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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평점 :
윤성희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을 거쳐 <감기>에 이르기까지 윤성희의 소설은 점점 더 유머러스 하고, 점점 더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 가고 있는 것 같다. 윤성희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나 주제는 늘 비슷하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더 따뜻하고 환하면서, 더 세심하고 다정한 느낌이 든다. 음지에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식물들을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는 듯한 그녀의 따뜻한 시선은 변함이 없다. 다만 관찰에서 끝나지 않고, 관찰의 대상에게 친구들을 만들어 준다. 식물은 여전히 태양빛이 닿지 않는 음지에서 피어나지만, 이제 많이 외롭지는 않다. 소곤소곤 말을 걸어오는 친구가 있고, 무작정 말을 건넬 수 있는 친구가 있고, 함께 소리 죽여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때로는 보지 않아도 그 상처가 보이고, 듣지 않아도 그 슬픔이 들리고, 상처와 슬픔을 애써 위로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가족 같은 친구들... <감기>에 실린 소설들에는 이런 친구들이, 사람들이 조용조용 숨을 쉬며 살아간다.
윤성희는 대상을 연민하지 않고, 상처를 애써 건드리지도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이해했다고 섣부른 자부도 하지 않는다. 그저 친구처럼 대상의 곁에 있어 줄 뿐이다. 그리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천진난만하게, 한편으로는 능청스럽게...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지기도 한다. 그 사이 현실의 상처를 잊기도 한다. 상처를 극복하지 않고도 떠밀리듯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계속 걷게 만든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비타민 약 같다. 매일 한 알씩 입안에 털어넣어도 건강에 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의 활기를 느끼게 해 주는, 느꼈다고 머리가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인식해 버리는, 그래서 몸이 머리를 이끌고 힘차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효험을 지닌 알약같다. 그저 그렇게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기만 해도, 세상을 살아갈 만 하지 않겠느냐고, 작가는 말없이 말을 전하는 듯 하다.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눈물 질질 짜고, 굳이 오만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고,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에 얽매여 인생이 하나의 상처가 되어 버려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고, 그녀는 친구처럼, 가족처럼, 그저 곁에 지켜 서서, 전혀 엉뚱한 농담과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사실은 그런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것 같다.
우울해 하지 말아라. 애써 우울해 하지 않아도, 우울은 필요하다면 필요한 만큼 니 곁에 머물러 있을 테니... 우울한 것은 우울한 것이고, 너는 또 웃으면서, 인생을 살아가야하지 않겠니, 지금 우울하다고, 인생의 전부가 우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사연 속에 스민 상처의 무게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네 삶이란 다 비슷하다. 알고보면 나와 비슷한 상처를 저 사람도 짊어지고 있었고, 나와 비슷한 슬픔을 저 사람도 느끼고 있다. 알고보면 지상에 발을 딛고 선 사람들은 다 비슷한 일로 고민하고, 아파하고, 이별한다. 그러니 조금만 알고보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위로와 도움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그런 부담을 떠 안길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아니라, 그저 함께 걸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함께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친구, 일상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깔깔대면서 걸어갈 수 있는 친구, 손을 뻗으면 몸이 닿고, 그래서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 주는 친구,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든든함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친구. 돌아보면, 알고보면, 그런 친구는 주위에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친구만 곁에 있어도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과, 용기가 생겨날 수 있다. 윤성희는 이 책에 실린 열한 편의 단편들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