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정도전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는 김종필이 있었다.
김종필이 35세 되던 1961. 5. 16일 대한민국의 역사는 다시 씌여졌다.
바로 그해 내가 태었났고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시간과 함께 살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김종필은 대한민국 국무총리였다는 것이다.
증언록을 읽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지나쳤지만 나는 왜 그를 '국무총리'로 기억할까.
근엄한 얼굴에 충청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얹어서 느릿하게 말하던 모습이 겹쳐진다.
그에겐 JP라는 이니셜과 정치9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대한민국이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 지도를 보면 알 수있다.
그런 대한민국의 정치색은 참 아롱이 다롱이같았다. 대구,경북이 어떻고 광주,전남이 어떻고 충청도는 또 어떻고...
난 지금도 TV뉴스에서 정치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린다. 한창 총선을 앞두고 시끄러운 정국을 보면 정치판은 JP의 말처럼
허업이라 여겨진다. 진정한 동지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고 언제든 이합집산이 가능한 집단이라 여긴다.
그리고 선거철만 되면 고개를 조아리고 한표를 부탁하던 그들이 국회에 나가면 그렇게 찌질한 인간들이 될 수가 없어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헛짓들을 일쌈는 그들이 괘씸하기만 하다. 정말 투표가 하기 싫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제는 노회한 정치가의 증언을 듣자니 대한민국 정치의 역사가 숙연하게 다가온다.
조선 태조 이성계도 처음에는 왕의 꿈은 없었다고 한다. 역사가 그를 선택했다고 하는 편이 더 맞다고 생각했는데 대한민국이 박정희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조선의 진정한 주인은 정도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듯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 뒤에는 김종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이
증언록을 통해 알았다.
모든 리더의 뒤에는 책사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책사를 두느냐에 따라 영웅도 되고 패자도 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박정희는 행운아였다.
누군가는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일갈하지만 JP의 주장대로 지금의 대한민국의 발전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여고시절
중간고사를 보고 있을 때 박정희의 유고소식을 들었다. 박정희가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JP의 증언대로 육영수 여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말도 많도 탈도 많은 중앙정보부를 JP가 만들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가 생각한 초심의 중앙정보부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그런 기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뒤이은 권력들은 사적인 욕심으로 기관을 이용하는 등 부작용이 속출했다. 지켜보는 JP의 심정이
아득했을 것이다.
전에 구렁이 담넘어가는 듯 으뭉스럽게만 느꼈던 JP가 얼마나 지략이 많았던 책사였는지 새삼 다가온다.
고집스럽게 내각의원제를 주장하고 꿋꿋하게 박정희 대통령을 대한민국의 진정한 지도자임을 알리려는 그의 노력이 진정스럽다. 이제와서 그가
거짓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편집후기에서 JP는 역사라고 한 말에 동감한다.
구순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건립부터 발전되어온 모든 시간을 지켜본 어른으로서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속에 담긴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대한민국바라기'라고 말하고 싶다.
단 한순간도 조국의 미래와 영광을 생각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그의 말처럼 공도 있고 과도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가 읽었던 수많은 역사서, 영웅전 앞에서 언젠가 자신이 선택했던 수많은 길들이 결코 부끄럽지 않았노라고 증언한다.
한학에서부터 음악, 미술등 다재다능한 그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정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얼마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쓸쓸히 자택을 지키고 있을 노구의 정치인 JP의 모습이 안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꿋꿋히 소신껏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어른으로서의 모습이 멋지다.
그의 말처럼 그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평가는 언젠가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고 믿는다.
건강하게 오래버티셔서 찌질한 정치인들에게 매를 들어주기를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