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면 없어라 - 김한길 에세이, 개정판
김한길 지음 / 해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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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이 나무라면 좋겠다.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맞추면 그 꼴이 드러나는 나무판자라면 좋겠다.

책상이 될지 금고가 될지 아직은 모른다. 어쨌든 나는 거기에 니스나 페인트를 칠하지는 않겠다.

그냥 진흙을 문대어 그 무늬나 선명히 드러나도록 할 테다.'-140p

 

한 때는 뭐가 될지 모르는 통나무 같았을 때가 있었다. 대지의 기운을 받고 햇살로 키워진 몸뚱아리가

이제 뭔가가 되기 적당한 어느 때 한 남자는 덧붙이거나 칠하지 않은 민몸뚱이로 살고 싶다고 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겨우 배고픔을 면한 행색에 최류탄냄새로 찌든 초라한 몰골이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동안 그를 지켜봤던 기억으로라면 그가 미국을 택한 것은

바로 이런 그의 기질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부로 하고 싶었을테고.

 

어쨋든 그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 함께 나성구(LA)로 떠났다.

흑석동 산꼭대기집에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었고 세검정에 살았고 아직 고생이라는 걸 모르는 아내와

함께 가난한 유학생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방탄유리안에 몸을 숨긴 채 밤새 주유소아르바이트를 하고 낮에는 햄버거가게에서 일하며 그는 눈이

벌게지도록 돈을 벌고 공부를 했다.

 

그가 가게주인 최씨를 증오하면서도 몇푼의 돈을 벌기위해 자존심을 숨겼듯이 10년후 나 또한 그가 살았던

LA뒷골목에서 그와 똑같이 가난한 유학생의 몰골로 삶을 견뎠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자꾸 미워하는 자신이 너무 미워서 견디기 힘들었다는 탄식에서 그의 고뇌가 깊이 다가온다.

아파트에서 쫒겨날까봐 고양이도 키우지 못한 어설픈 타국살이의 설움이 내 일처럼 다가왔다.

나또한 그처럼 그렇게 나성구에서 살았으므로.

 

젊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가라면 절대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젊음은 아름답다. 갓 결혼하여 가장으로서의 무게와 혹독한 생활의 무게를 그대로 받아내는 그의

고군분투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정당하게 일한 댓가조차 제날짜에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교포사회의

뻔뻔함은 그 뒤 나역시 처절하게 실감하게 된다.

도대체 교회는 왜 다니는 것일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어줍잖은 기독교인들의 이기심이 의협심강한

그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모욕이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돈을 벌기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하는 그 즈음...'그래도 글을 써야죠'했던 한국일보 지사장의

도움은 그에게 한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글을 팔아 돈을 버는 자존심은 지킬 수 있어서.

귀밑머리 풀었던 아내와 그 뒤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역경속에서도 그렇게 꿋꿋하게

잘 견뎠던 그가 아들 하나를 얻고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그가 결국 혼자 돌아오게 되었는지 몹시도

궁금하다.

 

가난했지만 버틸 수 있었던 젊음이 그립다. 30여년전 초라했지만 지금은 그 시절을 훈장처럼 떠올릴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는 어쨋든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가끔은 기억해야 한다.

탱탱하던 삶이 느슨해지고 슬슬 게으름과 타협하고 싶어질 때 줄을 당기듯 그 시절 이야기에 한번쯤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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