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와 바나나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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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단편은 장편의 소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13편의 단편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문단에 내노라하는 기성작가들의 단편모음집 '키스와 바나나'는 우리네 역사에 깊이 각인된 사건들이

등장한다.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사택을 무대로 한 주원규의 <연애의 실질>이나 수원 집단 성폭력사건을

무대로 한 안보윤의 <소년 7의 고백>같은 작품은 권력의 거짓된 모습과 부당함을 고발하고 있다.

보안사령관의 집을 방문한 여자가 찹쌀떡을 먹다 사래가 걸리자 '장군'의 엉뚱한 처치로 피를 쏟고 죽게 되자

턱이 길쭉하여 재산불리기에 능한 관상을 가졌다는 사모가 "그이가 오늘 한 행동 잘한 일이라고 말해줘요"라는

장면은 정치권력의 치졸한 거짓말을 제대로 풍자한다.

 

 

베트남 전쟁을 무대로한 <키스와 바나나>는 유머스러운 성격에 부대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키스'라고 불리는 대원이

적에게 사살당하자 '평정'이라는 이름으로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곁에 동지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 광기에 휩싸인다고 말한다.

가난한 조국의 국민으로 오로지 많은 월급때문에 파병을 결심한 군인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살인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되어버린 광기의 군인들의 모습에서 전쟁의 처참함을 느끼게 된다.

 

1930년대 '구보씨의 하루'를 썼던 박태원이 우연히 현대로 회귀하면서 시작되는 <다옥정 7번지>는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작가의 모습이 참으로 흥미롭다. 기실 알려진 박태원의 사진도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든가, 자신의 집터였던 다옥정 7번지가

한국관광공사건물이 들어섰다든가 하는 설정은 드라마를 보는 것같은 입체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의 후손이 봉준호감독이라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과연 미래의 세상에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느낌은 어떨까.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모티브로 한 <만년필>이란 작품도 눈여겨 볼만하다.

문학에 붙은 상이란 상은 거의 휩쓸다시피한 대작가 윤기는 어느 날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주위에 있는 누구도 그가 암투병중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의 아내를 통해 사실 윤기가 암을 핑계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유독 수상하지 못한 문학상을 거부했던 작품속에 등장했던 사내가 바로 작가 자신이었음을...유작을 통해 발견한 친구 준석은 실제 윤기가

대구의 참사현장에 있었던 것을 알게되고 탈출시 그의 발목을 잡은 여고생을 그가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던 만년필로 찍어내고서야 살아남은 것이 평생 트라우마가 되어 스스로 죽음의 길에 이르렀음을...삶에 대한 의지가 나약한 여고생의 목숨마저 외면해야했던 작가의 고뇌가

잘 표현되어있다. 비단 이런 사건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방관자가 되어야만 하는 작가들의 고뇌가 이와 같지 않을까.

 

어느 한 편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묵직한 의미를 지닌 소중한 단편집이다.

짧은 글을 쓴다는 것은 장편을 쓰기 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곁을 흐르고 있는 시대의 일기들을 쓸 수밖에 없는 작가들의 고뇌도 느껴지는 단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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