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시대이다. 경제적인 불황에, 문화적인 불황에 마음마저 얼어붙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사실 이럴 때 일수록 마음을 채워주는 책이 많이 팔려야 하는데 출판업계는 거의 빙하시대 수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치는 독자들이 있다는 건 다소 희망이 느껴진다.
제목처럼 바로 이런 시대가 '소설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과연 내가 다 읽었던 것인지
가만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읽었던 책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가물가물해지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뇌는 제기능을 다 발휘하지도 못한다고 하지만 기억력 역시 늙어가는 것인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아진다.
저자인 엘라 베프투와 수잔 엘더킨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누군가에게 상황에 맞는 책을 권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북테라피'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로마테라피'같이 책으로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책 권하는 사람'이 되었단다.
그녀들의 책권하는 솜씨는 디테일을 넘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물론 독자가 원하는 책을 권하려면 수천권의 책을 읽었으리라 짐작된다.
더구나 그 책의 내용이며 색깔 분위기까지 기억해내는 재능은 거의 천재적인 수순이라고 봐야겠다.
'맹장염에 걸렸을 때', '감기에 걸렸을 때', 심지어 '치질일 때' 필요한 책까지 권하는 수준이니 그 디테일이라니..
지금도 나는 대형서점으로 소풍가는 일이 가장 즐거운 나들이라고 여긴다. 그득하게 쌓인 책을 보면 안먹어도 부자가 된 것같고
책을 읽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만큼 책과의 만남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그렇게 실컷 눈요기를 하다가 무심코 집어들어 읽기 시작한 책들은 대부분 그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책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이 싫어질 때'-사실 이런 경우가 너무 많아서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고민해본적도 많다.
여기서 권하는 책은 '토마스 만'의 '거룩한 죄인'이란 소설이다. 주인공 그레고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와 결혼을 했고
심지어 남매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결국 그의 어머니 아버지는 남매였다는 사실)
오이디푸스왕과 비슷한 스토리로 끝날수도 있었지만 그레고리는 속죄를 위해 섬으로 떠난다. 그리고 스스로를 바위에 족쇄를 채워
고행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결국 고슴도치정도로 줄어든 그레고리는 교황이 선종하자 뒤를 이어 교황에 오르게 된다.
다음 교황은 섬에 있다는 양들의 예지로 육지로 오게된 그레고리는 예전보다 더 잘생기고 빛나는 사람으로 돌아온다.
마침내 그레고리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교황 중 한 명이 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가장 빛나는 지성과 인물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바위에 족쇄를 채우고 있는 자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하는 내용이다.
이렇듯 두 명의 저자들은 아주 꼼꼼하고 빡빡하게 어떤 경우도 지나침이 없도록 격에 맞는 책을 알려준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여러 상황들, 예를들면 읽던 책을 중간에 덮기 힘들다거나, 혹은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거나, 책꽂이에
책이 자꾸 줄어든다거나 하는 간서치들의 고민들까지도 조목조목 조언해주고 있다.
심지어 '오르가즘을 충분히 느끼지 못할 때'에 권하는 책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넘어서 '푸주한'이나 '발가벗은 신부'같은 다소
음탕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권하고 있다. 흠 잠자리에 잘 챙겨두고 책에서 나온 장면을 적용해보라니...슬쩍 얼굴이 붉어진다.
'북테라피'언들이 권하는 수백권의 책들은 거의 명작이라고 봐야할 책들이다.
어떤 색을 가지고 있든 인간의 다양한 삶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녀들이 권하는 책의 목록중
100분의
1도 읽어보질 못했다. 나의 책읽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접하지 못한 게으름 때문일까.
'소설이 필요할 때'에 나온 목록의 책을 거의 만나지 못했을 때..나에게 권할만한 책은 역시 '소설이 필요할 때'라고 단언한다.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무얼 먹을까 고민없이 제대로 된 식사를 먹을 수 있는 '쉐프의 메뉴'가 바로 이 책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어쩌면 메뉴라기 보다는 처방에 가깝다. 그저 증상에 따라 골라잡으면 된다. 그리고 서점이나 도서관으로 뛰어가면 된다.
그녀들의 처방을 다 섭렵하려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