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 길고 느린 죽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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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는 열 아들을 잘 키울 수 있지만 열 아들은 한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응석을 받아줄 것만 같은 부모님들이 우리곁을 떠나기 시작한지 10여년 정도가 된 것같다.

처음에는 아버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더니 작년부터 어머니들의 부고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아버지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글쎄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너무 심해서였을까?

지금도 지인들중 9순을 넘기고 있는 부친을 둔 경우는 거의 없는 것같다.

아흔 두 살의 연세로 세상을 떠난 작가의 아버지는 상당히 장수를 누린 셈이다. 보낸 가족의 입장에서보면 100수를 넘긴 들 아쉽지 않을리가 없겠지만 그만하면 평균수명이상을 살다 가신 것인데 문제는 얼마를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잘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닐까.

 

 

어머니와 늦게까지 해로하시던 아버지는 여든 여덟 살이던 해에 병석에 들어 아흔 두 살의 연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석에 들기전까지는 관절이 안좋아서 걷는 것이 조금 불편했지만 정신도 또렷했고 새벽에 먼저 일어나시면 밥도 직접 하실 정도로 건강하셨단다. 하지만 노인네들은 하루가 다르다고 하더니 갑작스런 고열로 시작된 병원행은 겨우 열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고만다.

아무래도 연세가 많았던 것같다. 그즈음은 이미 죽음의 경계선을 살짝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오랫동안 자식곁에서 건강하게 살아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이다.

 

 

각기 바쁜 자식들을 대신하여 조금쯤 자유로운 작가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병구원을 떠맡게된 것이 한편으론 행복한 일이 아니었을까.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섬망증세로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는 아버지를 돌본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마는 그래도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세세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깐깐했던 노인네가 오줌줄을 끼우고 기저귀를 차고 대변을 받아내는 현실이 얼마나 못견디게 싫었을까. 어느 누구도 자신이 나이들어 그런 모습으로 마지막길을 장식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도 아무런 구체적인 지침을 남기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다루기 고약한 면이 있다.

나는 아버지가 건강할 때 스스로 우리들에게 어떤 지침을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본문중에서

그렇다. 재작년 막내동생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간절하게 후회했던 것이 바로 이 것이었다.

병원에 걸어들어갈 때만 해도 불편한 고관절만 나으면 바로 퇴원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걷기가 많이 편해지고 퇴원을 눈앞에 둔 어느 날 갑작스런 고열에 정신이 혼미해진 동생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항생제치료에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 중에 의식을 잃고 말았다.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의식이 있었고 대화도 가능했다고 한다.

나에게 연락이 왔을 때는 이미 기관지에 관을 삽입한 후여서 대화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의식은 있어서 눈짓이나 고갯질으로 소통이 가능했다는데 겨우 며칠 후 의식을 놓고 말았다.

나는 연락을 받고 며칠 후 싸하는 예감에 휩싸여 급히 제부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두번 있는 중환자실 면회가 되면 기관지에 꽃은 삽관을 떼어내고 동생의 이야기를 꼭 들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제부는 치료중인 관을 어떻게 떼어내느냐며 곧 좋아져서 나갈 사람 에게 마지막을 생각하라니..가뜩이나 아내의 병 때문에 정신이 없던 제부는 나에게 서운하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글쎄 내가 독하고 인정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동생은 병원에 입원하고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는 순간에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기관지에 관을 꽂고 말이 끊어지면서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잠시...정말 잠깐만이라도 관을 빼고 마지막 말을 나눌수 있었더라면 그 뒤 의식을 잃고 며칠 더 산 시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시간이 되었을텐데..

 

 

동생의 죽음 이후 나는 심각하게 내 사후의 문제, 혹은 의식을 잃고 내 의견을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작년부터인가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방법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왔었다.

주변에도 의식없이 몇 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가족들에게 엄청난 고통만 남기고 떠난 경우를 봤기에 탄생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죽음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면 존엄한 죽음을 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전의향서'라는 제도가 있음을 알고 나는 뇌사상태에 빠지면 호흡장치를 달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심폐소생술도 하지 말아달라고 적고 아이들에게도 당부를 해두었다.

작가의 아버님도 여든이 넘어갈 무렵 정정하셨을 때 미리 이런 대비를 해두었다면 자식들의 고통이 조금쯤을 덜어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참 대단하다. 덩치도 크셨다는 아버님을 위해 기저귀를 갈아주고 관장을 하고 밤새 뜬눈으로 병상을 지킨 아들이 몇이나 있을까. 몇 번의 입원으로 나는 병원생활이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다. 가뜩이나 까칠하고 비유가 약한 나는 절대 이 아들처럼 병상을 지킬 자신이 없다. 작가가 남몰래 알아본 요양원을 진즉 선택하여 짐을 덜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8순이 넘은 노인의 고열만을 주목하느라 정작 발의 근육은 무방비 상태로 두어서 결국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정신적인 치료역시 병행하지 못해 섬망증세로 환자와 보호자 모두 고통스럽게 방치한 의료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우니라나는 언제나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베이비붐세대로서 고작 10년 후면 노년의 시간에 진입한다. 그러나 나 역시 내 죽음에 아무 자신이 없다.

팔팔하게 살다가 삼일 동안만 앓고 죽자는 우스개소리는 절대 우스개소리가 아니다.

내 스스로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이 온다면 나는 아주 고통스런 마지막을 겪고 가족들을 고통속에 빠트린 줄도 모른 채 허망한 시간들을 보내다가 지긋지긋한 삶을 놓을 지도 모른다.

내가 낳고 키운 자식들은 절대 내 기저귀를 갈아주며 병상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바라지도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점점 상실해가는, 아버지로서의 성이 무너져가는 것을 아프게 지켜봐야 했던 4년여의 시간에 고개를 숙여 존경을 보낸다. 작가도 나도 인간의 존엄을 지닌 채 마지막을 맞을 수 있는 행운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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