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다섯살의 여인이 킬러라니...

자신이 선택한 것도 아닌 어설프고 부당하고 비루한 삶이 부여된 열두 살의 소녀는

일곱 평짜리 집에서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할만큼 비좁은 방안에서 부모는 어찌 어찌 그 짓을 해서

기어이 주르륵 고추를 떼고 나온 딸들 밑으로 막내 아들을 보았는지 기가막힌 노릇이지만,

남들 하는데로 새끼들은 가난과 상관없이 죽 질러놔야 하는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귀한 막내아들을 어떻게 써먹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투전판을 전전하던 애비가

돈을 벌어 보겠다고 집을 떠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입하나 덜 요량으로 제법 산다는 당숙모집으로 옮겨진 소녀는 촌수로는 식모보다

끝발 하나가 위였지만 식모 보조가 되어 입에 풀칠 걱정은 덜었다.

일남 일녀와 두 내외의 단촐한 가족 구성원과 처음보는 살림살이에 넋이 나간 소녀는

혼담을 앞둔 언니의 패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쫓겨나게 된다.

 

류를 만난 것은 소녀의 운명이지 싶다.

다시 되돌아간 집에는 가족들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당숙모네로 되돌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을 때, 류와 그의 아내 조는 선뜻 소녀의 손을 잡아 준다.

류의 소개로 들어간 클럽에서 부엌시중을 들던 소녀는 자신을 덮치려는 미군의 목구멍에

꼬치를 박아넣고 이를 목격한 류의 도움으로 뒷처리를 한 후 류와 조, 소녀는 도망치게 된다.

 

이후 소녀는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않는 조와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아내가 묻지 않는 그 일!

소녀는 류에 의해 그 일을 전수받게 된다. 흔히 방역이라 불리는 살인청부업.

류는 말했었다. -이거 소질있네.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병원에 실려가거나 생명이 다하는 날이나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그 세계에 발을 딛은 소녀는 '손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후에 다시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여자는 류와 조와의 묘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떠나려는 '조각'을 주저 앉히면서 류는 말한다.

"네가 없으면 이제는 내가 불편해. 그러니까 관둬."

류에게 조각은 어떤 의미였을까. 조각에게 류는 또 어떤 의미였을까.

 

조각은 예순 다섯살이 된 어느 날 방역을 하던 중 다치게 되고 다니던 병원에서 강박사를

처음 만나게 된다. 서른 여섯살의 이 남자가 조각의 가슴에 박히게 된다.

사실 조각은 사랑다운 사랑을 해보지 못했었다.

아버지 같기도 오빠 같기도 했던 류가 조각이 아는 남자의 전부였다.

 

조각을 죽이려는 투우에게 딸이 납치된 강박사가 그녀를 향해 내가 살려서는 안될 사람을

살려놨나요...라고 묻자 그녀의 마음이 대답한다.

'미안합니다. 그건 나 때문입니다. 내 눈이 당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눈으로

심장을 흘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269p

 

한 때 그녀의 몸에 머무르다 떠나 보낸 아이를 기억해 낸것일까?

강박사의 딸아이를 납치한 투우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던 중 조각은 투우가 왜 자신을 끝까지

죽이려 했는지 알게된다.

자신의 죽여온 수많은 사람들과 남겨진 어린아이들..

죽어가던 투우의 말대로 생명의 불꽃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에 주마등처럼 모든 것이 떠오를까.

 

언젠가 불리던 '손톱'이란 이름을 버리고 '조각'된 여인은 이제 거친 피부와 으드덕거리는

관절이 가진 노부인이 되었다.

이제는 다섯 손가락만 남겨진 칙칙한 손톱위에 무지개빛 메니큐어가 얹어지고 그녀는 여전히

류에게 갈 시간이 아직은 오지 않았음을, 그래서 지금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임을

받아들인다.

 

 

'파과'라는 소설이 저자의 냉장고에서 비롯되었다는 마지막 말이 인상깊다.

누구나 냉장고안에 수많은 비밀들이 담겨있고 썩어가고 있지만 세상에 이렇게 멋지게 재탄생시켜

내놓을 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여자의 쓸쓸한 인생이 그것도 사람의 목숨을 떼어내는 방역업을 하는 여자의 미처 달구어지지

못한 사랑이 애달파 헛헛해지는 가슴을 자꾸 문질러 본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소설이 언젠가 영화화가 될 거라는 예감때문에 읽는 내내 과연 예순 다섯살의

'조각'이란 여인을 누가 연기할 것인가가..숙제처럼 다가왔다.

이 정도 멋진 킬러역을 해내려면 '안젤리나 졸리'급은 되어야 하는데..

'은교'를 읽을 적에도 그랬었다. 누가 '적요'를 연기할 것인가...결국 내 예감대로 은교는 화려한

필름을 감고 세상에 나왔었다. 글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공을 넘겨야겠다.

'조각'은 어느 배우가 어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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