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박수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 다섯살이나 차이가 나는 남자 진지와 6년째 동거중인 토와코는 아주 오래전 근무했던

회사에서 그를 만났었다.

T건설에 다니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던 그였지만 지금은 퇴직한 후 조그만 회사를

전전하며 꾀죄죄하게 늙어가고 있는 한심한 남자였다.

검은 피부에 작은 키, 땀냄새와 담배냄새가 몸에 밴 지저분한 남자와 함께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토와코는 8년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쿠로사키를 잊지 못한다.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하고 세련된 옷차림의 쿠로사키는 그녀에게 영원한 애인이었고

언제나 다시 만나고픈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5년전에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진지가

쿠로사키를 죽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된다.

그러던 중 고장난 손목시계 때문에 알게 된 백화점 직원 미즈시마와 불륜에 빠지게 되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쿠로사키처럼 미즈시마를 잃게 될까봐 집착하게 된다.

 

달콤한 사탕처럼 자신의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쿠로사키처럼 미즈시마역시

그녀를 달콤한 말과 섹스로 현혹시키고 토와코는 지겹기만 한 진지와 헤어져 유부남인

마즈시마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은 꿈을 꾸게 된다.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고 조만간 이혼을 하겠노라는 말로 토와코를 안심시킨 미즈시마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몸을 사리게 된다.

 

사랑하기는 커녕 너절하고 한심한 늙은 남자와 살고 있다는 것에 지독한 혐오를 느끼는

토와코는 자신을 사랑했다고 믿었던 쿠로사키와 미즈시마를 동일시하며 묘한 집착감에 빠진다.

언제든지 진지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리라 꿈꿨던 토와코는 쿠로사키의 실종을 안 순간부터

진지를 의심하게 되고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한 남자의 실종과 그 실체를 따라가는 미스터리물을 닮았지만 이 소설은 지독한 사랑이야기이다.

누가봐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자와 찌질한 남자와의 묘한 동거부터 혐오감을 유발하지만

댓가를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남자의 사랑에 점차 가슴이 찌르르 해지는 것을 느낀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잣대로 사랑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는 것일까.

잘생긴 외모와, 재산, 환경..물론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진지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초라하게 살아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다.

쩝쩝거리며 음식을 먹고 화장실을 더럽게 사용하고 누가봐도 한심한 족속인 진지의 삶을 우리는

눈으로만 본 것이었다.

퉁퉁 불어터진 우동국물을 얻어먹고 바나나 하나를 다 먹어보지 못하는 가난을 겪은 소심한 소년의

외로움을 우리는 얼마나 이해했을까.

 

결국 쿠로사키의 죽음뒤에 진실이 밝혀지고 이야기는 큰 반전을 맞는다.

어눌하고 볼품없고 더러운 중늙은이 진지의 마지막 말은 큰 여운이 되어 내 가슴에 남는다.

토와코는 무엇을 잃고 살아온 것일까. 그녀의 가벼운 삶이 오히려 한심해진다.

가슴 깊이 자리한 트라우마의 실체를 보면서 우리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진실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녀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새들'은 결국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고 날려보낸 무수히 소중한

것들에 대한 보고서인 셈이다.

지금 내 곁에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2012년 마지막 날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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