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붉게 피던 집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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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는 지나가버린 내 옛시간들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은평구 D동의 어느 다가구주택의 이야기가 특히 내마음을 끄는 것은 그 시절 나역시 은평구
불광동 다가구주택에서 신혼살림을 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같은 울타리안에 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 시절 어느 날 문간방에 살던 대학생 영달이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하필이면 사고 전날 그 방에서 살던 신혼부부가 갑자기 이사를 가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왔던
영달이가 그 방으로 옮겨 잠을 잤던 첫날이었다. 아궁에서 옮겨진 연탄이 방문앞에 놓여있고 방문과 창문이 열려있었고
평소에 말이없고 소심하게 보였던 영달이가 자살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던 사건이었다.




세입자끼리만 살던 안채에 세들어살았던 수빈은 29년 후, 잘나가는 대중문화평론가로 유명해지면서 신문사로 부터 80년대
유년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2년 여전 자신의 책 사인회에서 만난 우돌이는 라이락이 붉게 피던 집에서 함께
뛰어놀았던 친구였다. 연인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아가는데..

둘 다 너무 잘생기고 예뻤던 신혼부부와 과일행상을 하던 우돌이네, 버스운전사로 일하던 수빈이네, 그리고 그 안채에서
함께 마루를 쓰던 처녀 세명 그리고 문간방에서 세를 살다 연탄가스사고로 죽은 영달이까지..
연재를 시작한 수빈은 자신의 블로그에 그 시절 라이락 붉게 피던집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알려달라는 공지를 올린다.
그 공지를 보고 연락을 한 신혼부부의 아들 의철로 인해 이제는 상계동에서 '소문난 밥도둑'이라는 간장게장집으로 성공한 새댁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날 낙찰계를 미리타먹고 야반도주를 한 신혼부부의 새댁에 대한 기억은 모두 달랐었다.
처녀셋이 함께 살았던 방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던 목발언니 황경자는 미용실원장이 되어있었고 그녀는 새댁이 뇌종양을 앓던 우돌이
동생 우영이의 치료비를 꿔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도망을 쳤다고 기억했고,
새댁과 동향이라는 또 한 처녀 임계숙이는 새신랑이 바람이 나서 쫓아냈지만 새댁이 임신을 하는 바람에 신랑을 불러들이기 위해
찾아나섰다는 것이다.

그렇게 옛추억의 사람들과 과거여행을 하던 수빈에게 전직경찰 고영두가 나타난다.
오래전 영달이 죽은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로 그 사건에 의혹을 품고 수사를 하려 했지만 검사의 사건중단지시로 자살로 마감지으면서
풀리지 않은 의혹을 찾아 오랫동안 추적을 해왔고 그동안 모아놓은 수사일기를 수빈에게 내어놓는다.
영달의 사건을 뒤좇으며 드러나는 과거의 이야기들.
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 우달에게 숨겨져있던 깊은 상처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누군가는 그 시간들을 절대 농지 못했고 누군가는 숨긴채 숨을 죽이고 살았다.
하지만 우연히 신문연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진실들.

마침 사건의 열쇠를 지닌 여인인 새댁 김순자의 시간을 공유했던 나로서는 그 시절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어울리던 세입자들의 이야기가
정겨웠다. 고무다라이에 물을 채워놓고 아이들이 물장난을 치는 장면이며 하나뿐인 변소를 치우고 물청소를 하는 장면들.
19공탄의 구멍을 맞춰 연탄을 갈던 기억까지...동네에서 모은 낙찰계의 불입금이 15만원이었으니 그 시절 남편의 월급 30여만이 떠오르기도 했다. 나와 함께 세를 살던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추억에 잠겨보기도 하면서 숨겨진 사건의 비밀을 쫓는 재미가 대단하다.
글을 쓰면서 작가의 약력을 다시 들쳐본다. 안타깝게도 그의 나이를 짐작할 만한 정보가 없다. 1980년대의 이야기를 풀어낼 정도라면
나와 비슷한 연배여야 하는데...생각보다 젊은 것 같아 더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도입부에 김옥자와 김순자의 이름이 왜 헷갈렸는지 비밀의 열쇠이기도 한 이 의문이 풀리기도 했지만 다소 싱거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풀어내는 그의 작법은 예사롭지 않다.
미스터리문학의 강국 일본에서도 주목받는 작가라니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사건 현장이었던 은평구 D동 근처에서 고왔던 새댁시절의 내가 혹시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의 사람들과 마주쳤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옛 시간들과 만나 시간여행을 해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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