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유사 - 천년고찰 통도사에 얽힌 동서양 신화 이야기
조용헌 지음, 김세현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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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양산시 영축산에 있는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가운데 하나인 불보 사찰이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절이 위치한 영축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通度寺)사 했고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통도사내에 있는 금강계단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세우고 돌아와 대국통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게 되는데

이 창건에 대한 설화가 만만치 않다.

통도사가 위치한 영축산은 독수리의 형상을 한 산으로 독수리는 삶과 죽음, 영계와 인간의 경계를 연결하는 동물로

알려져있다. 더구나 통도사가 지어진 터에는 아홉마리의 용이 살았던 연못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자장율사가 용을

설득하여 쫓아보내려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흰 종이에 불 화(火)자를 써서 물을 끓여 쫓아내고 못을 메운 후

금강계단을 쌓고 선덕여왕 15년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유명사찰이 거의 그러하지만 특히 통도사는 영취산의 위엄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품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경내에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논만해도 600마지기가량 된다니 드물게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통도사는 일반백성들을 교육시키는 사찰로 금강계단에서 계를 주어 불교적인 도덕과 윤리의식을 함양하도록 교육시키는

사찰로 역시 구룡이 살았던 연못에 지어진 절터라함은 물과 불이 같이 있어야 종교적인 영험이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자장이 통도사를 창건했을 당시의 불교는 국교로 숭상을 받았던 시기이지만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승려가

지금의 사법고시시험에 준하는 승과에 합격해야 승려가 될 수 있을만큼 사회 지배층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유교에 밀린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국란에 승병으로 나라를 위해 승복을 벗고 분연히 일어서기도 했지만 오히려 절을 떠난 승려가 많아지는 바람에

사회의 맨 하층계급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동안 빛나는 인물들이 통도사를 지키고 구하게 되는데 조선후기 과도한 종이 부역에

시달리던 통도사를 당시 덕암당 혜경스님이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내게 되는 권돈인의 친분이 도움이 되어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다고 한다.

구한말의 구하스님은 거지출신으로 친일파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독립군을 돕거나 만해 한용운을 도와 '불교대전'을

집필하고 '불교유신론'을 펴내는데 일조한다.

 

 

자비와 지혜의 도인으로 선을 꽃피운 경봉선사는 걱정거리가 많은 중생들의 손바닥을 '딱-'치고는

"이 소리를 잡아와봐라."했다는 일화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모든 걱정거리도 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진리를 설파한 선사의 지혜가 얼마나 큰 위안이던가.

박수소리처럼 지나가도 잡을 수 없고 실체가 없는 모든 걱정거리는 몽환포영과 같은 것.

그 실체도 없는 물거품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라는 따뜻한 어루만짐이 미련한

중생들에게 어떤 존경을 받았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렇듯 통도사의 탄생부터 풍수지리적인 의미, 그리고 명찰을 지킨 의인과 고승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고요한 선사에 앉아 명상을 즐긴 것같이 차분한 기분이 든다.

불교민속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해박한 불교의 역사와 더불어 발로 뛰어 수집한 뒷얘기들이 감칠나다.

늘 그렇지만 그의 책을 마주하면 오랜 갈증이 해갈되는 맑은 샘에 당도한 것처럼 설레게 된다.

역시 또 한가지의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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