프리카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념의 대립이 어떤 식으로 상처와 비극을 잉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우브릴은 다른 종교에 발을 들인 형을 적대시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형을 심판한다. 그러나 곧이어 마을 사람들은 우브릴조차도 이단으로 몰아세운다. 한 순간이었다. 같은 편이 다른 편이 되고, 그토록 철저히 믿었던 사상이 차갑게 등을 돌리는 순간은... 미처 깨달을 수도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된다. 돌아서면 우매할 만큼 무섭게 돌변하는 것이 종교고 사상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잔인하고 치사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사상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이 문제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살의를 피해 간신히 도망친 우브릴은 그러나 럭셔리한 버스 안에서 또한번 이념의 대립과 갈등, 분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작은 버스 안도 '인간'들이 모인 이상,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치사하고 잔인한 본성은 그 작은 버스 안을 아프리카의 축소판으로 만들어 버리고, 곧 세계의 축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온 인간의 비극은 언제나 인간이 모인 곳에서 다시 시작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섬뜩하고 훌륭한 작품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 '부모님의 침실'은 가장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다. 단지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3개월동안 80만 명이 야만적으로 살해된 르완다 내전을 배경으로 한 단편이다. 아무 죄도 없고 사상적 대립도 없는데, 다만 핏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상대를 적대시하는 종족간의 분쟁을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그린다. 투치족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거행되자 후투족들은 살인귀로 돌변한다. 살아남은 몇몇 투치족 사람들은 부모님의 침실 천장으로 숨어들고... 투치족 어머니와 후투족 아버지를 둔 소녀는 끝내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소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써 부정한다. 어머니가 왜 죽어야만 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알지 못한다. 왜 어른들이 싸우는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고 함께 산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과 어린 동생은 어느 편에 서야만 하는 것인지... 왜 그들 모두는 한편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대립과 갈등은 불가해한 공포일 뿐이다. 

이 단편은 황석영의 장편 '손님'을 연상시켰는데, 우리나라도 이념의 대립으로 종족을 학살했던 끔찍한 역사가 있다. 

 

제목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들의 문제는 다만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실감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대립과 갈등, 전쟁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문제를 일으키고, 문제는 가난을 야기하고, 아이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아닌 땅이라고 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비껴가는 것은 아니다. 즉, 그곳에서 '인간'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아프리카의 사람과 그들의 삶을 '아프리카' 특수에 기대지 않고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그려낸 작가의 성찰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아프리카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땅이니 전세계인들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세요'라는 낯뜨거운 호소를 하고자 한 게 아닐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누차 얘기했듯 세상 어디에도 인간의 문제는 존재하고, 인간의 문제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불쌍한 아프리카 아이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또 다른 불쌍한 아이들이 바로 당신 곁에서 당신 나라 언어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인지시켜 주려 했을 것이다. 아프리카인이 아닌, 그저 '인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흡인력 넘치는 필력에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도 한편 한편 읽을 때마다 진중하게 생각하고 감동할 수 있는 걸작 소설집이었다. 띠지에 적힌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말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작품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이라면 누구라도 다른 이에게 추천하고 소개하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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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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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총질을 해대는 인간들...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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