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전'이 별주부전이나 전우치전같은 전통고전이었는데 놓친 책인줄 알았다.
소설의 무대는 서기 391년에서 412년 무렵의 시기이고 한반도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와 가야국을 비롯하여 지금의 경상남도 서북부지역의
다라국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와 손을 잡았고 백제는 가야국과 손을 잡고 전쟁을 한바탕 치루고 치열하게 대치중인
시절이었다. 백제의 아왕은 이미 한 차례 전쟁에 진 후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하고 겨우 고구려의 눈치만
살펴야하는 서러운 신세로 전락했지만 복수를 하기 위해 은밀히 전쟁을 준비중이었다.
아왕은 백제의 귀족들에게 고구려와 다시 전쟁을 하려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른 백제는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져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한 귀족들은 대거 백제를 탈출하기에 이른다. 이 때 백제의 귀족인
협지도 아내와 노비인 사가노를 데리고 탈출무리에 합류한다.
원래 사가노는 한강 근처에서 고기를 잡고 회를 뜨는 사내였는데 워낙 회뜨는 솜씨가 출중하여 소문이 자자했었다.
하지만 백제의 국운이 기울자 손님이 끊기게 되고 먹고 살 방법이 없자 손님이었던 협지에게 찾아가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여 자진노비가 되었다.
출중했던 음식솜씨 덕분에 협지네와 함께 가야국을 거쳐 유구국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피난민들이 워낙 많자 사공들은 과도한 재물을 요구하고 협지는 많은 재물을 주고서야 배에 오르게 된다.
큰 기대를 품고 가야에 도착했지만 몰려든 피난민들로 해서 거렁뱅이가 넘치고 가지고 있던 재물도 모두 잃은 후 협지는 노름에 빠지고 결국
사채를 끌어다 쓰다 사가노를 귀한 장군의 묘에 같이 순장하는 곳에 팔아넘기게 된다.
한편 가락국의 명문인 출씨 집안의 딸인 랑랑은 고명딸로 고이 자란탓에 고집이 세고 억세기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장사로 돈을 번 출랑랑의 아버지는 백제와 고구려의 싸움터로 향하고 그 뒤 소식이 끊어진다.
출랑랑은 어려서부터 고구려의 무사에게 배운 칼솜씨로 비록 출신성분은 비루하나 수완이 좋아 큰 돈을 번 용녀의 수하에 들어가 칼을 쓰는
무사로 살아가게 된다.
배를 타고 바닷길을 누비면서도 혹시나 아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촉을 세우던 출랑랑은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 부하들을 모은 후 바다를
떠도는 도적 두령 '마귀모주'로 불리며 신화적인 존재가 된다.
자신의 집을 망하게 한 옥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옥왕에게 향하던 출랑랑은 옥왕을 죽이기 직전 위기를 맞게 되고 목숨을 내어주면 아비를
찾아주고 평생 편안하게 살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출랑랑는 역적질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미 죽어 뼈가 된 장군의 부인묘에 순장되고 만다.
이렇게 사가노와 출랑랑은 장군과 장군부인의 묘에 순장되면서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출랑랑의 기지로 무덤에서 겨우 살아난 사가노는 출랑랑을 구출하여 함께 복수의 여정에 오른다.
마치 홍길동전을 보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출랑랑의 멋진 칼솜씨와 그녀가 휘두르는 명검 봉문도와 용봉도의 칼날이 느껴지는 듯하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오히려 여성의 지위가 훨씬 높았던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에서 큰 세력을 움켜진 여자 용녀는 '고용된 사람'이란 뜻으로 신분이 미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큰 야망을 품고 결국 가락국의
왕비가 된 보통 여자가 아닌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 출랑랑은 그저 말괄량이로만 말하기에는 부족할만큼 도저히 함부로 볼 여인네가 아니다.
출중한 칼솜씨며 거창한 말솜씨..오죽하면 '마귀모주'로 우는 아이까지 울음을 멈추게 했다지 않은가.
백제의 아왕이 용녀가 보낸 검에 써보낸 문구가 무엇인지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 궁금증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처럼 훌륭한 판관으로 나오는 하한기는 가야 지역의 벼슬아치로 이를테면 다라국에 망명한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죄인들을 잡아들이는 병졸로 활약했지만 항상 죄를 공정하게 밝히고 처벌하는 것으로 칭송을 받게 되어 역적으로 몰린 사가노와 출랑랑을
취조하게 된다. 역사서에는 하한기가 이름이라기 보다는 존칭이나 관직이 이름이 아닐까 추측한다.
실제한 역사와 픽션을 교묘하게 어우려 진짜 고전을 탄생시킨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어린 시절 김해지역을 여행하다 모티브를 얻었다는데 스토리를 풀어내는 솜씨가 그저 재능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사료를 찾아내어
완성시켰으니 노력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다.
더구나 여리고 정직한 사가노와 왈가닥 출랑랑의 복수의 여정은 정말 흥미진진하다.
띠지에는 영웅의 역사가 아닌 패배자들의 역사라고 했지만 사가노와 출랑랑은 결코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라고 생각한다.
아주 치밀하고 날카로운 풍자가 인상깊은 역사소설...오랜만에 훌륭한 작품을 만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