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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80년 생 어린 작가가 소설이라는 꿈을 꾼다. 책을 열면, 우리는 그 꿈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꿈은 현실이라는 공기를 잔뜩 주입하고 미지의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거대한 애드벌룬과 같다.
여기에 아홉 편의 꿈이 있다.
꿈은 크게 세 분류로 나뉘어 진다. 먼 유년의 시절로 돌아가는 행복하지만 아련한 꿈, 무섭도록 낯이 익은 일상이 반복되는 꿈같지 않은 꿈,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이끌리는 환상적이지만 허무한 꿈...
그 꿈속에서 스카이 콩콩을 타고 노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만나고, 먼 옛날 잃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젊은 부모님들의 연애를 엿보기도 하며 불 꺼진 가로등 아래에서 집나간 형을 기다리기도 한다. 때로는 그 꿈속에서 편의점을 오가며 획일화된 소비를 하며 스스로를 망각해 가기도 하며 타인의 방을 훔쳐보기도 하고 그 방이 내 방의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그 방주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 또 지하철에서 이상한 자신감으로 다가와 수다스럽게 말을 거는 얼굴을 잊어버린 동창생을 만나기도 하고 그 동창생이 지하철을 나간 후에야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은 완전한 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황당해 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 꿈속에서 종이로 만들어진 물고기를 만나기도 하고 그 물고기의 뱃속에서 소설을 쓰며 행복해 하기도 하며, 자신에게 단 한번 사랑의 인사를 하기 위해 네스호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온 네시를 보기도 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라 먼 과거에 아버지가 잉태한 자신의 형제와 상봉하기도 한다.
이 모든 꿈은 차가운 듯 하면서도 따뜻하고, 무서운 듯 하면서도 행복하고, 아득한 듯 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김애란은 꿈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 낸다. 김애란의 손끝에서 꿈인 듯 현실인 듯 흐르는 글귀들은 조각조각 조그마한 종이가 되고, 포스트 잇 같은 조그마한 종이들은 서로 모이고 모여 사각의 면을 만들고, 면은 다시 여섯 개가 되어 하나의 방을 만든다. 우리는 글로 뒤덮인 방안에서 독특한 경험을 하고, 아련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80년생 어린 작가는 내가 잊거나 간과해 버린, 혹은 상상조차 못한 과거와 현재와 미지의 세계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필요한 실을 모아와 섬세하게 자신만의 문장을 수놓는다. 자신만의 방을 만들어 간다.
수록된 아홉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내내 즐거웠다.
때론 웃게 하고, 때론 몸서리치게 하고, 때론 고개를 들고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소설집에 담긴 아홉 편의 짧은 소설들이... 짧은 꿈들이...
나에게 긴 여운을 준다.
국내 작가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수록된 소설 모두가 만족스러웠던 경험은 별로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손창섭의 ‘잉여인간’,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박민규의 ‘카스테라’, 박성원의 ‘우리는 달려간다’ 이렇게 여섯 권정도... 그리고 이 소설집,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를 일곱 번째로 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