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밥상에는 슬픔이 없다
정제성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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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의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에는 사랑만 가득하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나이!
치매를 앓는 남편을 병원에서 빼와 간병을 하면서도 여전히 따시고 정성스런 밥상을 차린다.
그게 엄마다. 그런 엄마를 두어서 좋겠다고 아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한다고 했다.

 

환갑의 나이에 노모가 차려주는 밥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첫번 째 일 것이고
더구나 오랜 내공이 깃든 범상치 않은 맛으로 차려진 밥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고장날대로 고장나버린 몸뚱아리를 힘들게 일으켜세워 죽어가는 남편에게 생명의 줄을
더 붙잡게 하고 입맛 까다로운 자식이며 친척, 지인들까지 챙기는 주인공 어머니는
프랑스의 여전사 '잔다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오랜 숙적이었던 이웃나라를 향해 어린 몸을 이끌고 전장으로 향했던 잔다르크처럼
죽어가는 남편을 등뒤에 세우고 사신(死神)과 맞서고 흐려지는 정신을 똑바로 일으켜세우면서
여전히 손주들 생일까지 기억해내는 전투력에 텃밭을 진두지휘하며 밥상이라는 전선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모습이 바로 여전사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냉장고 몇 번째 칸에 무슨 반찬이 있고 장독안에 언제 담가둔 장아찌가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더구나 그걸 나누어갈 사람의 취향까지 기억하는 노모의 정신력은 정말
가능한 것인지 읽는내내 놀랍기만 했다.
아내만 찾는 병든 남편이 가능하면 기억을 더 잃지 않도록 추억하나라도 더 떠올려 시간을
되돌려보려는 노력은 눈물겹다. 아니 눈물겹다 못해 치열하다.
아무리 순하게 왔다 하더라고 치매는 치매인데 그 변덕스러움과 괴팍한 성격은 고사하고
배설물을 치우고 병자를 간호하는 일이 구순의 노모가 어찌 견디기 쉬울 것인가.
환갑의 아들은 겨우 주말에 내려와 힘든 일이나 거들다 올라가는 현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래도 자신이 할 일이 너무 없어서. 어머니의 99%의 역할이 너무 안쓰러워서.

스러져가는 몸뚱이와 정신을 붙들어가며 여전히 시골 본가를 의연하게 진두지휘하는
노모의 모습에서 모성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소박한 재료에서 찾아내는 오묘한 맛으로 밥상을 차려내는 재능에 놀라게 된다.
도시락의 재질이 형편없던 시절 운동회때 싸준 기가막힌 도시락의 향연을 보니 지금
잘 나가는 유명쉐프의 감각에 전혀 뒤떨어짐이 없다.
음식 잘하는 아내는 소박이 없다는 말이 있다. 현명하고 부지런하고 음식솜씨까지 좋은
어머니를 두었으니 남편이나 자식들은 그야말로 왕행운아인 셈이다.
하물려 사돈의 팔촌까지 챙겨보낼 음식을 만들어내는 배려심은 흉내내기도 힘들다.

환갑의 아들은 베이비붐세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교사를 지낸 아버지 덕분에 심각한
가난은 겪지 않았지만 가난한 조국에서 힘들게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하여 그래도 효자소리를
듣고 앞길을 잘 챙겨온 세대.
하지만 이제 점점 생명의 불이 꺼지고 있는 부모세대를 챙겨야 하고 아직 자립하지 못하는 사회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세대는 여전히 어깨가 무겁고 과연 자신의 노후에는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워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식들은 나를 챙겨주지 못할 것이고 몸도 마음도 삐꺽거릴 그 시간에
나는 치매걸린 아버지나 몸뚱아리가 무너져버린 어머니처럼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 날이 오면 미국의 늙은 부모처럼 산소통을 자동차에 싣고 스스로 병원을 찾아가는 지경이
되지나 않을까.
아니 스스로 찾아갈 정도면 행운아다.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요양병원같은데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지.
아들은 의사인 친구와 이미 그렇게 스러져간 부모의 모습을 닮을까봐 걱정스럽다는 대화를
나눈다. 역시 지금 나의 고민이 겹쳐진다.

하지감자를 밑에 깔고 갈치를 알맞게 조려내고 잘 익은 열무김치를 보리밥에 쓱쓱 비며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아직은 언제라도 달려가 어머니의 밥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환갑의 나이에.
참 부러운 이야기다. 세월의 냉정함이야 누구든 비껴갈 수 없으니 언젠가 육신의 고통을
내려놓고 훌훌 오신 곳으로 돌아갈 아버지의 시간들을 묵묵히 견딜 수 밖에.
그리고 이미 우리도 그 곳을 향해 서서히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아 문득 어린시절 쪽마루밑 아궁이에서 끓고 있던 동태찌개맛이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나는 여전히 잠을 떨치지 못하고 아랫목 이불에 몸을 숨기고 있고 마당에서는 엄마의
종종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던 그 시간.
코를 간지럽히는 찌개의 구수한 그 맛을 언제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리고 난 내 자식들에게 어떤 음식으로 추억을 물려줄 것인가.
잔잔하지만 그리움이 가득한 마당에 앉아 맛깔스런 밥상을 받은 것 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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