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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세상을 떠다니는 수많은 언어중에서 빛나는 언어만을 골라내는 재주를 지닌 시인들에게 비치는 사물은 어떤 모습일까.
누구에게나 소중하게 여기는 사물 하나 둘 쯤은 있기 마련이다. 값을 환산하기 어려운 보물도 있을것이고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물건들도 꽤 많을텐데 시인들이 꼽은 사물들은 한때 그들의 삶에 궤적을 그린 그런 사물들이었다.
허연시인에게 타자기는 자신이 골라낸 언어를 다듬어주는 비서같은 역활이었고, 단 한번 파르르 불꽃을 피워내고 사그러지는
성냥은 시인 정영효에게 이제는 편리함에 밀려 사라진 추억의 사물이 되어버렸다.
어렵게 떠난 유학길에서 만난 재떨이에 담배크기대로 파여진 홈이 일본인들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는 고운기시인은 기어이
돌아오는 짐속에 재털이를 숨겨왔다고 했다. 힘든 유학생활을 기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외로움을 이기게 해준 담배와 함께
자신을 지켜봐주었던 의리때문이었을까.
연필 역시 이제는 산뜻한 샤프펜슬에 밀려 보기 힘든 물건이 되었지만 여태천시인이 느꼈던 연필깍는 일에 대한 숭고함이 나도
있었다. 부러지고 뭉툭해진 연필을 쥐고 칼로 단아하게 나무를 깍아내다 보면 검은 흑연덩어리가 얼굴을 내밀고 잘 버려진 칼처럼
뭉특한 흑연덩어리를 갈아내면 빛나는 창처럼 우뚝했던 그 기억말이다.
다음 날 필통을 열면 가지런히 정돈된 연필을 보면서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자했던 어린 내모습이 겹쳐져온다.
가뜩이나 가난한 시절 카메라는 분명 사치였음에도 고이 모아두었던 학비를 털어 카메라를 샀던 시인에게 카메라는 일상을 담는
도구로서뿐만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두는 소중한 매개였을 것이다.
어린시절 부엌의 중심을 차지했던 석유풍로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김해준시인은 풍로를 보며 어린 유년의 시간들을 떠올리곤
한단다. 그러고 보니 시인들이 꼽은 사물들에는 모두 유년의 추억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을 지키는 그저 그런 물건들이었지만 남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시인들에게는 특별한 애장품이
되는 그런 사물들은 모두 생명을 지닌 것처럼 생생하다.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지고 의미가 되어주는 순간 죽어있는 것들이 깨어나고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만 같다.
유용주시인의 '위생장갑'에 얽힌 에피소드를 읽다가는 포복절도를 하고 만다.
그가 한창 아내와 사랑을 나누던 중 콘돔대신 위생장갑을 끼고 겪었을 낭패가 그대로 그려진다. 이런...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추파춥스를 이용해 절정을 즐기려던 친구가 제발 시인 자신이 아니길 바란다.
왠지 시인은 고결해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기대때문에....절대 우리 범인들처럼 싸구려 격정에 휘둘리는 위인들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그래도 눈이 휘둥그레질 이야기를 풀어낼 자신감이라면 그의 시도 예사롭지는 않을 것 같다.
이제는 강화도에서 고기잡는 어부시인뿐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식당을 차렸다는 함민복의 '시계'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서린 사물로 가슴이 저릿해진다. 시인의 말대로 도처에 시계 아닌 것이 없다. 물도 꽃도 시간을 말해주니
말이다.
이처럼 시인들의 눈과 마음에 미친 사물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으니 문득 곁에 흩어져있는 사물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흔하디 흔한 녀석들에게 이름한번 불러주고 눈길 한 번 더 주다보면 녀석들도 제가각 제 얘기를 들어달라고 어리광을 부릴 것만
같다. 하필이면 내집에 와 내 것이 되어버린 것들이 소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과도 인연으로 만났을테니 말이다.
시로만 만났던 시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