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죽음 -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는 품격이 있는 죽음을 위하여!
나가오 카즈히로 지음, 유은정 옮김 / 한문화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이제 먹고 살만해져서일까. 삶과 나란한 죽음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지만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은 '죽음'들이 난무했던 봄이었다.
삶은 선택이 아니었지만 죽음은 간혹 선택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쳐올지 짐작하지 못한다.
내가 살고 있는 섬에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예기치 않는 죽음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멀리 도시에서 낚시를 왔다가 실종되거나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섬사람이 바닷속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숨지는 등
죽음은 예기치 않게 다가오곤 한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났지만 오히려 고귀한 죽음은 점점 어려워지는 것같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재택사가 이제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이뤄지는 곳은 병원이나
요양시설같은 곳에서 이루어지곤 한다. 예전에 80:20 이었던 재택사와 병원사가 20:80로 역전되었다는 통계를 봐도 알 수 있다.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존엄함을 잃지 않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고등학교 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자살을 겪으며 인간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저자는 의대에 진학했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종말기 환자들이 병원이 아닌 자택에서 존엄하고 의미있게 마지막 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돕는 재택의료인의 삶을
살고 있다. 그가 현장에서 겪은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서 어떤 죽음이 존엄하고 평화로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역시 고령화사회로 진행되면서 구십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딱 3일만 앓다 떠나고 싶다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데로 된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례들을 보아도 평소 강제적인 연명치료는 절대 받지 않겠다고 단언했던 노인들이 막상 의식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가 의미없는 연장치료를 받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 건강하거나 의식이 명료할 때는 당연히 구차스런 생명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경우가 되면 남은 가족들은 쉽게 생명연장치료를 포기할 수 없게 되버린다.
후에 혹시라도 자책을 할 수도 있고 다른 가족들에게 원망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년 세상을 떠난 막내동생의 경우가 그랬다.
무슨이유에선지 걸음걷기가 불편해지고 약간의 당뇨증세가 있던 동생은 병원을 들어설 당시는 의식이 있고 스스로 걸어다닐 정도로 병이 심각한 경우는 아니었다. 수술도 잘 끝나고 퇴원을 해도 좋을 만큼 병이 호전되어 가던 중 갑작스런 호흡곤란증세가 생겼다.
호흡만 가쁠 뿐 의식은 명료했던 동생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호흡기를 꽂게 되었다.
의료지식은 없었지만 불길한 예감을 가진 나는 제부에게 아직 의식이 있을 때 호흡기를 뽑고 동생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었다.
왠지 동생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란 예감은 결국 나중에 사실이 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진지 열흘 정도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제부와 가족들은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좋아져서 나올텐데 왜 잠깐이라도 호흡기를 떼라고 하냐고
나를 원망했었다. 결국 동생은 죽음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만약 나였다면 의식이 남아 있었을 때 잠시라도 호흡기를 떼고서라도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일단 연명치료에 들어가면 가족도 의사도 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
다만 동생의 심장이 멈췄을 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이 전부였다.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지막 남은 시간을 존엄하고 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동생이 죽고 나는 혹시라도 내가 의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연명치료는 절대하지말라는 서약서를 쓰자고 결심했다.
존엄한 평온사는 내 선택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머니가 이런 상황이 된다면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죽음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

"매일 어떤 팬티를 입고 집을 나섭니까?" 다소 엉뚱한 질문에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른다.
지저분한 속옷바람으로 많은 사람들앞에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매일 오늘 나에게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각오로 깔끔한 준비를 한다는 것은 퍽 멋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친절하게 올려져 있는 '사전의료의향서'를 보고 자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이 될지 곰곰 생각해보자.
남은 가족들에게 폐가 되고 구차하고 의미없는 연장치료를 선택할 것인지 존엄사, 평온사를 선택할 것인지 아직 건강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반드시 짚고 가야할 또다른 삶의 모습이란걸 인식하자.
종합병원에서 대접받는 의사로 살기보다는 인간의 마지막 길을 존엄하게 인도해주기로 결심한 저자의 모습에 존경심이 절로 든다.
과연 우리 곁에 이런 의사가 몇 명이나 될까.
오늘 세월호사건에 주범인 유병언이 비참하게 시골 매실밭에서 뼈가 앙상히 드러난 채 죽어간 모습을 보니 고귀한 '죽음'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다시 생각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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