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이발소
사와무라 고스케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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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는 왜 잠에서 깨어났을까?





- 작가는 처음부터 인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라는 단편을 쓰고 신인상에 도전하지만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신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아야츠지 유키토는 이 작품을 두고 '이야기가 추리소설적인 해결로 향하지 않고, 기괴 환상소설적인 분위기로 나아가다가 끝을 맺는다'라고 낙선의 평을 썼다. 이 말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절치부심하여 새 작품을 쓰고 다음 해 신인상에 다시 도전한다. 이번에는 호평을 받으며 당선. 그 작품이 바로 이 책의 표제작으로 실린 '밤의 이발소'다. 

'밤의 이발소'에서는 과연 기괴 환상소설적인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의 환상적인 설정이 보이지만 결말에서 논리적인 추리로 환상성을 결박한다.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조난 직전에 간신히 불빛을 찾아 무인역에 도착한 대학생 사쿠라와 다카세. 그러나 이미 막차가 떠난 역사 주변은 인적 없는 폐허의 모습이다. 부득이 역사에서 일박을 하려는데 조금 전까지 폐가처럼 방치되어 있던 이발소가 불을 밝히며 영업을 시작한다. 반가움과 호기심에 이끌린 사쿠라와 다카세는 이발소에 들러 느긋하게 샴푸와 면도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푼다. 다음날 첫차를 타고 시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아침을 먹으면서 어젯밤의 일을 회상한다. 그리고 미처 몰랐던 놀라운 사실을 추리해낸다. 

앞뒤 딱딱 맞아떨어지는 산뜻한 코지 미스터리 분위기의 '밤의 이발소'는 확실히 추리소설 마니아와 본격 미스터리 심사위원들의 구미를 만족시킬만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작품은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단초에 불과했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하나의 퍼즐 조각이었던 것이다. 전체 그림을 보려면 퍼즐 조각들을 더 모아야만 한다. 이어지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도플갱어를 찾아서'를 지나고 '포도 별장의 미라주1'에 도착해서야 작가는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작가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 데뷔작이 되길 바라며 야심 차게 집필했을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에 얽힌 이야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전체 그림을 알려주는 퍼즐 조각의 대부분도 여기에 있다. 앞선 세 단편들은 주인공 사쿠라가 연이어 등장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독립된 단편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포도 별장의 미라주1'부터 뒤에 수록된 네 편(포도 별장의 미라주1,2, 잠자는 공주를 파는 남자, 에필로그)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하나의 중편으로 볼 수 있다. 


주성치도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한 기발하고, 기괴하고, 아련하게 향수를 자극하는 인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지적한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이나 장점이 여기서는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미스터리는 존재하고, 논리적인 추리도 등장하지만 그것을 압도하는 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활극, 상상력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모험담이다. 

인어는 왜 잠자는 공주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리고 잠자는 공주는 어느 날 왜 잠에서 깨어났을까. 이 환상적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수십 년에서 수백 년 전의 이야기로까지 거슬러가고, 여러 장소와 인물들을 만나야만 한다. 오래된 별장에 숨겨진 보물, 특이한 유언, 희귀 향수, 도서실, 감옥, 윌리엄 8세의 성, 청부업자, 비밀 통로, 미술품 수집상, 수십 마리의 고양이 등을 만나고 기나긴 모험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수수께끼의 자물쇠가 열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 보다 확장된 의미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에필로그'는 앞선 세 단편들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장으로서의 에필로그를 의미하기도 하며 소설집에 수록된 전체 이야기와 미스터리를 정리하는 의미의 에필로그이기도 하다. 에필로그를 읽고 나면 독립된 줄 알았던 앞선 세 단편도 모두 인어 이야기 속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책장을 덮을 즈음 인어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단어가 주는 묘한 울림과 향수에 대해서.

이 연작 미스터리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찾는다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향수'일 수도 있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소중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고, 멸종해간다. 사라지기 직전의 존재는 언제나 높은 희소가치를 띠며 강한 향수를 발산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들린 밤의 이발소에서 내 뒤를 스쳐간 어떤 것이 바로 그런 희소성과 향수를 지닌 존재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강한 향수를 발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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