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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친 8주간의 기록
에바 로만 지음, 김진아 옮김 / 박하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여기서 정상적인 사람이라 함은 적어도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을만큼의-이라고
생각하지만 현대의 사람들은 어느정도의 정신적인 문제는 모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멀쩡했던 사람이 어느순간 돌변하여 범죄를 저지르거나 뭔가에 중독되는 현상들을 보면 자신의 본모습을
감쪽같이 위장하고 있다가 불현듯 본연의 모습이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스물 여덟살의 직장여성인 밀라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을 했다가 더 이상 일을 할 힘도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컴퓨터를 끄고 조용히 회사를 나온다. 자신의 머릿속에 '노 배터리' 표시등이 들어온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밀라는 모든 끈을 놓아버리고 생명이 없는 인형처럼 모든 것을 멈추어 버렸다.
사람들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정신질환을 확진받았다.

밀라가 정신병원에 간 그 목요일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
거식증에 걸려 앙상해진 몸을 가진 여자들과 건장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여자가 되고 싶어
방황하는 모습.
황폐해진 영혼과 누추해진 마음을 지닌 채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툥해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흔히 정신질환을 지닌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과 크게 구별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병원에
모인 사람들의 말처럼 그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아닌 행복과 불행사이의 경계에 있는
사람이란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맛있는 음식들이 단지 칼로리를 계산하는 대상으로 보이는 거식증 환자들의 내면에는 어떤
절박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정상적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여성으로 살고 싶어하는 남자의 본성은 유전적인
요인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조금씩 결핍을 경험한다. 경제적인 것이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든.
그런 결핍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못견디는 사람과의 차이일 뿐, 사실 그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밀라역시 자신이 왜 이 병원에 와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 가는
일이 싫어졌을 뿐인데
말이다. 낡은 옷과 신발을 신은 상담의사 헤닝스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닥터헤닝스와 상담을 할 수록 밀라는 자신의 내면에서 고통받고 있는 또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
부모의 이혼으로 결핍을 느꼈고 그 일이 마치 자신이 잘못인 것처럼 상처받았던 밀라는
'착한아이증후군'에 걸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싫은 일조차 받아들여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병원에 들어와 그런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게 된 밀라는 자신의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직의사를
밝힌다.
그러자 비로서 그녀에게 자유가 찾아온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다녔던 아주 괜찮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하고 정해진 날에 월급을 받는 그런 반복된 일상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기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밀라는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버거운 일상을
내려놓고서야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 책은 작가 에바 로만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누가봐도 결핍이 느껴지지 않는
일상속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 것은 바로 이런 그녀의 경험때문일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은 정말로 미친 사람들을 수용하는 정신병원으로, 혹은
일상으로 각각 흩어진다.
밀라역시 자신을 버려두었던 부모와의 상담으로 숨어있던 상처와 대면하게 된다.
'미친 8주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다가 8주전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에 자신과
비슷한, 혹은 그날 앉았던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다시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밀라는 웃으며 병원문을 나선다.
결국 어디서든 누군가 상처받고 다시 치유받고 그렇게 일상은 계속된다는 사실이..그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멀쩡하게 보이는 나 역시 상처받고 고통받았던 나의 내면과 맞닥뜨리는 일이
두렵다.
아니 사실 나도 결코 멀쩡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보이고 싶어 안깐힘을 쓰고
있을지도.
밀라의 8주간의 기록에서 자유롭지 않은 또다른 나와 마주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