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이 있다. 예전에 비해 가지도 많지 않은 나무에 폭풍이 가실 날이 없다면.
72세 전직 치과의사인 히다 류타로는 은퇴 후 틀니를 만들고 바둑을 두는 일로 소일하고 있다.
66세인 아내 하루코와는 큰 잡음없이 노후를 보내고 있고 다만 아흔이 넘어 치매를 앓고 있는 장모 다케를 모시는 일이 좀 부담스럽긴
하겠다. 큰 딸인 이쓰코가 남편인 소스케의 사업실패로 다시 집에 들어오게 되고 둘째 딸인 도모에게 이혼 후 다시 본가로 들어오는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조용했던, 아니 조용해 보였던 집구석은 다시 번잡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길어지는 불황에 사업실패는 흔한 일이고 한집 걸러 이혼이 대세인 요즘 이혼하고 다시 돌아온 딸도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임신이라니...더구나 헤어진 사위의 아이가 아니라고?
동거는 필수도 임신은 선택이라는 요즘같은 세상에 사건아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미혼모가 된 둘째 딸의 귀환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나이
서른을 먹도록 방구석에 박힌 막내아들 가쓰로는 또 어떻고.
사실 가쓰로의 존재는 히다 집안에서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가쓰로 자신도 그렇게 잊혀진 인물이 된 것이 더 편할 지경이 되었다.
가쓰로의 방안에서 무슨일들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저 여전히 살아있다는 정도만 인지될 뿐.
치열하게 사춘기와 싸우고 있는 소스케와 이쓰코의 외아들 사토루는 나름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
명문중학교에서 졸지에 일반 공립 중학교로 전학, 아니 전락해버린 사토루는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공립 중학교 서바이벌 메뉴얼'을 만들어
실천중이다. 결코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라. 나름 사회생활 계획성이 있다.
친정엄마 다케를 성심껏 돌보고 있는 하루코는 전형적인 일본 엄마의 모습이다.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열심히 키워낸, 자신의 삶보다는 가족의 삶을 우선했던 하루코는 오랜만의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불행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얼핏 부러워보이던 친구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들도 하루코의 벼락같은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조금 안심이 될 정도이다. 사위의
파산으로 동반자살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도모에의 요상스런 임신도 생명의 소중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 하기로
했다.
이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 있던 가장 류타로는 제멋대로 들어왔다가 또다시 나갔다를 반복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인 양 자기 멋대로인 가족들을
보며 울분을 느낀다. 하지만 이제 류타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지켜봐주는 수밖에.
그나마 실패한 인생을 만회해보려 다시 들어온 가족들에게 방이라도 내어줄 수 있음을 다행이라고나 할까.
히다의 가족들은 전혀 특별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이웃일 수도 있고 아니 내 가족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인생의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갑작스런 고난으로 잠시 휘청거렸을 뿐이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다시 품어주고 힘을 주는 것.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다시 자신을 길을 찾아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히다씨네 집 울타리안에 얽혀있는 사람들로 봤을때는 다들 한심해 보였던 모습들이 각자의 눈으로 풀어쓴 글을 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던 흔적들이
느껴진다. 그리고 스스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어가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나도 돌뿌리에 넘어지고 험한 산을 넘어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렇게 품어주는 가족들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게다.
오래전 전쟁을 겪은 세대부터 스마트폰 세대에 이르는 다양한 세대가 앓고 있는 어려움을 아주 잘 짚어낸 수작이다.
겉 도는듯 해도 결국 뭉칠 수 밖에 없는 따뜻한 가족들의 모습을 잘 풀어냈다.
우리와 비슷한 문화를 지닌 일본의 가족적인 모습이라 더 공감이 컸다.
열심히 산다고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래도 여전히 힘든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건 가족임을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