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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ㅣ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그들이 사는 세상
조직의 정치학
쇼와 64년. 쇼와 시대를 7일 남겨두고 D현경 관할 지구에서 소녀가 유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모든 경찰력이 총동원되어 유괴범을 검거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한다. 유괴범은 돈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지고, 며칠 후 소녀는 차디찬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천왕의 붕어와 함께 쇼와 시대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관계자들의 가슴 속에서 쇼와 64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녀 유괴 살해사건은 D현경에서 풀지 못한 단 하나의 미제 사건이었고, 때문에 '64' 사건은 담당자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사건 후 14년이 흐르고 당시 64 사건의 수사 담당자였던 미카미는 우여곡절 끝에 현재는 D현경 경무부 홍보과에서 근무하는 신세가 된다. 경무부 업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미카미는 형사부로의 복귀를 갈망하지만 현실은 마음 같지가 않다. 당장 무릎까지 산적해 있는 문제들부터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홍보과에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은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현장에서 흉악범을 검거하는 쪽이 차라리 수월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기에 경찰청장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한다. 기자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은 상황에서 경찰청장 방문까지 감당해야 하는 미카미에게 형사부로의 복직은 요원한 일만 같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미카미는 가장 큰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 여고생 딸이 외모를 비관하여 가출한 후 행방불명된 것이다. 미카미는 과중된 경찰 업무와 조직의 부조리에 시달리는 한편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도 혈안이다. 이런 와중에 쓰라린 상흔으로 남은 64 사건을 다시금 헤집고 다녀야 하는 처참한 상황까지 닥친다. 공소시효를 1년 남겨둔 지금 시점에서 다시금 64의 악몽이 되살아나 미카미를 비롯 많은 D현경의 경찰들을 괴롭힌다.
이 소설의 장점은 요코야마 히데오의 전작들에서 보여진 장점들과 거의 일치한다.
그것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장감'이 되겠다.
숨막히는 현장감.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숨막히는 '현장' 한 가운데 서 있게 된다. 그곳은 경찰들의 세상이다. 좋은 소설은 특정 분야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그 안에서 보편적인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일련의 경찰 소설들이 그렇다. 그것이 작품의 장점이며 작가만의 강점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64'에서도 작가는 6밀리 카메라로 밀착 다큐를 찍듯 D현경의 수많은 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삶의 그늘까지 생생히 묻어나는 그들의 일과를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홍보과에서 근무하는 미카미를 둘러싸고 경찰 내부에서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문제는 마찰을 야기하고, 마찰은 분노를, 분노는 혼란을 야기한다. 소설 초반부터 꾸준히 미카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기자들과의 문제가 하나의 큰 축을 차지한다. 사건의 취재를 위해 밀려드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일이 얼마나 까다롭고 애매모호하며, 중대하고도 우스꽝스런 일인지 중년의 미카미는 새삼 깨닫는다. 그들을 상대하는 일은 어린 애들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성가시고 예측불허다. 하지만 그들의 호의적인 도움 없이는 홍보과는 물론이고 경찰 조직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기자와 경찰은 숙명적인 공생관계인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동료 경찰들과의 관계다. 상/하급자, 선/후배, 남/녀 경찰 등의 갈등이나 대립, 알력 다툼 등이 쉼없이 발생한다. 미카미는 형사부 수사과에서 근무하고 싶지만 현재는 홍보과로 내쳐진 상황이다. 형사부로 다시 복직하기 위해서는 인사 담당자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업무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즉 경무부에 충성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무부에 충성을 할수록 형사부와의 관계는 점점 더 벌어진다. 문제는 경무부와 형사부가 알게 모르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고(힘겨루기는 이들만이 아니라, 경찰과 기자, 상급자와 하급자, 부서와 부서, 동료와 동료 등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 미카미는 중간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흉악한 살인사건이나 테러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D현경 경찰 본부는 내부의 전쟁으로 시시각각이 살벌하고 위태롭다.
문제는 미카미만 떠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질식 직전의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기는 D현경에서 근무하는 거의 모든 경찰관들이 마찬가지였다. 미카미의 입장에서는 미카미가 가장 큰 고뇌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찰들이 나름의 문제들로 고민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조직' 사회가 떠안고 있는 문제다. 조직사회 특유의 부조리와 비합리, 모순들...
이 소설은 조직사회가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할 문제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생하는 필요악에 대한 보고서다. 조직사회에서 '조직'은 과연 '조직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귀속되어 있다. 조직 안에서 웃고, 울며, 열정과 의지를 발휘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조직'에 완전히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조직 안에서 나름의 질서와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조직의 모순을 비판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조직의 수뇌부에 올라서고 보면 그 모든 조직의 불합리와 부조리한 '문제'들이 타당하고, '필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것이 없으면 조직이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것만 같다. 조직원들의 불평, 불만, 고민, 갈등은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조직의 불합리와 모순들이 사리질 수 없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조직원들을, 그리고 조직을 그나마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필요악'이기 때문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흥행에 성공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도 어쩌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조직을 극복하려 힘쓰지만, 누군가는 조직을 유지하려 힘쓴다. 누군가에게 조직은 끔찍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조직은 사명이다. 이들 모두가 어쨌거나 조직 안에서 존재하고 있기에 조직은 굴러가는 것인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미카미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어떤 인물의 태도가 작의를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경찰 조직을 해부하며 그 정치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보편적인 조직의 정치성이며, 세상의 정치성인 것이다. 개개의 구성원들이 모여 조직을 만들고, 조직은 정치를 야기하고, 정치는 구성원들에게 필요악이 되는 것이다. 정치가 싫어도 조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며,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4'는 추리소설로 분류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찰소설'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제3의 시효'를 통해 경찰소설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는 요코야마 히데오는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번 경찰소설만이 갖는 매력과 가치를 확실히 전달한다. 난무하는 추리/미스터리 소설들 속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역할을 제대로 보여준 수작이다. 말하자면 '탄생의 이유'가 명확하기에 확실한 감동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작품이다.
미카미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경찰 내부는 끊임없는 문제와 갈등으로 흔들리지만 그들은 부딪히고 비틀거리는 과정 속에서 각성하고, 묘한 질서와 체계를 잡아간다. 조직은 그렇게 면모를 유지해가고, 때가 되면(위기가 오면) 서로 뭉쳐 특유의 힘을 발휘한다. 64 사건의 공소 시효가 1년을 남긴 시점에서 다시금 14년 전과 유사한 소녀 유괴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은 14년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돈을 요구한다. 조직 내부의 문제들로 반목과 갈등을 되풀이하던 경찰들은 그러나 64 사건의 재현 앞에서는 조직력을 발휘한다. 질투와 시기와 모순과 불만 따위는 잊고 오직 소녀를 구하기 위해,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아직도 막을 내리지 않은 채 미완으로 남아 있는 쇼와 64년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순수하게 분노하며, 분투한다. 이 대목에서 서사는 장르적 힘을 발휘하며 예상치도 못한 반전을 터뜨린다. 슬픔과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감동적인 반전도 무척 좋았으나 나는 반전보다 역시 '현장감'에 더욱 도취되었다. 요코야마 히데오가 그려내는 '현장감'의 매력은 정말 이 소설만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구상부터 탈고까지 10년이 걸렸다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정도의 노고과 열정이 생생한 '현장감'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그야말로 필생의 역작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