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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청의 문을
구로타케 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구원 없는 세상을 향한 무자비한 숙청이 시작된다.
- 태양빛은 세상 모든 곳에 골고루 비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곳은 일년 내내 습지고 그늘이다. 어떤 곳이라기보다 일부를 제외한 세상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서면 세상이라는 거대한 신문 속을 누비게 된다. 한쪽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한쪽에선 폭력의 핏방울이 튀고, 한쪽에선 교통사고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다.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위태롭게 눈앞을 휙휙 지나가고, 수많은 일그러진 삶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놀라운 사건들이 일상의 풍경인듯 무심하게 세상의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 모든 일들이 '남의 일'에 불과하다면 신문 귀퉁이에 실린 삽화만큼이나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 될 것이다. '나의 일'이 되는 순간 비로소 썩은 악취가 맡아지고, 일그러진 풍경들에 대한 분노가 발생한다. 세상과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뉴스들이란 세상의 풍경 가운데 카메라로 담아 내고, 기자들의 발품이 닿는 곳까지의 작디 작은 조각 모음에 불과하다. 진짜 세상의 이야기는 매스컴의 보도 너머에 있다.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진짜 이야기를 보려면 수면 아래로 들어가야만 한다. 태양이 비치는 곳이 아닌 그늘 속 밑바닥을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세상의 그늘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무수한 벌레들이 들끓고 있다.
눈앞에서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활보하는 인간들의 발자국들로 더렵혀진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마감한다. 신문를 덮어서 멀리 던져버리듯, 세상의 풍경과 담을 쌓고 멀리 동떨어져 살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한다. 하늘로까지 치솟아 오르는 거대한 21세기는 아래로 긴 그늘을 만들어 낸다. 그곳은 태양빛이 닿지 않는, 썩은 내가 진동하는 벌레들의 세상이다. 바로 우리들의 세상인 것이다. 우리라는 '우리'에 갇혀 버린 대다수의 인간들이 '인생'이라는 '삶'을 살아가는 무대다. 잡초가 무성하고 벌레들이 들끓는 음습한 세상의 밑바닥.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그곳에 들러붙어 치사하고, 야비하고, 비겁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그곳에 있다. 높디 높은 저 허공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곤도 아야코 선생은 경찰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학교를 모른다고. 아이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모른다고.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이야기만으로는 그들을 알 수 없다. 한 반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태도로는 진실을 알 수 없는 법이다. 학생들의 실상을 알고 싶으면, 학교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그 안으로, 깊숙한 그늘, 어둠의 심연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줄 알아야 한다. 벌레처럼, 잡초처럼 어둠 속에서 기거하는 대다수 인간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선 그들의 숨소리가 들릴 수 있는만큼의 거리까지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21세의 학생들. 10대라는 나이, 깔끔한 교복과 앳된 외모에 속아서는 안 된다. 굴지의 대기업 총수나 전국구 조직 폭력배 보스가 저지르는 비리와 횡포, 폭력에 맞먹는 강력한 '흉포함'이 그들 속에 도사리고 있다. 21세기의 그늘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몬스터. 괴물은 비단 학생들만이 아니다.
나는 지하철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 장소에서 추태를 부리거나 무례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 과연 어떤 유년기를 보내면서 뇌구조가 어떤 꼴이 되어야만 저런 인간이, 저런 어른이 되는 것일까.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긴다. 그저 분노만 느낄 뿐이다. 분노한다. 물론 그것을 내부에서 밖으로 표출하기까지는 다시 막대한 용기와 책임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어떤 수단을 써도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말하자면 이미 태양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아버린 족속들이라 이제와서 태양 빛에 노출된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환한 태양 아래서 몬스터가 온전히 존재할 수 없듯.
상황이 이러니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세상이라는 신문을 펼쳐 들고 분노하거나, 접고 외면하거나...
분노의 표출로까지 이어지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말했다시피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잡초 몇 개가 뽑혔다고 잡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금방 빈자리를 채우며 더욱 무성하게 피어날 것이다.
10대 폭주족들에게 딸을 잃은 아야코는 분노를 표출하기에 이른다. 아니 그것은 분노라기 보다는 차라리 새끼를 잃은 어미의 본능적인 광기다. '남의 일'이 아닌 '자기 일'이 되는 순간 어미는 미쳐버리는 것이다. 만일 딸이 죽지 않았다면 그러한 광기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의 아야코는 썩은 세상의 신문을 들추지 않고 '외면'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해가 오지만 않았다면, 하나 밖에 없는 딸에게까지 몬스터의 더러운 마수가 뻗어오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외면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딸을 잃은 아야코는 광기에 휩싸인채 폭주한다. 무언가 바뀌길 기대하며 저지른 일이 아니다. 그녀도 알고 있다.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다만 분노이며, 광기이며, 세상을 향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받기만 했던 '폭력'을 다만 조금 되갚아 줄 뿐인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비극'을 담보해야만 하는 일이다. 스스로 폭탄이 되어 세상의 일부분을 파괴시키는 행동이다. 아야코의 폭주가, 광기가 그래서 외롭고 쓸쓸해 보였던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아야코의 행동에 눈곱만큼도 비난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바다. '방황하는 칼날'에서 딸을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10대 소년들을 하나씩 찾아가 처형시키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가족사냥'에서 질서와 윤리가 무너진 타락한 일가족을 차례차례 박멸시켜나가던 해충구제요원을 보면서도 나는 그 끔찍한 살인들에 화가 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광기에 휩싸이게 만든 원인제공자들에게 화가 나고 분노할 뿐이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그린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분노할 수 있고, 외면할 수도 있고, 숙청을 감행할 수도 있지만 구원할 순 없는 것이다. 구원은 없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거리의 곳곳에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고, 21세기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진절머리나는 저 거리, 저 세상은 신마저도 일찌감치 외면해 버린 저주의 땅이다. 태양빛이 닿지 않는 썩은 땅 위엔 희망도, 구원도, 해결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접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기분이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