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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 소설집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모호함'이다. 얼마나 더 성숙해졌는가는 모르겠지만, 이전 소설들에 비해 훨씬 더 모호해 진것만은 느낄 수 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좀 속 시원히 드러내놓고 할 것이지, 왜 자꾸 다른 것들에 빗대고, 비유하고, 다른 무언가를 끌어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둘둘둘 감싸 버리는 것인지... 겉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가 너무 두꺼워 그것을 풀다가 도중에 지쳐 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끝내 파악하지 못 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심정으로 여섯 편의 소설들을 읽은 것이다. 그러니 다 읽고 나서도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듯 뭔가 개운치 못했다. 문장들이 사고의 이곳저곳으로 원활하게 퍼져 내 몸속에 온전히 녹아들지 못 하고, 며칠이 지나 단단하게 굳은 돌떡처럼 거북하게 가슴께를 찌르며 떠돌기만 한다. 당연히 충만한 감동도 없었다. 무언가 겉만 핥다가 뱉어버린 느낌이다.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들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느순간 이상한 세계로 들어와 이상한 암호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막막한 기분이 들곤 했다.
표제작이기도 한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서른 다섯 살의 한 뚱보 청년이 어느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통보를 받고 불현듯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일상과 심중의 변화를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이 바로 거북함의 예를 제대로 보여준다. 뚱뚱한 삶에서 변화를 추구하고자 몸부림 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은유로 나타내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은유의 의미가 선뜻 가슴에 와 닿지 않아 그냥 필사의 집념으로 살과의 전쟁을 벌이는 일반적인 뚱보의 비애로밖에 읽혀지지 않았다. 비너스가 자꾸 등장하고, 죽어가는, 끝내 죽고 마는 아버지와 살을 빼려는 뚱보 청년 사이의 인과관계가 무엇인지 소설의 마지막 한 줄을 읽고 나서도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단편들도 대게가 그렇다. '고독의 발견'과 '지도 중독'은 참 모호한 소설이다. 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또렷하게 말하지 않는지... 자꾸 어딘가에 감추고 파묻어 두려 하는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작가로서 기품이 없고, 실력이 없고, 덜떨어진 취급을 받는 것일까... 의미를 이야기 속에 숨기고 싶으면, 이야기 자체의 힘이라도 출중해야 하는데, 이들 단편들은 그렇지도 않다. 가령, 모파상이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힘으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첫번째 단편인 '의심을 찬양함'은 아멜리 노통브를 연상시킬 만큼 대화가 주를 이루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마치 잘난 척 대결이라도 한판 벌이는 것처럼 제법 폼을 잡으며 대화에 날을 세우지만 엉뚱한 곳을 겨누고 있는 듯 핵심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n때문에 저들이 저토록 신랄한 언쟁을 벌이는지, 작가는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중간 쯤 읽다보면 그냥 멍 해지는 기분이 들며, 어쨌거나 빨리 하나의 가닥을 잡아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만을 바라게 된다.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서 그나마 오디오 북으로까지 제작되어 함께 딸려온 날씨와 생활만이 단번에 쉽게 읽히고 의미의 파악도 명료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 소설집에 실린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 되었다. 과거의 은희경이 느껴지는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이 소설집을 읽기 전에 유감스럽게도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들을 세 편이나 연달아 읽었다. 너무 열광적으로 몰입하고, 감동하며 세 편을 읽은 후에 곧바로 이번 은희경의 소설집을 읽은 터라 어떤 반사적인 불만이 발동했고, 그래서 실망감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고타로의 '칠드런'에 실린 다섯 편의 중편들은 하나같이 이야기도 재미있을 뿐더러 의미의 전달도 명확하다 못해 명쾌했으며, 라스트에는 모두 놀라운 반전까지 겸비해 그야말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200% 만족시켜줬기 때문에, 은희경의 소설집을 읽을 때는 별안간 저 어두운 골짜기로 아득히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희경은 지금까지 아홉 편의 책을 냈고, 나는 그 아홉 편을 모두 사 읽었다. 일곱, 여덟 권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거의 의무적으로 읽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다음 작품은... 글쎄...
모르겠다. 막상 나오면 습관적으로 또 사게 될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