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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연애
성석제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12년 12월
평점 :
늘 그런것은 아니지만 나의 까다로운 파장과 딱 맞는 책을 만나면 그 때부터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어 소설속에 소설 한 편이 더 존재하는 것 같은 모호함에 휩싸인다.
대체적으로 그 작가의 책들이 비교적 나를 흡족하게 한 경우이긴 한데 작가들의 작품속에는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여 지난 작품들과 닮아있는 경우도 많고 아주 드물게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내가 알던 작가가 맞나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시대의 입담꾼이라는 별명을 지닌 작가답게 말하고자 하는 폼이 넓다보니 읽기전에
마치 전혀 먹어보지 않은 새로운 음식을 앞에 놓은 것처럼 약간은 설레고 약간은 주눅이 든다.
몇 편의 작품에서는 그가 지나왔을 시간과 공간속에 스며들었던 추억일 수도 있고
기행일 수도 있던 얘기들이 있었고 희한하게 음식과 추억이 머무려진 이야기도 있었다.
'단 한번의 연애'만 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으리라는 단정은 할 수 없지만 꽤 진부한 사랑을 풀어 놓았으리라고 짐작한다.
열마리의 용이 승천하다가 아홉 마리는 승천했고 한 마리는 남아 바다로 떨어졌다는 '구룡소'가
고향인 '이새길'과 '박민현'의 사랑 연대기라고 하면 맞을까.
아니 책을 덮고 나서 굳이 조정한다면 소년의 해바라기 사랑쯤이 더 타당한 정의일 듯 싶다.
일제가 물러간 후 호황이던 항구는 잠시 조용했지만 고래잡이로 다시 풍요함이 펼쳐진다.
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던 고래잡이는 소년과 소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고향에서는
한창이었던 모양이다.
인간에게도 페로몬이 있는지에 대한 과학적인 논쟁과는 상관없이 민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르게 뛰는 것을 느끼는 예민한 후각을 지닌 새길에게 민현은 영원한 마돈나였다.
자신이 가진 신비스런 이끌림의 능력을 이용하여 남자를 이용할 줄 아는 민현은 '걸레'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평범한 새길은 그녀가 '대학에서 만나자'라는 말 한마디에 죽을 둥 살 둥 그저 그런 대학에 입학하고
군사독재의 소용돌이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전경으로 군에 입대한 새길에게 정권의
하수인이라고 낙인찍은 민현은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한다.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민현을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된 새길은 취조중인 경찰에게 유린되기 전
민현을 안게된다.
"어서 나를 가져. 저 사람들한테 내가 더 더러워지고 망가지기 전에."
어쩌면 민현은 그녀를 따라다니던 수많은 더러운 소문처럼 '걸레'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를 헤치지 않고 나를 독점하거나 내게서 뭘 빼앗아 가지 않으면서. 순수하게 나를 좋아한다는 느낌을
준 유일한 사람'이었던 새길에게 몸을 연 그날이 그녀의 첫 경험이었다고 믿고 싶었다.
'나나'였던 민현의 어머니는 힘든 파도를 가르는 새끼고래를 제몸에 얹어 세상에 끌어올리기 위해 바다로
떠났는지도 모른다. 결국 민현은 요정의 마담이 되어 정계, 제계의 막강한 힘을 얻은 어미의 도움으로
멋진 날개를 얻어 큰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넒고 넓은 바다에 고래 세 마리가 있었다. 도망치던 새끼가 힘들어 하면 어미가 지느러미에 새끼를 얹어
업고 갔다. 아비는 심장에 작살이 박혀 주변을 피바다로 만들고 죽을 때까지 가족의 뒤를 지켰다.
넓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171p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게 에비, 에미의 운명인 것을.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으로 집을 나간 엄마를 증오하며 혼자 남겨졌던 민현은 에미와 자신을 사랑하던
남자 새길에 의해 넓은 바다로 나가 큰 고래가 되었다.
여전히 민현을 사랑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새길은 철새처럼 찾아드는 민현을 위해 고향에 요새를 방불케
하는 보금자리를 만들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어쩔수 없이 새길의 모습에서 작가를 본다. 뭐 작품속의 배경이 그의 고향은 아니지만 워낙 역마살이 든
그가 맘속에 고향이야 한 둘 이겠는가. 신비한 끌림을 지닌 머리좋고 아름다운 여인 민현은 그의 첫사랑과
닮았을 수도 있고 막연하게 꿈꾸어 온 여인일 수도 있겠지.
정처없이 지나던 어느 바위산 속 동굴을 보면서 태양발전과 풍력발전을 끌어오고 샘솟는 맑은 물을 식수로
하는 궁리도 하지 않았겠나.
온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로 소외와 무지를 가뿐히 날리고 온전히 자연의 힘으로만 성장한
풀들을 먹어보겠다는 도락가의 소망도 버무렸겠지.
그래서 난 또 어쩔 수 없이 평생 꿈꿔왔던 사랑과 지극히 안전하면서도 안락한 공간속에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밖에 없다. 글쎄 평생 결혼이란 족쇄를 차지 않고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 연애만
했던 새길의 모습도 역시 작가의 소망이 아닐까.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 자신이 녹아들지 않은 작품은 없으므로
나의 이런 상상은 완전히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에 나도 '단 한번의 연애'의 주인공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