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잔의 칵테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이덴슬리벨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동네에서나 한 두개 있을법한 헬스클럽 사브(SAB)에는 특별한 회원들이 저마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몸의 근력뿐 아니라 마음의 근력까지도.

 

 

키가 2m가 넘고 상남자처럼 보이는 곤다는 게이다.

근육을 키우는 운동이라면 모르는 정보가 없을만큼 박식하지만 애교가 많고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바 히바리는 곤다를 곤마마라고 부르는 헬스클럽 동지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마흔 중반에 들어선 게라는 입사동기들이 모두 승진을 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만년대리로 살아가는 무기력한

남자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은 이제 그를 보면 등을 돌리고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우연히 신문사이에 끼어있던 광고지를 보고 찾아든 헬스클럽에서 그는 자신감을 되찾게 된다.

'꿈도 없는 하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대들었던 딸에게 절망하고 바 '히바리'로 찾아간 그에게 곤마마는

가족들끼리도 '근육통'이 필요하다고 위로한다. 그 상처가 나으면 예전보다 굵고 튼튼해지는 원리처럼.

프랑스로 유학가겠다는 딸이 못미더웠지만 발렌타인데이에 딸의 만찬을 먹으면서 이제 그의 품에서 놓아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만화가로 일하고 있는 미레는 스물 다섯의 나이이지만 연재하고 있는 만화의 인기로

제법 유명해지고 돈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사브에서 만난 사람들의 근육을 보면서 소재거리를 찾던 미레는

히바리의 바텐더 카오리가 만들어준'있을 수 없는 일'이란 의미를지닌 '블루문'이란 칵테일을 맛보고 스스로 고민을 해결하게 된다.

바벨을 옮기다 손가락을 부러진 미레는 연재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그동안 쉬지 못했던 자신을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느냐 아니겠어? 어차피

일어난 일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해.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일어난 일을 기회로 삼을 수는 있어....."

곤마마의 이 말이 망설이던 미레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일어난 일뿐 아니라 일어나지도 않은 일까지 미리 염려하는

소심쟁이들 아닌가. 일어난 일을 바꿀수는 없지만 기회로 삼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에 나역시도 용기가

생기는 것만 같다. 

 

치과의사인 사카이는 유쾌한 사내이다. 하지만 3년전 사랑하는 딸을 잃고 공허한 마음을 달랠길없어 유쾌한 말로 자신의

아픔을 숨기고 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딸아이는 자신이 떠날 것임을 알고 엄마 아빠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숨겨두었는데 그렇게 찾은 메모가 100장이 넘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나오지 않자 아내와 사카이는 깊은 절망에 빠져

죽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병원에 있는 대기실에서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책 뒷면에 씌워진 글을 읽고 사카이가 오열할때는

내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지금 대한민국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세월호'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이제 우리들은 아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사카이처럼 인정해야만 한다.

 

 

더이상 아내와 교감하지 못하던 사카이는 곤마마의 바에서 드라이진과 라임주스가 섞인 칵테일 김렛과 '과묵하다'는 의미가

깃든 '솔티 도그'를 맛보고 비로소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동안 떠나보내지 못했던 딸 하즈키를 떠나보내고 아내인 유카와

함께 '솔티 도그'를 마시기 위해 '히도리'로 향한다. 우리도 곤마마의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면 마음속에 고인 슬픔이 사라질 수

있을까.

 

 

예순 여덟의 광고대행사 사장인 스에쓰구는 이른 바 '유토리 세대'(1987~1996년 사이에 태어난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인

직원과의 세대차이때문에 고민중이었다. 이런 그에게 곤마마는 다른 사람을 바꾸려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아..내 딸은 1987년생이고 말썽장이 아들녀석은 1996년생이다. 이 두 녀석때문에 나역시 스에쓰구처럼 가슴앓이를 하고있다.

마치 나에게 해주는 말인 듯 곤마마의 말은 철없이 늙어가는 내게 해답을 제시해주는 것만 같다.

아이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 자신이 변해야 한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멍하니 창밖을 보며 '미래는 줄고, 과거는 늘어간다'는 사실에 허무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스에쓰구의

절망이 내게도 전해져 오는 듯 하다. 이 작가는 아직 그 나이에 도달하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늙어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리 잘 알아내는 것인지..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헤퍼지고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슬픈 땐 울면 되고 불안할 때는 불안해하라는 곤마마의 이야기에

나역시도 위안이 된다.

이 책에 나온 주인공들이 마셨던 힐링 칵테일대신 나는 이 책이 내게 칵테일이 되어 서서히 몸이 잠기는 것만 같다.

팽팽했던 긴장들이 느슨해지고 그동안 숨겨두었던 슬픔들이 아우성을 치고 결국 눈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나를 끌어내리던 감정들은 결국 수면위로 나를 끌어올려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끌려

내려갈 곳이 없어지면 올라갈 일만 남을 것이기에..

 

'무지개곶의 찻집'이나 '쓰가루 백년식당'같이 작가는 따뜻한 음식으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사람이다.

마치 역 앞 허름한 골목 지하에 있는 스낵바 '히바리'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 곤마마처럼.

가뜩이나 온국민이 슬픔에 잠긴 요즘 나는 힐링 칵테일이 될 이 책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다.

'상처는 모두 이곳에 두고 가세요'라고 멀리 떠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무력하게 남은 우리들에게 등을 두드려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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