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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서둘러라 - 샘터와 함께하는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재순 지음 / 샘터사 / 2013년 11월
평점 :
대한민국에서 작지만 크고 가볍지만 무겁고 마치 공기처럼 햇살처럼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책은?
나는 단연코 '샘터'라고 답할 것이다. 그 조그만 몸에 어찌나 큰 사랑이 깃들여 있는지 소박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가치를 가진 귀한 책이다.
이런 '샘터'에 43년간 뒤표지글을 써 왔던 김재순님의 글들이 모아져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라면 당연히 '빨리 빨리'서두는 것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이 '빨리 빨리'가 가난하고
자원없는 한국을 지금의 성장으로 이끈 원동력임도 알고 있다.
장점이면서 단점이기도 한 이 조급하고 서두르는 국민성에 뒷짐 지고 나타나서 미소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서둘러라'해주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다독여 주는 것만 같다.
하긴 이제 대한민국은 조금쯤 발걸음을 늦추고 돌아온 길을 되돌아 볼 여유를 가질 때도 되었다.
'문학에는 여정이, 음악에는 여운이, 그림에는 여백이 있어야 아름다워지듯 인생도 여생이 중요합니다.'
-본문 중에서-
쳑을 펴는 첫 장에서 부터 가슴을 치는 말이 쓰여져 있다.
지나온 시간보다 남아있는 시간이 더 적어진 요즘에서야 인생의 여정이, 여생이 소중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餘)라는 뜻은 '남는다' 혹은 '남긴다'라는 의미인데 뭔가 허전한 것만 같은 인생을 채우려고만 급급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지금쯤은 조금 헐렁해줘도 좋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든다.
7선의 국회의원을 지냈고 13대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가의 글은 시끄러운 정치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도 정치인들은 서로를 헐뜯고 자신들의 급여를 올리는 일에는 재빠르고 민생들의 고단한 삶에는 여유가 있는 듯
으르렁 거리기에만 바쁜 족속들이다. 이런 진흙탕같은 정치판에 어찌 고운 심성을 지닌 분이 뛰어들어 수십년을 보냈을까.
마치 고고한 연꽃을 보고 있는 듯 책을 내려놓을 때까지 은은한 감동이 피어오른다.
역사적인 인물들이나 사상,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지식은 깊고 글은 아름답다.
분명 많은 독서가 그의 생을 지탱해왔을 것이란 짐작이 들었다. 구십이 넘은 인생 선배로 세상을 보는 눈은 확실히
평범치가 않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고 투덜거리는 많은 이중에 나도 한 사람이지만 그의 말처럼
인간에게는 기억력보다 소중한 '직관'이 있다. '직관'은 타고 나기도 하지만 부단히 연마해야만 더 정확한 힘을
발휘한다는데 아마도 그가 40년간 '샘터'의 뒷표지에 실었던 글들은 그의 이런 '직관'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을 보고 인간을 보고 과거와 미래를 보고 그리고 삶을 알아가는 일.
난 오늘 아주 '천천히', 마치 맛있는 차를 음미하면서 마시듯 그의 글을 천천히 내 헐거운 영혼속에 부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충만함이 가실 것 같지 않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