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크리스마스에도 거리엔 캐럴이 울려퍼졌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잊었던 사랑의 불씨를 피어오르게 하는 캐럴을 듣다보면 어느새 한해가
저물어가는 아쉬움이 들곤 했다.
주원규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사실 이런 크리스마스 캐럴과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 소설에서 가장 선했지만 가장 불행했던 한 소년이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가 캐럴이었기에
제목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피가 튀고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이 너무 리얼하고 끔찍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것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폭들의 피튀기는 현장이 아닌 소년범들이 수감되어 있는 소년원에서의 폭력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말
이런일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어제 국정농단의 원흉인 최순실을 만나러 국회의원들이 서울구치소를 방문하는 장면에서 공권력의 허술함이
느껴지긴 했었다.
TV만 틀면 쏟아지는 단어의 주인공때문에 나라꼴이 개판이 되었는데 정작 당사자는 큰 독방에서 보호받는 느낌이 든다.
단두대가 있던 시대라면 당장이라도 목이 떨어질 죄인이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죄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 현실.
그리고 죄인을 가두는 구치소의 어이없는 현실들. 소년원에 수감된 소년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성폭력과 폭행의 현장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건
또다른 지옥의 모습임이 틀림없다.
정신지체 3급판정을 받은 열 여덟의 소년 주월은 어느 날 심한 폭행을 당하고 아파트 저수조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임대아파트에서 집나간 부모를 대신하여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와 쌍둥이인 주일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눌하지만 선했던 소년을 과연 누가 해친 것일까.
졸지에 가장이 된 주일은 학교를 자퇴하고 돈을 벌기 위해 철거현장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른다.
주월이가 죽던 그 날도 주일이는 현장에서 피를 묻히고 있었다. 그 날 주월이가 애타게 눌렀던 휴대폰을 받았다면 주월이는 죽지
않았을까.
할머니마저 싸늘한 방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자 주일이는 세상을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괴물이 되기로 한 것이다.
주월이의 마지막 전화에서 들리던 일진의 목소리들. 그 아이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주일 역시 소년원으로 향하기 위해 의도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그렇게 일진의 아이들과 마주서게 된
주일.
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교정하기 위해 머무는 소년원의 풍경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교정선생 한희상. 그가 바로 괴물 그 자체였다.
일진의 아이들조차 한희상의 폭력에 기를 꺽이지만 일진의 우두머리 문자훈의 지시로 주일우를 처리하기 위해 투입된 고방천은 한희상마저
꺾어버린다. 그리고 서서히 일우을 없애기 위해 다가드는데..
우리는 실제 연쇄살인이나 성범죄가가 의외의 얼굴을 하고 우리 주면에 함께 살고 있었음을 알게된다.
선한 양의 탈을 쓴 변태성욕자의 탐욕은 불쌍한 소년을 죽음으로 몰고가고 그 사건에 얽힌 아이들은 서로가 죽음을 무릅쓰고 폭력을 가한다. 그
사이에 어정쩡한 어른들은 무관심을 넘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현실이라면 세상에는 괴물이 너무도 많다.
인간이기를 거부한 말종들의 삶을 답습하는 소년들의 치기는 단순히 넘기기 힘들다.
장애를 가진 쌍동이 형제를 바라보는 일우의 모습도 이중적이다. 오히려 자신도 일진의 아이들처럼 월우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복수를 하기 위해
괴물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형제애보다는 세상을 향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범인은 가장 가까운 곳이 있다'는 것을 막판에 입증했지만 뒷맛은 영 개운치 않다.
소년원내에서의 폭력과 동성애장면같은 것은 차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문제는 이게 소설안에 이야기만이 아니라면 세상은 온통 괴물들의 놀이터이고 우리곁에 너무 많은 괴물들이 함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